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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펀톈, <진시황 평전>

순돌이 아빠^.^ 2014. 4. 2. 22:20


장펀톈, <진시황 평전>, 글항아리, 2013


제1장
진시황의 세가 - 패왕의 후손

진(秦)의 성(姓. 모계씨족을 말함)은 영(籯)이고 씨(氏. 부계 씨족을 말함)은 진(秦)이다. 영성籯姓 진씨秦氏 - 70

세계의 모든 민족과 마찬가지로 영성족 역시 영웅 시조의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전욱에게는 여수라고 불리는 여자 후손이 있었다.
“여수가 옷을 짜고 있는데 현조가 알을 떨어뜨렸고 여수가 그것을 삼켰다. 그 후 여수는 다을 대업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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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족의 조상은 제비가 토템인 종족이 된 것...필자는 여수가 제비의 알을 삼킨 후 아들을 낳았다는 전설은 제비 토템과 ‘성인은 아버지가 없다’는 관념이 결합된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와 같은 전설은 사회적으로 조상을 신성화하고 부족을 유지하며 개개인을 널리 알리는 데 유용하다고 본다. 영진족의 시조가 하늘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는 ‘감생제설感生帝說’(감생설로 약칭되기도 함)은 중국에서 매주 보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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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와 진한시대 이래 가장 유행했던 감응설화를 보면 성인과 제왕을 용족龍族으로 말한 것이 특이하다. 하나라 사람 대부분은 공자와 한 고조 유방 역시 하늘의 기운에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믿었다. - 72, 74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교체되는 과도기 때, '천하공주‘의 명분과 권위를 둘러싸고 상나라와 주나라의 왕을 모시는 전쟁이 각 종족 간에 치열하게 벌어졌다. 주나라 무왕과 상나라 주왕의 결전이 목야에서 벌어졌다. 이 목야대전에서 패한 주왕은 스스로 분신하여 죽음을 택했다. - 81

실제 정치적 관계에서 볼 때 부용은 큰 제후국의 간섭을 자주 받았지만 독립성을 지닌 정치적 실체이기도 했다. 부용은 정권의 힘이 있었고 성읍, 영지, 종족, 신하와 백성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내부적인 정치 관계와 정권 기구는 실제로 완전한 ‘국가’를 이루었다. 서주 왕조는 진영(비자)의 영지를 부용으로 삼았으며 그에 상응하는 명분과 권력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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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이러한 토대를 기반으로 그 후손들은 진秦이라 불리는 공국(公國), 왕국(王國), 그리고 제국(帝國)을 세웠다. - 87, 88

기원전 770년, 주나라 왕실이 동쪽에 있는 낙읍(허난성 뤄양)으로 천도하여 역사에서는 이후의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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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가장 먼저 나타난 큰 변화는 제후의 실력이 천자를 압도한 것이다. 처음에는 각 제후들이 공공연하게 왕명(王命)을 거역했고 점차 ‘방백(方伯. 제후)이 정치를 하였다.’ 그러면서 ‘성주成周로 천도하면서 천자는 매우 약해졌고’ 제후들이 점차 강대해지기 시작했으며 제齊, 진(晉), 진(秦) 등의 제후국이 잇달아 패주를 칭했다. 또한 이 제후국들은 “천자의 명령을 듣지 않고 서로 겸병했으며 왕실을 위협하여 제후를 호령했고 토벌하여 회맹의 패자가 되었다.” - 94, 95

진 목공 때의 정세는 춘추시대 초기에 시작된 토지 겸병 전쟁에서 강대국 간의 패권 전쟁으로 넘어가 매우 불안정했다. 패권 전쟁은 대부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명분을 걸었지만 속내는 제후들이 맹주 자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천하공주’가 되기 위함이었다. 패권을 위한 전쟁은 겸병 전쟁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국부적인 겸병 전쟁으로 강성해진 제후국은 기존의 지역 패권을 유지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를 호령하는 패권의 자리르 차지했다. 그 결과 다른 강대국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전쟁이 불가피해져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매우 빈번해졌다. 더 많은 영토를 겸병한 제후가 패주가 될 수 있었으며 패주가 되어야만 더 많은 땅을 겸병할 수 있었다. 패권 전쟁은 규모가 훨씬 큰 토지 겸병 전쟁 - 109, 110

춘추시대 초기에 제 환공은 “35개 나라를 합병했다” 진(晉) 헌공은 “17개 나라를 합병하고 38개 나라를 수하에 두었다.” 진 목공은 “12개 나라를 합병하고 1000리의 영토를 개척하였다” 초나라의 토지 겸병 규모는 훨씬 컸다. 장왕은 “26개 나라를 합병하고 토지 3000리를 개척했다” 제후 맹주국들은 모두 주변의 나라를 끊임없이 겸병하여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고 천하에 위세를 떨친 강대국으로 급성장했다. - 111

진 목공은 국력을 강화하여 중원을 제패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 및 외교 수단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특히 진(晉) 에 대해서는 통혼을 했고, 두 번이나 군주의 즉위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가뭄이 들면 식량을 원조하는 등 상호 협력하여 초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화평 정책을 펼쳤다. - 118

전국시대를 두고 “전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천하가 전쟁으로 혼란한 세상이 되었으며” 정치와 경제, 군사적으로 강한 전국戰國을 제각각 웅雄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문치를 폐하고 무력을 중시하며 용사를 후대했다. 그리고 투구와 갑옷을 깁고 무기를 날카롭게 하여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힘썼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규모가 갈수록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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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했다. “땅을 빼앗으려던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들판에 가득하고 성을 빼앗으려던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성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전쟁에 적응하기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외교적으로 변혁과 개혁, 혁신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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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역사는 바로 전쟁爭과 변혁變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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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및 경제적 개혁이 전면적이고 체계적이며 철저하게 실시되면 전쟁에서 훨씬 우세할 수 있었다. - 131, 132

상앙은 이러한 경험적 교훈도 받아들일 만하며 ‘변법’의 수단과 목적을 ‘치국治國’ ‘부국富’ ‘강국强’ ‘왕도王’로 개괄했다. ‘치국’의 핵심은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며 ‘부국’의 핵심은 농경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강국’의 핵심은 전쟁으로 강대국을 만드는 것이며 ‘왕도’는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치국, 부국, 강국은 상호작용을 하며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법 제정과 법치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변법이 요구되었다. - 137

기원전 356년 효공은 상앙을 좌서장으로 임명하고 새로운 법을 정하도록 했다.
첫 번째 변법에서는 율령을 공포했다. 법치를 추진하고 경전耕戰을 장려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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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제縣制를 정비하고 정전제를 폐지하였으며 부세(賦稅)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도량형을 통일하고 낡은 풍속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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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세운 무공을 치하했지만 사사로이 싸움을 일삼자는 자에게는 벌을 주었다. 그리고 부역과 부세를 개혁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염철鹽鐵을 전매하여 국고를 늘렸다. - 137

