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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上勝彦, <식민지-일본의 산업혁명과 식민지 조선>

순돌이 아빠^.^ 2013. 7. 15. 21:38



村上勝彦, <식민지-일본의 산업혁명과 식민지 조선>, 한울, 1984




1. 서론

2. 미면교환체제의 성립과 일조무역

‘물품무역’의 경향적 증대...81~83년의 높은 비중은 초기 무역의 불안정성, 우발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조선개항무역에 있어서 일본의 독점 및 무관세권에 의한 일본상인의 유리성에 그 원인이 있다...84년에 수출입 모두 격감하는 것은 이러한 독점의 종료와 그해의 해관설치에 연유한다. - 12, 13

노일전쟁 이후는 수입이 안정적으로 높은 비중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이 일본의 식량․원료 공급지로서 정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 - 13

외국산품 수출품으로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면포를 주로 하고(40%), 다음으로 연료, 석유, 면사(각각 15, 10, 4%)등 영국, 미국, 독일 제품이 중심이다. - 18

(1885년의 단계) 내국산품 수출과, 재수출된 생우피 분을 제외한 수입의 연관 즉 일본과 조선간의 직접적인 생산․소비에 관련된 현실의 재생산 연관에 있어서는 곡물(쌀이 주종, 21%) 구리(14%), 견포(12%), 면포(9%)의 수출과 생우피(32%), 두류(대두가 주종인 것으로 추정됨. 22%), 쌀(11%), 약재(7%), 생사․누에고치․진면류(5%)의 수입(재수출품을 뺀비율)이라는 서로 농업후진적인 무역관련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 18

1896년 단계
이 단계에서는 내국산품수출이 수출의 91.0%를 차지하여, 중계 무역적 성격을 거의 탈피...수출에서 면포(29%), 면사(13%)가 내국산수출품의 4할 이상을 차지하고...수입은 쌀(56%), 두류(대두가 주종 30%) 2상품이 대종...청일전쟁 직후의 단계에서는 면제품을 수출하고 쌀( 및 대두)을 수입하는 무역 구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무역 구성을 양적 관점에서 일단 ‘미면교환체제’라고 부르기로 한다. - 18

1908년 단계
수출에서는 면포․면사의 비중이 낮아지고 있는 반면 목재판․술․석탄․종이의 비중 증대, 종래 아주 작거나 없던 기계류와 설탕(대만영유화의 소산)의 비중 증대가 보이고, 수입에서는 철광석․비료․면화의 수입이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
첫째, 군기軍器 재료이며 노동수단의 원료인 철의 원료 확보를 필수적인 과제로 했던 당시 일본자본주의에 있어서 조선철광석의 확보․수입은 중국 大治철광석 확보와 함께 결정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 조선철광석 수입은 팔번八幡제철소 개업(1900년) 이래 이루어져서 1908년~20년에는 일본의 철광석 전수이입량全輸移入量의 30%이상을 차지하며, 특히 노일전쟁 후의 제철확충기인 1909, 1910년 두 해에는 52.7%, 55.7%에 이르고 있다. - 19, 20

이 양적 의의에 못지 않은 중요성이 있는 바 그것은 국가자본투하=차관공여 정책에 따른 대치철광석 확보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일본이 직접 장악하여 철광석의 안정적 확보가 실현되었다는 점...양자의 차이는 이론에 의한 식민지적 지배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 조선에서는 철광석 생산의 근간인 재령․은율 두 광산을 1907년 8월 조선궁내부 소속에서 조선농상공부의 소관으로 하여 다음 해에 개광하게 하고 병합과 동시에 팔번제철소 소관으로 옮겼다.  - 20

이 철광석의 수입에 대응하는 것 같은 기계류수출은 (각각 41만 5천圓, 48만 4천圓) ‘철광석수입-기계류수출’이라는 원료수입-제품수출의 연관을 상정시킨다. - 20

