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고통
나는 히틀러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고통을 영원히 마음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명령으로 살해된 사람들을 생각해도 그에 못지 않게 고통스럽다.
고문당하고 총살당하고 굶어 죽은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히틀러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우리 나라에는 그런 사람들이 수백만이나 있었다.
전쟁은 새로운 슬픔과 훨씬 더 새로운 파괴를 가져왔지만 나는 공포로 마비되었던 전쟁 이전의 시절을 잊지 않았다. <교향곡 제7번>과 <교향곡제8번>뿐 아니라 <교향곡4 제4번> 이후의 내 교향곡이 말하려던 것은 그 시절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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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교향곡은 대부분 묘비다. 너무 많은 수의 우리 국민들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조차 알지 못한다. 내 친구도 여러 명 그런 일을 당했다. 메이예르홀트나 투하쳅스키의 묘비르 어디에 세우겠는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나는 이런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품 하나씩을 바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그들 모두에게 내 음악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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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에서 <교향곡 제7번>과 <교향곡 제8번>은 ‘전쟁 교향곡’이 되었다. - 371
유대 민속음악의 이런 속성은 음악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 생각과 아주 비슷하다. 무슨 음악에든 두 층위가 있어야 한다. 유대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왔기 때문에 자기들의 절망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그들은 춤곡에서도 절망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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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순전히 음악적 이슈만이 아니라 도덕적 이슈이기도 하다. 나는 유대인을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시대에 자기가 선량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반유대주의자일 수는 없다. 이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어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주제를 갖고 30년이 넘도록 논란을 벌여야 했다. - 373
서로 반대 진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내놓은 선언이란 것이 서로 닮아가는 걸 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만약 음악이 듣기 흉하고 추악하고 야만스러운 것이 되면, 그것은 그 자체의 존재 목적을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며 그런 것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다”
자, 고급 예술을 지지하려는 탐미주의자라면 누구라도 이런 발췌문 밑에 기꺼이 서명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말은 저 탁월한 음악 비평가 즈다노프의 발언이다. 저 탐미주의자들과 그는 인생과 비극, 희생자,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음악에 똑같이 반대한다. 음악은 오로지 아름답고 우아해야 하며 작곡가들은 순수하게 음악적 문제에만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는 편이 시끄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관점을 언제나 격렬하게 반대해왔으며 그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나는 언제나 음악이 적극적인 세력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게 러시아의 전통이다. - 378
- 솔로몬 볼코프, <증언-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고록>, 온다프레스
음악이라는 것이
가진 자들이 자신을 뽐내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겠으나
고통 속에 죽어간
비참한 목숨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일수도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 반대하는가
그것이 인간 내면의 어두운 모습을 담고 있어서?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나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 반대하는가
거기에 인간 사회의 참혹한 폭력과 비참한 인생이 담겨 있어서?
음악과 예술이란 무엇이며
그것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