중앙집권적인 정치제도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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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중앙집권의 강화를 핵심으로 정치체계를 전면적으로 혁신...기원전 350년에 현제를 시행해 그에 상응하는 관료 제도를 마련했다. “작은 향과 읍, 취락을 모아 현을 만들고 현령인 현승을 두었다. 이러한 현이 모두 31개 있었다.” 현령(縣令)은 현이 우두머리이고 현승縣丞은 민정을 주관했다. 현의 아래에는 향과 읍을 두었다. 또한 거주하는 백성을 대상으로 ‘다섯 집을 1보(保)로 묶고 10보를 연계하는’ 십오연좌제를 시행했다. 이 제도의 목적은 지방의 중요한 권력을 중앙 조정으로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지방에 일괄적인 제도를 시행하여 “100개의 현이 한 가지 제도로 다스려졌으며” 관리라고 해도 임의로 제도를 바꾸거나 허위 조작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개혁은 진나라의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 139, 140

경제 발전을 목표로 토지제도와 부역제도를 개혁...기원전 356년, 진나라는 황무지 개간과 경직(耕織)을 장려하는 법령을 시행하여 가족 중심의 소농경제를 키워갔다...호구 및 인구에 따라 군부(軍賦. 군사상의 세금이나 부역)를 부과했다...국가가 직접 부세를 징수했다. - 140

세경세록제도를 폐지하고 경전을 장려하기 위해 ‘역례’와 ‘변법’으로 새로운 정치 등급제도와 관련한 예의제도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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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에 따라 작위를 내리는 제도를 시행했다. [한서]에 따르면, “적의 수급을 하나 가져오면 작이 한 단계 올라가고 50석의 관리가 되었다.” 새로운 등급제도의 기본 취지는 기존의 등급제도와 마찬가지로 신분상의 존비와 작위, 봉록의 등급을 분명히 하여 군신의 상하 예속관계를 유지하는 것 - 141, 142

각종 정치, 경제, 법률, 사회적 특권 역시 작위에 따라 정해졌다. 신법에 따르면, 관리를 임명하는 데 종실이라고 해도 무공이 없으면 종실의 특권을 누릴 수 없으며 작위의 품계도 없었다...각각 등급에 따라 토지를 점유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특권과 예의 규범이 정해져 있어서 ‘각각 등급에 따라 토지를 점유하였고 노예와 의복도 그러하였다.’ - 142

상앙의 변법은 강제적인 수단으로 대가족 제도를 철폐하고 일부일처의 핵가족을 가족 단위이자 부역 단위로 규정했다. 법령에 따르면, 남자가 성년이 되면 반드시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했다. 즉 “한집에서 성년 남자가 두 명 이상이면서도 분가하지 않으면 부세를 두 배로 부과했다.”
이러한 개혁의 본뜻은 세대 수를 늘려 생산력을 높이고 부세 징수를 늘리기 위함이었다. 일부일처 중심의 소가족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산력 발전과 더불어 조세와 부역을 늘리는 데 크게 작용했다. - 143, 144

국가 법령으로 도량형을 통일하여 국가의 통일 과정을 진척시켰다...이 개혁은 부세제도의 통일, 재정정책 강화, 새로운 봉록제도 추진, 상업 유통의 활성화에 어느 정도 작용했다. - 144

만일 호적 등기에 은닉하거나 사실과 다른 자는 본인뿐만 아니라 향관鄕官과 동오同伍 모두 형사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했다...낙후된 풍습을 고치기 위해 재를 길에 버리는 것 등을 금지했다. - 145

상앙은 ‘통일화作一’를 가장 중시했다. 즉 제도, 법령, 사상, 이익을 취하는 방법 등을 통일했다. 그는 규범화된 정치 수단, 제도화된 정치 수단, 법률로 규정된 정치 수단을 중시하여 ‘왕 노릇을 하는 것王道’이란 한마디로 “몸소 규범을 세울 따름이었다”라고 했다. 임금이 ‘통일화’에 힘쓰면 ‘저절로 다스려’지고 백성이 자발적으로 법에 따라 일을 하게 되면 정치는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 146

기원전 312년, 진군은 단양 전투에서 초군을 크게 물리쳐 장수 굴개를 포로로 잡고 수급 8만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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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은 감무 등 신하를 보내 한나라를 정벌했다. 기원전 307년 의양을 함락하고 수급 6만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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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은 빈번하게 출병하여 동쪽 지역을 정벌하고 이웃 나라를 병합하거나 적국을 약화시켰다. 기원전 298년 무관에서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급 5만을 베었고 16개 성을 빼앗았다. 기원전 293년에는 이궐 전투에서 진 장수 백기가 한과 위의 연합군을 거의 전멸 시켜 수급 24만을 베고 한나라의 광활한 영토를 빼앗았다...기원전 279년 언에서 물을 끌어올려 성을 범람시켰고 이로써 초나라 군사와 백성 수십만 명이 수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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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 전투에서 백기가 조와 위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수급 15만을 베었다. 그리고 승세를 몰아 조의 군사 2만 남짓을 강물에 수장시켰으며...진군은 조군과 장평에서 싸워 백기는 조의 주력군 45만여 명을 묻어서 죽였다. 몇 차례의 대규모 전쟁에서 진나라는 한, 위, 조, 초의 군대 100~200만 명을 없애버렸다. - 150~157


2장
유년 시절 - 대를 잇는 어린 군왕

진시황의 이름은 정政이다...그는 한 정치 투자자의 노력과 은혜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유년 시절에 대를 이어 어린 군왕이 되었다. 친정을 시작한 뒤에는 적당한 때를 노려 강력한 정적을 제거했으며 그때부터 착실하게 최고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 169

성과 들판이 죽은 사람들로 넘쳐나는데도 전쟁은 지속되었다. 전쟁은 실력과 전략의 대결이 아니므로 정복전과 외교전이 쉼 없이 이어졌다. 제후국의 군주는 패주가 되기 위해, 제왕이 되기 위해, 나라를 보호하고 집안과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연합하고 분열하는 합종연횡을 경쟁적으로 펼쳤다. - 169


3장
친정

하․상․주 이래로 중국 고대 군주제에서 드러난 권력 구조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하나’ 도는 ‘독점’이었다. 국가는 한 사람이 독점하고 최고 권력은 한 사람이 장악하며 최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독보적이고 독단적이었다. - 210, 211

