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 그리고 특별하다는 기분/느낌
넷플릭스 드라마 <더 폴> 시즌2:6화에 보면 경찰인 깁슨이 연쇄살인범 폴을 심문하겠다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자 동료 경찰인 번즈가 깁슨을 말리면서 이렇게 말해요.
번즈 : 나도 악질 범죄자들을 직접 마주해 본 적이 있어.
i've been face-to-face with pure evil, stella.
그는 인간이 아니야. 단지 괴물일 뿐이야.
he's not a human being. he's a monster.
깁슨 : 그만해요. 제발요.
그건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일 뿐
you can see the world in that way if you want,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요
you know it makes no sense to me.
...
깁슨 : 스펙터 같은 범죄자들도 다 인간이에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요.
men like spector are all too human, too understandable
그는 괴물이 아니라 한 인간이에요.
he's not a monster. he's just a man.
저도 화가 나면 욕을 해요. 저 개자식, 저런 쓰레기 같은 새끼, 저건 인간도 아니야...사람이 열 받으면 온갖 욕지거리가 튀어 나오잖아요.
근데...문제를 해결하려면 욕 너머에 뭔가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욕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런 짓거리를 보고 욕이 안 나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지요. 다만 그런 일을 방지하고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요. 그것이 히틀러든 전두환이든 조두순이든 말이에요.
이해한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이나 수용한다는 것이나 곧바로 용서한다는 것은 아닐 거에요. 말 그대로 이해하는 거에요. 연구하고 분석하고 해석해서 그것이, 그 인간이, 그 행동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거지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지 싶어요. 이 바이러스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인간 몸 속으로 들어와 문제를 일으키는지, 어떻게 해야 바이러스를 제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거지요. 그래야 치료약도 만들고 백신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조두순 같은 인간이 인간 세상에 딱 1명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또 나타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인간들이 나타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데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요인, 심리적 요인, 성적 요인, 사회적 요인 등등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런 인간들이 더 이상 나쁜 짓을 벌이지 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번즈의 말처럼 폴은 순수한 악pure evil이고 괴물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폴 스펙터는 인간이에요. 폴 스펙터가 저지른 일은 인간 행동 가운데 하나에요. 그러면 그런 인간은 어떻게 해서 그런 인간이 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지요. 체포하고 처벌하는 것은 기본이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요.
전두환 같은 인간은 아무리 법정에 세우고 감옥에 넣고 비난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요. 우리 같으면 나쁜 짓을 했다가도 그만큼 욕을 처먹으면 움찔이라도 할 것 같은데...전혀 그렇지 않은 거에요. 왜 그럴까요? 왜 그 인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을까요? 유전자 구성이 다른 걸까요? 아니면 남들 앞에서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연극을 하는 걸까요? 어린 시절 학대를 받으며 성장 했을까요?
악에 대해 이해한다고 저절로 선의 세상이 오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악에 대해 이해한다면 악과 싸우고, 악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데는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폴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폴 : 내가 경험하는 생각과 감정들은 당신이 환상이라고 부르는 그 이상의 것들이야.
the thoughts, the feelings that i experience are way beyond anything that you could call fantasies.
소리도 색깔도 훨씬 더 선명하고 냄새도 훨씬 더 강하거든
sounds and colors are more vivid, odors more intense.
...
나를 둘러싼 세계는 사라지고 온전히 나만 존재하게 돼.
the outside world means nothing, only the interior world is real.
상상할 수 없을만큼 강렬하고 흥분되지.
it is utterly compelling, compulsive.
한번 이 느낌을 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어.
nothing can pull you back from the edge.
법, 규범, 도덕이나 종교적 가치에 어긋나고 죽음을 감수해야 하더라도 말이야.
not laws or threats of punishment, morality, religion, fear of death.
요즘 코로나 때문에 유명해진 종교 단체들이 있죠. 뭐하는 곳인가 싶어 유튜브에서 찾아봤어요. 직접 찍어 올려놓은 집회 영상이 많더라구요.
저같은 비종교인들이 보면 잘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이 있어요. 왜 저렇게 소리치고, 왜 저렇게 울고, 왜 저렇게 들떠 있을까 싶고 그래요. 아마도 저는 잘 모르는 어떤 경험을 하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잘 모르는 어떤 것을 느끼기 때문일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그 어떤 강렬하고 흥분된 느낌이 있겠지요. 그리고 그 느낌을 한번 느끼면 다시 느끼고 싶어할지도 몰라요.