둘째, 1896년에는 일본이 면화를 수출했으나 1908년에는 역으로 일본이 면화를 수입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의 면화공급지로 편성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1904년 노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개시된 ‘육지재배사업’의 진전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사업은 조선소농민에 대한 재배강제․판매강제를 통하여 일본 면방자본을 위한 저렴하고, 확실한 원면공급을 목적으로 했다. - 21

이 쌀수입은 비록 일본에는 중대한 의의를 갖지 않았다 할지라도 조선에서는 쌀의 대일수출도 하나의 원인이 된 미가米價 등귀가 일어나고 그것이 하층 군민(軍民) 궁박->반봉건․반일폭동(임오군란)의 하나의 경제적 기반을 이룬다는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 21

쌀의 수입선은 불령(佛領)인도(사이공미, 남경미), 조선, 영령(英領)인도(랑구운미)가 주된 것이고, 다음 태국(방콕미), 중국(홍콩미)이다...수입미는 ‘점질, 광택, 맛 등이 내지미(內地米)(일본미)보다 못하지만 값이 싸서 하등사회 즉 농민, 어부, 하등의 노동자 기타 절약을 숭상하는 세민細民에 의해 많이’ 수요되고 있다. - 23

농민은 주식용 내지 혼식곡으로 넣는 보리의 대용으로서 자기가 생산하는 ‘값비싼 내지미를 팔고 저렴한 외국미를 소비’하고 있었다. - 24

청일전쟁 무렵에는 조선미는 주로 大阪을 중심으로 하는 阪神지방에서 ‘하층민’ ‘세민’ 즉 하층 노동자나 도시잡업층의 주식용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 25

조선에서는 지주에 의한 상품화가 주된 것이고, 직접생산자에 의한 상품화는 조세금납화나 빚 등 부득이한 상황에 기인한 궁박판매였기 때문에에, 청전매의 진행은 일본상인이 조선의 직접 생산자인 농민에 흡착하여 농민을 몰락시켰다는 것을 암시 - 26

풍흉에 좌우된 조선미 수입의 불안정성은, 한편으로는 개항장 증대에 의해(진남포, 목포, 군산, 마산 등)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직접생산자에 대한 고리대적 지배 그리고 그것을 통한 담보물=토지의 탈취, 다시 말하면 일본의 상인․고리대를 필두로 하는 일본의 기생지주화에 의해 해소시키려 하였다...조선병합 이전에 이미 일본인 기생지주제가 어느정도 성립하였으며, 명치明治 말기에는 전조선경지의 3.79%를 일본인 지주가 소유하게 되었다. - 27

농민에 의한 토포 자급자족경제를 해체...농민은 대두․맥작 등으로 田作을 전환하고, 이 대두․잡곡을 팔아서 면포․면사를 구입했다. 조선에서 쌀 다음가는 수출품인 대두의 증산, 수출증대는 일본면제품 진출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 29, 30

저급면포를 대량으로 공급하는 일본자본 침투 - 30

일조무역구성을 특징짓는 ‘미면교환체제’는 언제 형성되었는가? 쌀의 수입은 1890년을 획기로 하여 청일전쟁 후에 어느정도 안정화해가고 일본인 기생지주화에 의한 ‘생산’장악에 의해 최종적인 안정화를 도모했다. 이것은 노일전쟁을 획기로 한 반식민지지배의 비약적강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면(제품)의 수출은 마찬가지로 청일전쟁 후 급증하고 노일전쟁후 삼영면포수출조합(삼정물산․제일은행 관여)에 의한 영․미제 금건 구축(우선은 쉬팅 구축), 그리고 조선에서의 ‘방적기와 수직기의 분쇄’=토포생산 괴멸화를 통해서 일거에 확대했으며, 동시에 조선의 원료면화공급지화가 강권적으로 진행했다...‘미면교환체제’는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노일전쟁 후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본산업혁명기에 일조무역에서 ‘미면교환체제’가 형성 - 31

미면교환체제라는 것은 阪神공업지대-조선 농촌지대의 연결에 의해 형성된 구조적 연관이며, 그 내부에서 판신공업지대의 노동자․하층민의 저임금 기반의 유지와 조선 직접 생산자 농민의 궁박판매․영세화․소작인화(특히 일본인 기생지주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 31