최고 권력이 교체될 즈음에 조정의 정세는 매우 미묘해질 뿐만 아니라 험악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고 권력이 교체되면 하나 이상의 기득권 집단이 와해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최고 권력자의 측근 이외에 최고 권력을 넘봤던 사람 또는 최고 권력을 도모했던 사람은 자기 자신조차 보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왕과 부자지간이나 형제관계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측근 역시 다양하게 연루되었을 것이다. 부귀를 위해서든 생존을 위해서든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에는 경쟁과 투쟁이 존재했다. 이러한 정치판에 참여한 사람은 권력과 권세를 지녔으며 중요한 정치적 자원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들이 주동하는 투쟁의 결말은 매우 참혹했다. 패배자는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고 심지어 멸족의 화를 입기도 했다. - 211

노애와 그 도당은 목숨을 거는 모험을 해야 했다. 옛말에 이긴 사람은 왕후가 되고 패한 사람은 반역자가 된다고 했다. 그들의 반란이 성공하면 왕이 되고 패한 사람은 반역자가 된다고 했다. 그들의 반란이 성공하면 왕이 되고 패배하면 목숨과 부귀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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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9년(기원전 238) 4월, 진시황이 옹성에 도착하여 기년궁에 머물렀다. 이때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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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력의 군대가 싸웠고 반란의 무리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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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붙잡힌 노애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진시황은 그의 삼족을 멸했다. 그리고 위위 갈, 내사사, 좌익 갈, 중대부령 제 등 20명이 모두 효수형에 처해졌다. 노애의 사인과 죄가 중한 동조자들도 모두 죽였고 비교적 죄가 가벼운 자에게는 종묘에 필요한 땔나무를 3년간 해오는 귀신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4000여 가구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했으며 촉 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 213, 214

여불위는 선왕을 섬긴 공로가 크고 상국의 자리에 있으며 실질적으로 10여 년 동안 최고 권력을 장악...여불위를 중심으로 막강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진시황이 친정한 후 여불위와의 권력관계를 조정하려면 그 일당의 기득권을 건드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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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애를 제거한 지 1년 더 지난 기원전 237년(진시황 10) 10월에야 진시황은 여불위를 노애이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죄명으로 상국의 관직에서 내쫓았다...전방위적으로 진시황의 압박을 받은 여불위는 진시황 12년(기원전 235) 독주를 마시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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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애와 여불위의 두 정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뒤 진시황은 자신의 뜻대로 주요 대사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 215, 216

제업 보좌한 패왕의 인재...진시황을 보좌한 수많은 신하 가운데 이사는 단연 으뜸이다...이사는 정세 판단이 정확하고 계략이 뛰어나 인물이었다. 학문을 마친 후 이사는 중대한 정치적 선택에 당면해 있었다. 어느 나라에 가서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가장 이로울까? 당시는 제후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유세가들이 공을 세우고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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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왕은 천하를 집어삼켜 제帝라고 일컬으며 다스리려 한다. 지금이야말로 지위나 관직이 없는 선비가 능력을 펼칠 때이며 유세가에게 기회가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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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의 계책에 따라 진나라는 군사, 외교, 간첩 등의 수단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제후를 응대했다. 또한 제후국의 명망 있는 권신 가운데 뇌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많은 선물로 결탁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주저 없이 암살했다. 또한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질해 기회만 있으면 대군을 이끌고 무찔렀다. - 223~225

진시황을 보좌한 두 번째 인재는 뛰어난 사상가이자 군사 전문가로 이름은 요라 불렸다...위료라 불린다...그는 전쟁과 정치, 전쟁과 경제의 관계 그리고 전쟁의 지위 원칙과, 전략과 전술 원칙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군법 조례를 정비했고 군사 행위를 총괄, 조직하여 ‘후방에서 작전을 세워 1000리 밖 전쟁터의 승리를 결정하는’ 군정에 정통한 인재였다. - 231~233

위료는 말했다. “전쟁의 승리는 조정에서 비롯되며 병승어조정兵勝於朝廷” 정치에서의 성공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근본적인 조건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하려면 먼저 내정을 안정시키고 국내 정치를 개혁하며 혁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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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통솔하려면 반드시 “앞에서는 제도를 명확하게 하고 뒤로는 형벌의 위엄을 무겁게 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군대를 다스리라면 반드시 먼저 각각의 제도를 만들어 군용을 가다듬고 명령을 일관성 있게 내리며 규율을 엄격하고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앞에서는 상을 정확히 내리고 뒤로는 벌을 결정하여” 엄격한 형벌과 후한 포상으로 군령이 관철되도록 해야 한다. 상벌은 엄격해야 한다. 즉 “벌로 어느 한 사람을 죽여 삼군이 두려움에 떤다면 그를 죽여야 하며 포상으로 어느 한 사람에게 상을 내려 만인이 기뻐한다면 그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 - 233, 234

요고...조나라에서 유세하며 공명을 얻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 밖으로 쫓겨났다. 요고는 진나라로 가서 진시황에게 인정받아 외교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 239

이사와 요고 등은 한비를 무척 시기했다. 그 이유는 첫째, 한비가 제기한 통일전쟁의 전략은 그들의 주장과 첨예하게 대립되었고 둘째, 한비는 요고를 무시하여 그는 사직을 논할 인사가 못 된다고 생각했으며 셋째, 만일 한비가 진시황에게 중용되면 그들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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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는 사람을 시켜 한비에게 독약을 보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 244

왕씨와 필적할 만한 충신에는 몽씨 장군들이 있다. 그들은 3대가 장군으로 활약하고 세운 공로가 매우 컸으며 항상 진시황에게 충성을 다하여 황제의 총애가 수십 년간 변함없었다. - 254

진시황은 패왕을 보좌할 책사와 재사를 끌어들이고 구슬려 등용하는 일에 매우 능했다. - 258


4장
통일 - 육합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하다

합종과 연횡은 전국칠웅이 서로 대결하는 중요한 외교적 수단이었다. 이른바 합종合從이란 “여러 약소국 힘을 합쳐서 강대한 어느 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뜻하고, 연횡連衡은 “강대한 어느 한 나라를 섬기면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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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의 최강 지위가 확립되면서 합종은 점차 각국이 진나라에 대항하는 주요한 방법이 되었다.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하나가 되어 서쪽 진나라를 치면 진나라는 반드시 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반드시 연횡에 주력하여 합종을 무산시켜야 했다. 합종책의 최대 약점은 각국 간의 이익이 모순되어 진심으로 협력하기 어렵고 오히려 분열하기 쉽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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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는 이 약점을 포착하여 연횡책으로 합종책을 깨뜨리거나 이익으로 유인 또는 위협하여 목적을 달성했다. - 278