저는 종교도 없거니와 술을 먹거나 마약을 하지도 않아서 세상 다른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나만 혼자 남게 되는 그런 느낌을 잘 모르겠어요. 뭐 어쨌거나 그런 느낌을 가진 분들은 다른 모든 것들은 허상이고 거짓이며 의미 없는 것이고 지금 자신의 느낌만이 진실이고 현실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아요. 폴이 다른 세상은 무의미하고, 오직 내 안의 세계만이 현실이라고 했던 것처럼요.
어떤 경험이 '지극히 현실적이라' 하더라도, 신경학은 그 현실성을 냉정하게 평가절하할 수 있다. 사실처럼 보이는 착각과 허구를 창조하는 뇌의 능력은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뇌는 당신이 당신이라는 착각을 창조한다. - 케빈 넬슨, <뇌의 가장 깊숙한 곳>, 해나무, 2013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인들이나 유대인을 괴롭히는 독일인들한테, 그렇게 흥분과 열정으로 가득찬 이들에게 당신들은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요. 인간 세상의 도덕이나 규범 같은 거는 자신들과는 관계 없는 거라고 하겠지요.
몰입해 있고, 집중하고 있고, 흥분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처벌이나 죽음도 두렵지 않겠지요. 오직 자기 내면의 이끌림을 따라갈 뿐이지요. 그것을 신의 말씀이라고 하든 민족의 운명이라고 하든 마찬가질테구요.
폴 : 난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됐어.
something that seperates you from the common herd.
...
하지만 그 후 신이든 인간이든 날 대적할 수 없겠다 싶더군.
but then you fine yourself unchallenged by divine and secular power.
신이든 인간이든 신성한 것이든 세속적인 것이든 대적할 수 없겠다 싶었다네요.
폴 : 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강력하고 감각적인 삶을 살지. 다른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신이 된 듯한 그 느낌을 당신은 이해 못 해. 내가 모든 것을 소유했다는 느낌이거든.
l live at a level of intensity unknown to you and others of your type. you will never know the almost god-like power that i feel when that last bit of breath leaves a body. that feeling of complete possession.
깁슨 : 전지전능해진 기분이겠지.
yes you felt empowered, invicible even.
길고양이를 잡아다 괴롭히고 죽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폴 스펙터처럼 여성들을 골라서 죽이는 사람이 있구요.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죽였고,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죽였지요.
그렇게 죽이면서 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니 어떤 기분이나 느낌을 갖고 싶어서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죽였던 걸까요?
타인을 지배하고, 그들의 생명을 빼앗으면서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 된 것 같고,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만큼의 큰 힘을 갖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요?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죽이면서 전지전능해지고 천하무적이 되고, 마치 신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졌을까요?
깁슨이 살인 이후의 느낌에 대해 물어요.
깁슨 : 죄책감이나 수치심은? 후회나 두려움은? 두렵다는 감정을 느꼈나?
guilt? shame? remorse? fear? you must feel fear.
깁슨의 말에 대해 폴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깁슨이 말해요.
깁슨 : 그 기분은 중독이야 다른 중독과 다를 바 없어.
it's an addiction like every other.
중독은 그 행위를 끊임없이 유지해야 하지.
it's an addition that needs to be fed.
중독은 당신을 노예를 만드는 거야.
it's an addiction that enslaves you.
폴은 자신이 하찮은 것들, 아랫것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자유롭게 산다고 하지만 깁슨은 그가 체포되어 있고 감옥에 갈 거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너는 중독되어 있고 그 중독의 노예라고 하고 있습니다.
폴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는 기분...저도 어느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저도 그런 기분을 느껴봤거든요. 물론 그 순간에는 잘 몰라요. 그냥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걸 나만이 알고 있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 나만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세상은 별 생각 없이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는데 나는 어떤 특별한 운명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내가 나서서 망가져가는 세상을 바로잡아야 할 것도 같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폴처럼 누군가를 죽인 적은 없어요. 독일인들이나 일본인들처럼 칼과 총을 들고 몰려다니며 약한 사람들을 두들겨패거나 하지도 않았구요.
폴은 악이고 저는 선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폴은 괴물이고 저는 인간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구요.
그보다는 인간은 왜 자신은 남들과는 다른,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특별하고,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게 되는지 싶어요.
그리고 자신은 특별하다는 생각이 어떻게 지배나 폭력과 결합하면서 타인을 괴롭히게 되는지도 싶구요.
지배하니 특별하다고 느끼고
특별하다고 느끼기 위해 지배하려 드는 건가도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