일본의 수출미는 서구 ‘하등인민의 식량보완’(예를들면 이탈리아)으로서도 수요되고 있기 때문에 (풀을 만드는 데 쓰기도 함) 일본 수출미는 서구 ‘하등인민의 식량보완’-조선 궁박미의 일본국내 ‘세민 購食’-‘(그리고 나중의) 조선소농민의 만주산 잡곡식량화’라는 단계적 연관을 발견할 수 있다. - 31

일본인 기생지주화는 유통과정으로부터 ‘생산’과정으로의 일본 지배의 진전을 의미...이상의 제관계는 노일전쟁 후에 구조적으로 정착화가 진행되어 조선병합에 의해 일단 완성된다. 그후 동척東拓창설과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일본인 기생 지주화의 진전에 따른 쌀 수입의 격증과 식민지 산미증산계획은 ‘미면 교환체제’를 한층 강고화․전면화(일본 전토全土와의 관련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 32


3. 식민지금흡수와 금본위제

종래 조선산출 금이 많이 수입되는 것에 주목하여 그것이 일본자본주의의 원축에서 수행한 역할이 강조되고, 구체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침략 목적과 결부시켜 그 의의를 말해왔다. 확실히 세계화폐인 금은의 획득․축적은 이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발 자본주의인 일본자본주의의 원축기부터 확립기까지 일관해서 중요한 과제였다. - 32

일본자본주의가 금은 특히 금의 흡수를 중요한 과제로 한 것은 금본위제 이행후이며...당초 1897년 일본 금본위제 채용의 목적은 금본위제로 이행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배경하에서, 구미자본수입을 가능하게 하고, 격심한 은가격변동에서 타피하여 환율안정화를 달성함으로써 무역 확대를 돕고, 그리고 은가격 하락에 의해 발생한 국내 물가 및 대 금화사용국 물가의 등귀를 진정시키는데 있었다. - 37

노일전쟁에 따른 군수품구입 등의 수입격증 및 외화지불, 운임증가 등에 따른 급격한 정화유출...에 직접적으로 대처하고 나아가 전쟁수행에 불가결한 외자도입을 하는데 있어서 대외신용을 좌우하는 정화 충실을 위해, 그리고 장기본으로는 이 외채누족에 따른 장래의 방대한 원리금 지불에 대처하기 위해 노일전쟁 중 및 전후에 금흡수가 일본 자본주의의 새로운 과제로서 중대성을 가졌다. - 39

신용화폐인 태환권의 발행․유통은 신용을 통하여 자본을 창출하는 것이어서 이것들이 조선에서 유통된다는 것은 일본의 국제수지에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금은화폐와 다른 태환권 유통의 확대는 조선이 일본통화권에 완전히 포섭된 것을 의미 - 42

제일은행 조선지점의 은행권 발행은 제도적으로 그리고 유통량에 있어서 큰 제약을 받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체제 구축의 단서적․화폐적 표현이고, 대내적으로는 일본 금본위제유지의 하나의 기반이었다.
이상과 같은 화폐세력권에 기반을 둔 ‘특별흡수’는 조선에 있는 모든 금의 흡수=절대적 흡수였다. - 43

식민지 금흡수정책으로는 ①국가자금에 의한 금융원조 ②금은 분석소 설치에 대한 원조 ③저렴한 운임 정책 등 - 44

일본의 조선금흡수는 단지 농업여가노동=사금채취 생산만이 아니라 상당히 자본주의적 발전을 하고 있던 생산기반에 뒷받침되고 있으며 나아가 일본의 금본위제 유지라는 절대적 요청에서 나온 수요증대는 이러한 생산부문에 큰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 47


4. 제일은행 조선지점과 식민지 금융

제일은행 조선지점을 특히 식민지금융기관의 대표적인 경우로 분석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첫째 일본자본주의 원축기부터 확립기까지 일관하여 일본의 금융지배가 강고했던 조선에서 이 은행이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둘째 이 은행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군사적․정치적 강압과 밀접히 관련하여 각종 중요한 특권을 획득하면서 사실상, 그리고 끝내는 명실 공히 조선중앙은행으로 변모해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 49