정국은 유명한 수리토목 사업의 전문가였다. 그는 진나라 땅을 둘러본 후 땅을 파서 경수逕水를 끌어다 관개 수로를 만들면 관중 지역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가뭄을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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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이 수로를 완성하도록 하고 정국거鄭國渠라고 부르도록 명했다. 정국거는 먼저 지양 호구에서 시작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위수의 북부 고원을 가로질렀고 경수와 북낙수를 연결하여 300d 리를 유유히 흘렀다. 그리하여 알칼리 성분이 높은 관중 지역의 동부 농토 400여만 묘畝에 물을 댈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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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에서 1묘당 1종(鐘)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진나라는 부강해졌고 제후들을 겸병하게 되었다.” - 289

대규모 이주는 진시황이 나라를 통일하고 정치를 안정시킨 중요한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진시황이 이주를 명령한 인구가 수백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 이런 대규모 이주의 원인과 목적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변방의 국경 지역을 보강했다...이들 변방은 새로 점령한 곳이었기 때문에 국방을 강화하고 진 왕조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백성을 옮겼다...이주한 백성들은 변경지역에 살면서 대외적으로 군사를 동원할 때 병사가 되기도 하고 물자를 보급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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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강대한 호족을 직접적으로 통치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지 얼마 안 되어 각 제후국의 귀족 및 막강한 세력을 지닌 호족 12만 가구를 경기 지역으로 옮겨 살게 했다...진시황은 단번에 강력한 세력을 지닌 호족을 감시하고 지방의 적대적인 세력을 약화시키며 경기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 351, 352


5장
황제 - 선진시대 군권君權 관념의 집대성

하․상․주에서 송․원․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에는 하나의 정치제도만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군주제도(이 제도의 각종 변형도 포함됨)였다. - 358

‘황제’는 명칭이자 군주의 호칭이었다. 통치자가 명칭을 두는 근본적인 목적은 군주제도와 왕권에 대한 백성의 보편적인 신앙을 이용하여 그들을 다스리고 속박하기 위함이다. - 363

진한秦漢 대국은 6국의 예를 받아들여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예의제도를 확립했다. 채옹의 [독단]을 보면 “천자의 정식 호칭은 황제이다. 천자가 자신을 지칭할 때에는 ‘짐’라고 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칭할 때는 ‘폐하’라고 한다...천자의 인장을 ‘새璽’라고 하고 천자가 가는 것을 ‘행幸’이라 하며 천자가 들어가는 것을 ‘어御’라 했다”라고 적혀 있다. 황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복잡한 예의 규범을 정하고 황제의 의식주행에 대해 황권지상이라는 인장을 새겼다. 이는 호칭, 제도, 예의, 법률 등 각 측면에서 황제의 지고무상함과 신성불가침을 드러냈다. 제도와 관념의 상호 작용에서 ‘황제’는 더 이상 단순한 문화적 기호가 아니라 통치 사상과 정치제도를 가장 고도로 표현한 것 - 364, 365

명분을 중시하는 것은 중국 고대 정치문화에서 보이는 큰 특징이다....고대인들은 신분과 지위가 다르면 그에 따른 대우와 규범도 다르다는 당시의 도리를 인정했다. 호칭과 명칭은 위로는 귀천으로 구별하고 아래로는 다름으로 구별했다...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답다는 것은 군주정치의 기반이자 골간이며 핵심이기도 하다. - 367

고대 최고 통치자의 존호는 종법적인 속성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군주의 종법적인 호칭에는 후后, 종주(宗主), 군부(君父) 등이 있다. 이들 호칭은 군권의 종법적인 속성을 잘 드러내며 문화적으로 군주는 천하의 신하와 백성이 부모와 같은 천하일가의 가장이라는 의미를 내포 - 370

후는 과연 무슨 뜻일까? 진한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 이해했다. - 371

후(后)가 왕(王)이 된 것은 가(家)가 국(國)이 된 필연적인 결과이다. - 372

한자에서 국(國)과 가(家)를 나란히 써서 국가(國家)라는 단어를 구성한 것은 나라와 집안일을 하나로 합치는 역사적 현상의 문화적 잔존 - 374

서주(西周)의 종법제도가 고대 중국의 정치제도와 왕권 관념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다음 몇 가지 제도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종자(宗子) 지존(至尊)제도이다. 종자는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는 권력을 독점하며 종실의 우두머리이자 종실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였다. 친족의 규정을 위반한 자에 대해 종자는 벌을 내리거나 쫓아낼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넷째 종묘제도이다. 종묘는 조상의 신위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곳은 종족의 유대를 강화하며 종자가 조상과 천지신명의 힘을 빌려 종족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 374, 375

종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종법화는 다음과 같이 군주제도에 기본적인 정치 법칙을 확립해주었다. 첫째, 군주 유일 원칙이다. 한 집에 주인이 두 명일 수 없고 사(士)에게 왕이 두 명일 수 없다. 군주 유일 원칙은 종자 유일 원칙에서 시작되어 발전한 것이다. 둘째 군주는 절대적인 권위라는 원칙이다...셋째 군주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원칙이다. - 375, 376

군부(君父)...아버지로서 임금의 위상을 부여하고 임금으로서 아버지의 위상을 부여하는 것 - 377

군부 관념이 형성된 것을 기반으로 한 군신대의(君臣大義)와 삼강오상(三綱五常)은 고대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속박이었다. 모든 종법 문화를 숭배하는 자는 여러 경로로 군부 숭배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 377, 378

군주는 정치적인 존재이다. 지고무상한 정치적 지위와 권력, 세력에 기대어 대외적으로 정복 전쟁을 벌이고 대내적으로는 온 백성을 강압하는 전제주의를 실행하며 천하를 지배했다. 이것이 바로 왕권의 본질이다. - 380

‘왕’은 본래 부월(斧鉞)을 뜻하는데 부월은 고대 통치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기물이었다. 이는 권력을 상징하고 군주의 호칭으로 군주에게 생사여탈의 권한이 있음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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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과 금문에서 ‘왕’은 월鉞이 변형된 글자였다. 월은 매우 큰 도끼인데 병기이자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부월의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부월은 부권의 상지이다...부월은 집안의 가장을 상징했지만 부권에서 군권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통치자를 의미하는 쪽으로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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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부월은 군사적 통솔권을 상징한다...문헌에서 군사 통솔자는 모두 권력을 상징하는 부월을 가지고 있었다. “탕은 즉시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복하고 마침내 걸왕까지 정벌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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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부월은 형벌을 내리고 포상을 주는 대권을 상징했다...부월은 병기이자 형구(形具)였기 때문에 형법을 상징하게 되었다. 대월(大鉞)을 가지고는 사람의 몸을 산산조가 내거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었다. - 381~383

