권력과 권력자, 두려움과 무기력
시간이 지나고 수행업무를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안희정이 가진 권력의 크기를 점점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럴수록 두려움도 커졌다. 범죄 피해 사실을 말하는 순간 내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그대로 굳어져갔다. 나중에 알게 된 단어지만, 그것은 '학습된 무기력'이었다.그저 내가 떠안고 살아야 하는 폭탄, 입을 떼는 동시에 나도 함께 폭발해 죽는 뇌관이 내 온몸에 감싸여 있었다. - 14
그러고는 "너는 미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미투에 대한내 의견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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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감히 어떻게 미투를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내게서 미투를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결국 내 대답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후 안희정은 내게 다시 성폭행을 가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덫을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에게서 나는 옴짝달싹 못 하고 그대로 비틀려졌다. - 17
위력의 무서운 점은 위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스로 몸이 굽혀진다는 것이다. 위력은 상대를 압도하는 힘이다. 타인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형적, 무형적 힘이다. 폭행이나 협박을 동원한 경우는 물론,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의사를 제압할 경우도 포함된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힘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 때로는 직급으로 인해, 때로는 성별로 인해, 때로는 나이로 인해, 때로는 조직이나 재물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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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참는 일은 많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업무나 학업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위력이 존재한다고 해서 학교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력의 실상이자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 174
-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봄알람, 2020
가해자를 당당하게 만들고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