제일은행의 ‘조선중앙은행화’와 관련된 제 특권이라는 질적 측면에서는, 그 특권중에서 ①해관세의 취급(1884년 이후) ②조선정부에 대한 차관공여(1895년 이후) ③제일은행권(일람불어음;일람불어음이란 어음소지자가 청구하면 곧 지불하여야 하는 어음을 말한다-옮긴이)의 발행(1902년 이후) ④3대특권의 획득(조선국고금취급․화폐정리사업․제일은행권공인:1905년)이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었고, 특히 ④에 의해 명실공히 중앙은행으로 되었다. - 51

1909년 한국은행에로의 그 계승 - 51

이처럼 해관세예금이 많은 원인으로는 제일은행 및 일본정부가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제공의 담보로서 우선적으로 해관세를 설정하고(그외에 조세도 담보) 차관의 변제 기간이 길었다는 점과,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해관세의 사용에 대하여 조선정부가 반드시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겠다. - 57

그러면 이러한 조선재정자금의 제일은행에의 예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명치 30년대초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적 지위가 후퇴하고 러시아 세력이 우세한 상황에서 한러은행이 설립되어 제일은행의 기득권이 빼앗기게 되었을 때, 부산․원산․인천의 일본상업회의소가 위기의식을 가지고 일본정부에 제출한 진정서 속에 단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그 진정서에는 ‘관세 및 기타 관금이 탁지부에서 제일은행 등에 예입된 것은 거의 100만圓에 달하고, 이 금액의 많은 부분은 일한무역의 운전자금으로 이용되어 널리 각지에서 융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고, 그리고 ‘러시아인이 재정의 전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이 예입을 모두 폐지’하고 또한 ‘한러은행이라 칭하는 것을 설치하여 이 나라의 금융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표명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조선재정자금의 향배가 단지 제일은행의 관심사에 머무르지 않고 재조서 일본상인 전체의 중대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 인식의 근거는 조선재정자금의 ‘많은 부분은 일한 무역의 운전자금으로 이용되고’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 57

제일은행권 발행의 의의도 자본축적이 약체이었던 일본자본주의가 신용창조에 의해 자금창출을 꾀한 것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조선 정부의 모대신이 ‘일본은 가난한 나라이고, 그 때문에 “종이”로써 한국의 물산을 탈거奪去하려 한다’라고 한 말은 본질을 꿰뚫고 있는 말이다. - 58

첫째는 해관세 취급의 의의...해관세 취급 그 자체가 예금에 대한 이자부담이 전혀 없고 오히려 수수료를 받는 유리한 사업이었다는 점(처음에는 1000분의 2푼 5리, 87년 신조약 이후는 5푼), 둘째로 제일은행은 해관세라는 가장 확실하고 안정적인 예금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59

제일은행=일본인은행이라는 점에 따르는 역사적 의의...첫째로 제일은행이 해관은행이라는 점이 하나의 커다란 요인이 되어 관세수납화폐로써 일본화폐(일본圓은화, 나중에는 日銀태환권)의 유통이 가능하게 되고, 이것에 의해 일본상인의 무역․상업활동이 엄호되었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는 이 해관을 돌파구로 하여 조선국내에 대한 일본화폐의 유통기반이 만들어지고, 일본화화폐의 세력권을 조선에 조기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교두보로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59

이러한 제 권익도 영국의 지원․협력에 의해서 비로소 안정적으로 얻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거기에는 일본에 의한 해관세 취급독점과 영국에 의한 총세무사(=전해관의 총괄자) 장악이라는 교묘한 연계작용이 보여진다. 물론 영국으로는 조선의 의의라는 것이 주로 러시아에 대한 전략이라는 정치적인 것 - 59, 60