군(君)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군주의 호칭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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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군은 명령을 내리고 타인을 지배하는 지존한 존재였다. [설문해자]에 “군은 존귀하고 윤(尹)과 구(口)를 구성하며 구(口)로써 명령을 내린다”라는 구절이 있다. 윤(尹)은 다스리는 것이며 구(口)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므로 군은 통치자가 명령을 내리는 형상이다. 군의 원뜻은 명령을 내리는 권위와 거만하고 존귀한 자를 나타낸다. 군은 정치권력을 지닌 모든 사람을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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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군은 토지와 백성을 지배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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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제후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다. 토지와 백성, 다스림이 그것이다”라고 했다. - 385~387

부역징수권은 제왕이 토지와 백성을 지배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국가 재정의 주요한 출처였다. - 389

진시황은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으면서 왕의 제도에서 부여하는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백성의 우두머리로서 천하의 백성과 신하가 준수해야 할 행동 준칙, 도덕 규범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진시황은 신하와 백성에게 계급제도를 엄수하도록 영을 내리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부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모두 자신의 분수를 지키게 했다.” - 396

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군주만이 입법의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며 “군은 법의 근원이다”라고 했다. 왕은 법의 주인이고 법은 왕의 근본이다. - 396

어(御)는 즉 어(馭)이며 수레와 말을 모는 것을 뜻했다. [설문해자]에는 “어는 말을 부리는 것이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어는 말을 모는 것에서 혹사시키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다스리는 것으로 파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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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모는 자와 소, 돼지의 관계로 규정되었다. 모든 신하와 백성은 군주의 도구였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바로 온 천하를 채찍질하는 것이었다. - 398

제帝, 천天은 최초로 왕권을 신성화한 군주의 호칭...하늘은 곧 군주이고 군주는 곧 하늘이다. 하늘을 군주라고 하는 것은 군신관계를 규정할 때 가장 자주 보이는 현상 - 407

군사(軍師)의 호칭은 관념적으로 제왕이 군주와 스승 두 가지의 사회정치적 역할을 맡으며 그는 정치권력과 교화권력을 장악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부(父), 군(君), 사(師)는 동일한 권위에 속했다...제왕의 의지는 곧 법령이고 조문이며 학술의 정설이 되었다...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을 근절한 것은 군사합일의 기본적인 정치 지향점이었다.  - 417

서주, 춘추시대 이래로 군자와 대인에 점점 더 많은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여 도덕적이고 고상한 사람을 통칭하기도 했다. 이렇게 군자와 대인의 호칭으로 군주를 일컫는 것은 사실상 군주는 곧 미덕(美德)을 지닌 자와 같음을 표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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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기호로 군주를 부른 것은,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사람이 권력과 지위를 차지해야 하고 비천하고 우매한 백성은 군주의 교화를 받아들여야 하며 군신관계는 도덕 법칙에 따라 생겨났다는 관념을 널리 알리고 주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군주는 도덕의 화신이었다. - 420~423

진시황은 문헌 곳곳에서 최초로 자신이 성인(聖人)이며 최고 통치자라고 선포했다....성은 본래 현명하고 사리에 통달하고 재능이 뛰어남을 의미했다...이런 인격을 군주로 귀납시켜 신성화한 관념과 호칭이 생겨났다. 성인과 왕은 하나라는 것이 바로 성왕이다. - 424

선왕(先王)을 현명聖하다고 한 것에서 시작하여 현명聖해야 왕이 되었고 그리하여 다시 모든 군주를 신성화하는 변천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비판과 신성화 작업이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진 사상 인식의 경향은 주로 사상가들이 앞장서서 완성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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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화의 핵심은 절대적인 개인의 권위를 동경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성인을 인정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제 왕권을 신봉하는 것이었다. 성현사상으로 사람들에게 모든 사회가 성인에게 복종하는 것은 논리적 필연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 425, 426

정치적인 호칭체계는 사람들의 정치적인 인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철학적 사유와 정치적 관념의 차이 때문에 신하와 백성 중 일부는 이러한 호칭이 보여주는 군권 관념을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군주 호칭의 상징적인 의미를 인정하면 제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제왕은 가능한 한 모든 상징적 의미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 호칭을 받아들이면 틀림없이 유아독존의 심리 상태가 형성된다. 황제라는 단어는 중국 고대사회의 군주와 신하, 양면의 정치적 인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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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존호와 각종 군주의 호칭은 직관적으로 사람들에게 제왕 관념과 상응하는 신민 관념을 주입시켰고, 정치 행위 주체의 정치의식을 만들어냈다. 제왕 숭배는 집단적인 정치심리 공식으로서 군주전제 제도의 발전에 공고한 사회적 심리 기반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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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제국의 행위와 제왕의식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생존했던 시대가 이러한 사회심리 기반을 갖추었고 물질적인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 431


6장
사상

전제주의 중앙집권 체제의 원칙을 탐구해보면 이런 제도를 유지하는 법률을 정립하는 데는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을 요했다. 이는 사상가들이 사상을 통일하는 방안을 끊임없이 바치고 최고 통치자가 현실을 감안해 이를 끊임없이 선별한 결과였다. - 437, 438

백가쟁명의 주요한 주제는 정치였고 그들이 논쟁한 핵심은 군주였다. 어떠한 국가체제, 군신관계, 시정 방침이 부국강병과 군권을 강화하며 정령政令을 통일시키는 데 유리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로 정해지고’ ‘천하를 통치하며’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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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대표적으로 예치와 인정仁政을, 노자는 자연과 무위를, 묵자는 상동尙同(국가의 안정과 사회의 질서를 위해 사상을 통일해야 한다는 것)과 겸애兼愛(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를 주장했다. 또 상앙은 법치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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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제와 왕도는 선진시대 제자백가의 정치적 사유에 관한 핵심이었으며 그들 사이에 치열하게 논쟁되었던 토론 주제였다. 선진시대 제자백가의 사변을 보면 제왕 관념이 점차 이론화되고 정형화, 계통화되었다. “천하는 하나인데 생각은 각양각색이고 귀착점은 같은데 가는 길은 다 다르다”고 했다. - 438

전국시대와 진한시대는 제사를 올리는 명목이 매우 많았다. 대중은 천지신명과 귀신 등 각종 미신을 신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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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는 자신의 신앙에 따라 또는 ‘신묘한 도로써 교화를 베푼다’라는 필요 때문에 이러한 제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이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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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를 명령한 일이 무척 잦았다. 통치자가 인정한 각종 전통문화와 대중 신앙은 통치 사상의 중요한 출처이자 구성 부분이다. - 446

제자백가 대부분은 군주론을 옹호했다...군주가 없으면 혼란해진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또 군주제도는 불변의 당연한 도리이고 정치권력을 일원화하며 군주는 존엄하고 신하는 천하다...그들의 주장이 갈리는 부분은 군도君道의 목표였다. 유가는 예를 근본으로 보고 예치를 주장한 반면 법가는 법을 근본으로 보고 법치를 주장했다. 한편 도가는 자연을 근본으로 보고 무위 통치를 주장했다. - 453, 454

