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인간의 사유 능력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하고, 사유 하지 않는 인간과 과연 토론이 가능한가 싶은 서글픈 마음이 들기도 한 날이었습니다.
주제 찾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토론을 하는데 오늘의 토론 주제가 'A는 옳은가 그른가?'라고 하지요. 'A는 옳은가 그른가?‘라는 주제는 A라는 대상을 놓고 ‘옳은가 그른가’라는 판단을 하는 겁니다.
토론을 잘하려면 A에 집중해야 합니다. A라는 놈을 이리도 돌려 보고 저리도 뜯어보면서 이놈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대뜸 ‘그런데 말야 나는 B가 옳은 것 같아’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A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이런 저런 것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B가 옳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콩을 볶다가 육수가 생각난다고 마른 멸치를 꺼내 들지는 말아야지요. 콩을 볶기로 했으면 콩만 생각해야 합니다.
‘남성들이 집안일을 어느 정도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묻는데 ‘나는 우리 마누라를 잘 도와줘’라고 답을 한다거나 직장 내 성희롱을 어떻게 막을 거냐고 방법을 묻는데 ‘나는 우리 회사 여직원들한테 친절해’라고 답을 하는 경우입니다. 머리에 드는 생각이라고 다 말하다보면 날 새게 됩니다. 날 안 새고 토론을 좋은 결론으로 이끌려면 오늘의 주제가 B가 아니라 A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나는 A가 싫어’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A가 좋냐 싫냐’가 아니라 ‘옳으냐 그르냐’입니다. 각자의 감정이나 느낌에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A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 묻는 겁니다. 동성애는 비윤리적인 행위인가 아닌가라고 묻는데 갑자기 ‘나는 동성애를 혐오해’라고 한다면 그건 이미 토론 주제에서 벗어나 있는 겁니다.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기보다 토론 주제에 맞는 생각을 해야겠지요.
토론의 목적
토론을 하다 보면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답을 찾기보다 상대를 무조건 이기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알기 위해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토론을 이용하는 것이며, 더 나은 앎을 얻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를 굴복시키고 싶어 하는 겁니다. 함께 토론하는 사람이 함께 앎을 찾아가는 주체가 되기보다 내가 이겨야할 대상이 되는 거지요.
이러나저러나, 상대의 말보다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으면 자신의 논리를 더 깊고 꼼꼼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때로는 좋지 못한 태도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말이야’ ‘내가 선생인데’ ‘내가 니 윗사람이야’ 등등
지금은 A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이지 토론에 참여한 사람의 지위에 대해 묻는 시간이 아닙니다. 자신이 내세워야할 논리 그릇이 있는데 거기에 채울 논리는 부족하고, 토론에서는 이기고는 싶고 그러니 부족한 논리를 다른 권위나 힘으로 채우려 하는 것은 토론에 임하는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우리 사돈의 팔촌의 옆집 사람이 어느 대학 교수인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라는 것까지 동원합니다. 지금 얘기하는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이고, 의견을 묻는 건 두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것이지 그 사돈의 팔촌의 옆집 사람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닙니다. ‘대학교수’라는 지위에 매달리기보다 자신의 논리 그릇을 더 채우면 좋겠지요. 사돈의 팔촌의 옆집 사람의 의견은 참고만 하면 됩니다.
어떤 분은 ‘내가 말이야 그런 거 다 겪어 봤는데 말이야’라며 자신의 경험으로 논리 그릇을 한 가득 채웁니다. 그러고 나서 ‘자 봐 내가 이렇게 많이 겪었으니 내 말이 맞지?’라고 합니다. 내 말 속에 담긴 내용의 앞뒤가 맞고 속이 꽉 찼을 때 내 말이 맞을 수 있는 것이지 내가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다는 것이 내 말이 맞다는 것을 뒷받침해 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인도와 팔레스타인에 가봤다고 해서 인도와 팔레스타인에 관한 저의 의견이 모두 맞을 리야 있겠습니까.
경험은 판단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이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곧바로 주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경험을 한 사람도 서로 다른 느낌이나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오늘의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묻고 답을 찾는 것은 A에 관한 것이지 나의 경험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6.25를 겪어 보지 않은 니들이 뭘 알아? 내 말이 맞아’라고 할 것이 아니라 ‘6.25를 겪어 보니 이런 저런 면이 있습디다. 그러면 제 생각이 맞는 게 아닐까요?’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태도이겠지요.
2011년을 사는 한국 사람이 임진왜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임진왜란을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것에 대해 판단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보다 다른 경험을 했다는 것은 내가 상대보다 다른 경험을 했다는 것을 말할 뿐 지금 나의 판단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를 찾고 지적 능력을 높이고 싶으면 과거의 경험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좁고 답답한 방 안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밝은 빛과 푸른 들의 세계로 자신을 내 보내야 합니다.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어릴 때부터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대화나 토론보다는 서열에 따른 지시와 복종에 익숙해왔습니다.
흔히 벌어지는 일이 ‘에이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건데 맞겠지요’ ‘내가 올해 나이가 00인데...’와 같은 것들입니다. 학교에서는 문제의 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시험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는데 급급했습니다. 사회생활은 나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상대방이 듣기 좋아할 만한 말을 하는 게 몸에 배도록 만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의 생각을 키우고 그것을 상대방과 나누는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겠지요.
함께 토론하는 사람이 나의 형님이든 언니든, 나보다 나이가 적든 많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그런 것들은 토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토론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토론 밖의 것에 마음을 쏟으며, 토론과 관련 없는 것들로 자신을 꾸미려고 합니다.
지혜 없는 이들에게는 토론과 관련 없는 것들로 자신을 꾸미는 것이 멋있다고 느껴질지는 몰라도, 지혜 있는 이들의 눈에는 초라하고 불쌍한 몸짓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적은 사람이든 여자든 학생이든 그 누구에게라도 배워야지요. 배움에 앞서는 사람이 더 성숙한 사람이지 온갖 권위를 동원해 상대를 잘 굴복시키는 사람이 더 성숙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경험도 내려놓고 지위도 내려놓고 이기려는 경쟁심도 내려놓고 오직 대상과 대상에 대한 사유에 집중할 때 지혜는 우리 앞에 꽃을 피울 것이고, 우리는 그 꽃 앞에서 마음 뿌듯하게 웃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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