‘제실에서 여하히 해관수입금을 사용하고 싶어도 총세무사가 한번 머리를 흔들면 화폐를 지출할 수 업사’는 상황 - 60

침투수단=근대제국주의에 특징적인 차관공여=자본수출 - 61

(제일은행 조선지점의)대출용도별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1909년 단계에서 상업이 압도적이고(89%), 농업은 0, 공업도 겨우 3%에 불과...이것은 일본자본주의에 의한 조선경제 장악의 순서가 우선 상업을 기반으로 하고 다음에 토지소유(나아가서 이것에 의해 임노동창출과 ‘공업화’의 기반확보로‘로 발전하는 그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 - 64

국적별대출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일본인’의 경우는 대출금이 예금을 훨씬 초과했으나, 반면로 민간인 항목의 ‘조선인’ ‘외국인’(조선인․일본인 이외의 자를 말함)은 예금이 훨씬 많았다...조선공금만이 아니라, 조선민간인예금, ‘외국인’예금이 자금원으로서 일본상인의 무역․상업금융을 크게 뒷받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4

대출담보별 분석...하물환어음담보로서 미곡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하물환어음대부가 수출지에서 행해지고 또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최대의 수출품이 미곡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담보의 비중이 다른 상품에 비해 당시의 무역구성에 있어서의 비중보다 더 크다는 것은 금융이 대일 미곡수출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대조치를 했다는 것...일본산업혁명기에 있어서 일조무역의 ‘미면교환체제’를 금융면에서 제일은행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65, 66


5. 조선 철도건설과 자본수출

조선철도 건설의 목적․의의를 군사성의 일면에서 뿐만 아니라, 군사성과 경제성의 양면에서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점 - 68

일조무역의 기축인 ‘미면교환체제’는 조선내부의 기점으로서의 조선농민 산출미의 판매=상품화와 이에 따른 일본상품의 구입에 의해 창출․재생산 되는데, 이 상품시장은 철도를 중심으로 한 운송교통기관(도로정비도 중요)의 발전에 따라 비약적으로 형성 - 69


철도노선의 구체적 선정에 있어서 ‘고래古來로 조선의 보고라고 말해지고 토지비옥, 인구졸밀’한 충청․전라남북도를 어떻게 집어넣느냐는 점이 매우 중시되었다는 사실...철도개통에 의해 경인철도의 경우, 운임저하...운송시간 단축...화물침수의 위험성제거 및 결빙에 다른 장기하역정지의 해소 등의 시장확대효과가 있었다는 사실...내륙부를 통과하고 장거리인 경부철도...가 수행한 운임저하=상품저렴화,  시간단축=상품자본회전률의 가속화 및 상품경제의 일층의 진전이라는 효과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 69

철도 개통에 의해 ‘미면’ 및 군수품을 필두로 금(은)․철광석․석탄․목재․대두 등과 같은 조선산출의 식량․원료 등과 일본상품의 수송이 용이하게 되고, 상품화와 생산촉진이 자극되어, ‘미면교환체제’, 식민지 흡수, 조선철광석 확보 등이 보완되었다. - 69, 70

조선철도의 역사적 의의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국방공위경제 공통의 견지’는 일본이 요구한 광대한 철도용지의 용도가 군대수송고가 상관商館․창고 등의 설치라는 군사적․경제적 거점으로 설정되었다는 사실에도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71, 72

국방=군사성의 의미 속에는 단지 러시아에 대한 군사전략으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 민중에 대한 정치적 억압, 해방운동에 대한 무력적 제압으로서의 의미도 포함하여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 72

조선철도는 철도국유화, 滿鐵창설과 결부되어, 일본-조선-중국동북부(만주)를 연결하는 기본골격의 한 부분으로서 군사적․경제적으로 중요하였다...‘만주’시장에 대해 일본상품이  한층 더 침투하게 된 것 - 72

명치 30년대의 자본수출...노일전쟁 승리의 전망이 생기자 자본수출은 불안이 제거되어 급속히 확대해 가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본수출요인은 전쟁 이전에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고, 전쟁승리에 의해 일거에 현재화 하였다는 점 - 81

조선에 대한 반식민지적․식민지적 지배를 중요한 하나의 요건으로 하고 유기적 일환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일본의 산업혁명은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동시에 제국주의로 전화되는 과정이기도 -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