유가 학설이 진 왕조의 정치에 끼친 또 다른 중요한 영향은 바로 정치 윤리였다. 운몽진간의 [위리지도]를 보면 수많은 관리에게 체계적인 도덕 규범과 행위 원칙을 제시했다. 특히 “마음을 넉넉히 하고 충성하고 신의하며 화목하게 지내고 원망하지 말 것” “윗사람을 사랑하고 업신여기지 말며 존경하고 범하지 말 것” “올바르게 행동하고 수양할 것” “백성에게 솔선수범하여 모범을 보일 것” “해로운 것을 없애고 이익을 늘리며 백성을 사랑할 것” 등이 대표적이다. - 462

이러한 철학은 공자, 맹자 순자 등 선진시대 대유大儒들이 “임금은 예로써 대하고 신하는 충성한다” “아버지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한다” 등 충효를 근본으로 한 주장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 463

묵가는 정치적으로 전제주의에 속했다.
묵가가 주장한 상동의 요점은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반드시 군주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묵가는 예로부터 임금이 없으면 “천하의 혼란이 짐승과 같아진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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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천자인 정장은 존귀해야 하고 현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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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각 단계의 정장은 반드시 상급에 책임을 져야 하고 상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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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하급은 상급에 절대 복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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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상벌을 내려 정령을 확실하게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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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계급제도를 유지했다. 묵가는 “군신, 상하, 장유의 예절이 없어지고 부모와 형제의 예의가 없어지면 천하는 크게 혼란스러워진다”고 보았다. - 473, 474

법령의 일통은 천자가 유일한 입법권자인 것으로 나타난다...군주가 법을 세우고 신하는 법을 지키며 백성은 법을 따르고 법령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여러 학파가 공감대를 형성한 대목이다. 천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홀로 국가 대사를 결정하고 법령을 만들어 반포하며 천하에 군림했다. - 287

‘대일통’의 기본 특징은 군주, 집안, 나라를 일체로 간주하는 것으로, 군권을 세습하는 것이야말로 최고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라 하였다. - 488

진시황은 중앙 왕권의 법령과 군령을 훨씬 광활한 판도에 보급하고 통일시켰으며 또한 대규모 이주 정책을 실시하고 변경지역을 개척하여 문화를 사방에 전파시켰다. 대일통 체제는 급속도로 각 지방 사이의 다양한 이(異)를 없애고 정치 제도, 법령, 도덕, 문자, 화폐, 수레 폭 등을 모두 통일 시켰다. 통일된 제국, 제도, 문화가 통일된 나라와 민족을 만들었다. 광활한 영토에서 사람들을 동일한 문자로 쓰여진 책을 보고 동일한 폭의 수레를 타며 동일한 도량형을 쓰고 동일한 문화를 누리며 동일한 영토 안에서 살았다. 문화적, 민족적 응집력이 국가의 응집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 492, 493


7장
제도 -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성왕 (1)

군주는 재상을 임의로 임면하고 책임을 묻고 처벌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재상과 그 가족의 운명은 황제에게 달려 있었다.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은 요역의 부담을 줄여달라고 요청한 사실만으로 황제를 화나게 했다. 진2세는 그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풍거질과 중겁은 죽임을 당하고 이사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 502

재상의 지위와 능력은 직접적으로 군주의 지위와 권력, 명성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군주는 늘 재상을 의심하고 시기했다. - 503

최초의 재상은 문관과 무관을 겸직하여 권력이 매우 컸다. 전국시대 국정을 총괄한 대신은 재상과 장수로 구별되었다...진시황은 삼공(三公)을 설치하여 제도적으로 재상권을 한층 더 분화시켰다. - 504

진 왕조의 중앙정부 제도는 양부(兩府)의 병설, 서로 대등한 권한을 갖는 삼공, 5권 견제, 구경의 분업, 박사의 의정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 505

양부란 승상과 태위, 어사대를 일컫는다...5권이란 행정, 감찰, 군사, 사법, 재정 등 다서 가지 권력에 제각각 독립적인 기구와 관직을 가지며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했다. - 505

진 왕조는 군현제의 전형으로 구체적인 시행 방법을 살펴보면 천하를 수십 개의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을 두었다. 군현은 중앙에 직속되었고 황제가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 527

각 군에는 한 명의 수(守)를 두었다...군수는 군의 우두머리이며 군의 최고 행정장관이다. 그는 군에서 이뤄지는 민정, 재정, 사법, 군사, 시험, 감찰, 선거, 교육 등 모든 사항을 책임졌다...군수는 중앙정부가 임면하여 반드시 중앙정부에 책임을 지고 매년 조정에 전체 정무를 ‘보고上計’해야 했다. - 540, 542

진 왕조에서는 어사대부에 예속된 감찰어사를 설치하여 군을 감찰하는 일을 맡고 황제를 대신하여 군수를 포함한 군내 모든 관리를 감찰하였다. - 543

군 아래의 하급 행정구획과 기구에는 현(縣), 도(道), 철후식읍徹後食邑이 있었다. 현 아래에는 향鄕을 두고 그 아래에는 리里를 두었다. 향과 리는 국가 최소 단위의 정권 조직으로 국가의 부역과 지방의 교화, 형옥, 치안 등을 향리의 관리가 직접 책임졌다. - 544, 545


8장
제도 -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성왕 (2)

관료제도는 황제제도의 기초로 세경세록제도에 대립하여 등장했다. 관료제도의 기본 특징을 보면 군주 이외에 모든 국가의 공직은 세습할 수 없고 각급 관료는 모두 군주 또는 군주가 정한 기구가 임면한다. 그리고 각급 관료는 봉록을 받으나 모든 관료가 조세, 땅, 백성이 있는 봉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 552

서주시대에는 ‘혈육’의 친소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지만 진 왕조에서는 공적에 따라 관리를 선발...각종 인재를 ‘관직에 두고 그 공적을 보며’ 실적과 공적을 근거로 선발하고 단계별로 승진시켰다. - 553

법치를 관철시키려면 고관대작이 법술에 정통해야 하며 각급 관리들도 법을 배우고 법을 잘 꿰뚫어 법대로 집행할 줄 알아야 했다...진 왕조는 각급 정부에 많은 법리法吏를 갖추고 각급 정부의 주요 관리는 사법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이는 법령에 통달하는지의 여부가 입사 또는 승진 자격 중 하나가 되었다. - 555

진 왕조의 관리는 전공으로 작위를 획득했다. 즉 전공이 클수록 작위와 관직이 높았다. - 556

진율秦律에 따르면 노예와 천민도 전공에 따라 작위를 얻을 수 있었다. - 559

“벼슬아치는 두렵지 않으나 그가 휘두르는 공권력이 두렵다”고 했다. 당시 상하관계에선 강력한 인신 종속이 심했으며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마치 군주와 신하관계에 버금갔다. - 563

수레의 규격과 관면복식의 양식, 색깔, 장식을 통해 관리의 품계, 문무, 직권 등을 표시했다. 거기에는 존비를 드러내는 등급을 판별하며 명분을 보여주는 정치적 기능이 있었다.
조위朝位는 관료가 입궐해서 황제를 대할 때 위치해야 하는 배열 순서이다. - 566

관리는 임기의 보장을 받을 수 없고 종신제의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원하는 자리에 재직하려면 그에 걸맞아야 했다. 또한 승진하려면 실적이 있어야 하고 부귀영화를 원하면 혁혁한 공로를 세워 관직을 지켜내야 했다. 이런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관리는 더욱 분발 - 567

행정은 국가의 조직활동이며 행정법규는 각급 정부의 행정 행위를 규범하는 법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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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왕조의 행정법규 규범은 완성도가 높고 구조가 치밀하며 규정이 명확했다. 운동 진간의 [요율]을 예로 들면...현급 정부기구는 관아 등 공공기관을 재건하려면 반드시 상급에 보고해야 했고 수리를 위한 토목공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작업량을 정확하게 계산해야 했다. 만일 계산이 사실과 다르면 작업량을 계산한 자를 법으로 처분했다. 이는 현급 정부기구가 요역을 징발할 때 할 일, 할 수 있는 일, 반드시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규정 위반으로 생기는 뒷 일 등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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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왕조의 행정법규는 대부분 확정성 규범에 속하며 규칙의 내용, 적용 조건 및 제재의 척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규정되었으며 심지어 계량화하는 데까지 도달했다. - 568, 569

진 왕조의 행정법규에서 규정한 법률 제재로는 경제적 제재, 행정 강제, 행정 처벌, 형사 처벌이 있다. 진 왕조에서는 관리가 행정법규를 위반하면 가혹하게 처벌했다. - 569

공로가 있는 자는 상을 받고 잘못이 있는 자는 벌을 받는 등 상벌 모두 법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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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면 이를 범령(犯令)했다고 하고 하라고 규정했는데 하지 않은 것을 폐령廢令이라고 한다고 명확하게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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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율잡초]에는 관리에게 군주의 명령을 성실하게 집행하고 불경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겉으로는 황제의 정령을 받드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거스르고 집행하지 않는 자에 대해 ‘변방에 유배 보내 척후병으로 삼는 벌’로 처벌했다. 황제의 명령을 낭독할 때 태도가 불경한 자는 파면하고 영원히 기용하지 않았다. - 570

상계제도란 각급 지방정부가 정기적으로 상급정부에 관할 지역의 기본 상황을 보고하는 제도이다. 계計는 곧 장부(계부計簿)를 의미한다. 각급 정부는 정무상의 필요 때문에 반드시 기구와 관직을 두어 호구, 토지 작황, 재정, 치안 등의 내용을 부적簿籍(관아의 장부나 문서)에 기록하여 부세와 요역을 징수하고 지출을 계획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근거로 사용했다. 이것이 바로 계計이다. 각급 정부는 규정에 따라 관련 상황을 상급 정부에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상계上計이다. 상계는 하급이 상급에 정무를 보고하고 상급이 하급의 정무를 평가하는 기능이 있었다. 이 제도는 군현제가 수립되면서 함께 생겨났다. - 576, 577

정규 행정체계 이외에 진시황은 정치 상황을 감독통제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일만 담당하는 기구를 두었다...일부 학자는 중국의 고대 감찰제도를 국가 정권 내부의 “만리장성”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즉 국가와 군주는 감찰제도가 관리를 통제하고 기강을 단속하는 방어장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 580

법가는 군신관계는 권력관계이고 이해관계이며 매매관계라고 지적했다. 군주와 신하 사이에는 “하루에도 전쟁이 100번 일어난다”라고 했으며, 권세가 있는 신하는 호랑이와 같은 두려운 존재이고 시시각각 최고의 권좌를 노린다. - 594

황제의 군과 귀 역할을 하는 어사체계의 감찰 관리 권력은 기본적으로 고발하고 탄핵하는 것에 제한되었고 최종적인 처분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 600


9장
사회-등급 질서를 재편한 국가 원수

국가문명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면서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등급제도가 일관되게 기본적인 사회 구조를 이뤘다. 등급제도는 군주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적 바탕이며 가장 중요한 정치제도이기도 했다. 군현제도, 관료제도, 등급제도는 전제주의 중앙집권 정치를 이루는 3대 기본 제도였다. 이들은 서로 균형을 이루며 지고무상한 황제를 뒷받침해주었다. 황제는 사회적, 정치적 등급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국가 원수이다. 등급제도와 상응하는 등급 관념은 계속해서 황제의 권력과 권위의 주요한 출처였다.
...
계급관계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관계로서 물질 생산과 직접 연관된 생산관계 또는 경제관계를 통해 형성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계급관계는 ‘물질의 사회적 관계’에 속한다. 그것은 각종 사회관계에서 가장 기초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람의 의지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등급관계는 결국 계급관계의 복합적인 표현 방식인 것이다. 중국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계급관계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고 주로 등급관계에 따라 사회를 구상하고 유지했다.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각종 사회관계도 등급관계에 따라 인식했다. - 609

귀함과 천함이 분명해지고 남자와 여자는 예의에 따랐으며 성실히 직분을 받들게 되어 남자는 밭에서 즐거워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정돈하며 일에 각각 질서가 잡혔다. 이것은 진시황이 정리한 제도의 통치 방법이었다. -  610

상주시대에 혈족을 우대하고 윗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취지로 예禮로써 엄격하게 규정한 등급제도가 형성되었다. - 610

중국 고대사회에서 상하, 귀천, 존비를 구별하는 것은 등급제도의 기본 취지이자 핵심 내용이었다. - 612

진 왕조에서는 군현제와 관료제가 같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등급제도 역시 철저한 군주집권제로 바뀌어 천하에는 오직 군주, 즉 황제만 존재했다. 이렇게 군주, 신하, 백성은 규정이 명확한 3대 정치 등급을 구성하게 되었다. 최고 통치자인 황제는 군주, 각급 관료는 신하, 기타 정치 신분이 없는 사람은 백성으로 정의했다. - 613

신하의 절대다수는 토지 지주 - 614

법률적으로 민은 서민庶民으로 불렸는데 정치적 신분이 없는 일반 중생을 가리켰다. 고대 법전에 따르면 백성은 양민과 천민으로 구분되었으며, 양민은 평민 지주와 자영농을 지칭했고 곡부와 노비 등은 천민에 속했다. 민사사건에서 노예 등 천민은 짐승이나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 616, 617

맹자와 순자 역시 천자에게는 천하, 제후에게는 국가, 사대부에게는 전읍田邑, 관리에게는 녹봉과 벼슬이 있지만 백성에게는 군자를 봉양하고 고단한 노동의 의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 619

군주는 원수이고 신하는 고굉股肱(팔다리)였다...머리는 위에 있으면서 사지의 움직임을 지배하며 팔과 발은 아래에 있으면서 머리에 물건을 집어 주고 온 세상을 다닐 수 있게 한다. - 622 - 622

제왕은 수레를 모는 자이고 신하와 백성은 수레와 말이다...[공자가어] ‘집비’편에서 신하와 백성 그리고 통치술을 소와 말 그리고 재갈과 고삐로 비유한 것이 가장 전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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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은 사냥꾼이 사냥을 할 때 매를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신하를 중시하였고 수레꾼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갈 수 있는 소와 말을 키우는 것처럼 백성을 아꼈다. 이렇듯 신하와 백성은 단지 도구를 인격화했을 뿐이었다. - 623

선진시대 제자백가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군존신비라는 관계가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한 몸인 군주, 신하, 백성의 관계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심층적으로 탐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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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적 쟁점은 군주가 주인이고 신하는 보좌하며 순종하는 일반적인 원칙의 확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 원칙을 어떻게 관철시키느냐에 있었다. - 627

유가, 도가, 법가 모두 신하와 백성을 중시했다. 공자의 인仁, 노자의 자慈, 상앙의 애민愛民 등은 모두 군신관계, 군민관계를 유지하는 방략을 설계하면서 신하와 백성을 비천하고 도구적인 지위에 고착시키려고 했다. 이런 측면에서 가장 전형적인 것이 ‘우민통치愚民之術’와 ‘약민통치弱民之術’였다. 공자는 “백성은 도리를 따라 행하게 할 수는 있어도 도리의 원리를 일일이 알게 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는 고증할 수 있는 문헌 가운데 가장 먼저 유가에서 백성이 우매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노자의 ‘성인 통치’의 강령은 “백성의 마음을 비게 하고 그들의 배를 채워주며 그들의 의지력을 약화시키며 그들의 신체를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백성을 무지, 무욕의 상태에 두게 한다. 비록 지혜와 수완을 지닌 자가 있을지라도 감히 재주를 부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철저한 약민통치일 것이다. 상앙은 “백성이 나약하면 국가가 강성해진다. 국가가 강성한 것은 백성이 나약하여 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술을 장악한 국가는 백성이 법을 지키도록 나약하게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한다”라며, 최선책은 신하와 백성을 순박하고 우매한 상태에 두는 것이라고 했다. 유가, 도가, 법가의 우민통치와 약민통치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며 그 근본 목적은 신하와 백성을 쉽게 지배할 수 있는 비천하고 도구적인 지위에 두기 위함이다. - 627, 628

진 왕조는 공훈에 따라 10등급으로 구분하는 작위제도를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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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작 제도는 백성이 국가와 백성에 기여한 공로에 따라 작위를 확정하고 그에 따라 토지, 전답, 식읍 및 각종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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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작위가 있어야 관리가 될 자격이 있었다...한 사람의 작위가 바뀌면 등급체계에서의 지위(정치, 사회, 군사, 경제, 법률적인 것을 모두 포함)도 따라서 오르내렸다. - 631

초기에는 주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공을 세우도록 독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634

법가는 정치적 공적을 세웠고 책사는 언간과 책략을 바쳐 공을 세웠으며 종횡가는 외교활동으로, 왕조와 왕실 종친은 타국에 질자質子(인질)로 감으로써, 고발자는 범죄를 적발해서, 간첩과 자객은 군주를 위해 특수한 임무를 성공시켜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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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의 내용은 국가와 군주가 명령과 현실 정치에 따라 확정 - 634, 635

전공을 예로 들면 보통 병사에게는 적군의 수급 하나를 베면 포상으로 작위 한 등급을 올려주고, 하급 군관에게는 적군의 수급 33개 이상을 벤 자에게 작위 한 등급을 특진시키며, 고위 장수의 경우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에게 작위 3등급을 특진시킨다라고 법령으로 규정했다. - 637, 638

이것은 필연적으로 ‘평민이 장수와 재상이 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공로에서 관직으로 연결되는 이 원칙이 관철되어 각급 관리의 능력과 자질이 크게 향상되었다. - 639

한 등급을 포상할 때마다 “1경의 농지를 더 주고 9묘의 택지를 더 주며 작위1등급마다 서인(庶人) 한 명을 배속시켰다.” 여기에서 서자는 상으로 주어지는 농민을 가리킨다. 그들은 매월 주인을 위해 6일 동안 일하고 부름을 받으면 언제든지 가서 일해야 했다. - 639

작위가 불경不更 이상이면 요역인 경졸更卒에서 면제되었다. 작위가 공승 이상이면 공가(公家)의 수레를 탈 수 있었다. 작위가 높은 자는 그것이 없거나 낮은 자를 지배할 수 있었다. - 640

작위는 명예일 뿐 아니라 정치적 권리, 신분적 특권, 경제적 이익과 직접 연관되었기 때문에 공적을 세우면 명예는 당연히 따라오는 법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칙이 관철되면서 여러 신하와 백성은 국가와 군주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오직 공을 세워야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 640, 641

고대에 각 가정의 내부에는 명확한 계층관계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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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친족관계로 구성되었으며 재산을 공유하는 친족 집단이다. 가정은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이자 경제 단위이고 정치 단위였다. 호(戶) 단위로 존재하는 가정은 기본적인 생산 단위였고 재산상의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는 주체였다. 가장과 기타 구성원, 부모와 자식,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부부, 주인과 노비 간에는 존비와 계층의 구분이 분명 했다. 마찬가지로 종족(宗族) 내부에도 존비의 구분이 존재했다. 가장인 아버지는 기타 구성원에 대한 통치권을 가졌으며 심지어 생사여탈의 지배권을 지니기도 했다. 족(族)과 호(戶)에는 또한 법에 따라 연대 형사책임이 부여되기도 했다. 가정 내부의 이런 기본적인 계층 구조는 기타 중요한 사회계층 구조의 근원이었고, 가정의 통치 방식은 국가 통치 방식의 축소판이었으며 가정의 윤리 이념은 사회 도덕의 기초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 가정제도는 중요한 정치 현상이었으며 실질적으로도 정치체계에서 중요한 구성 단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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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법 가정 내부의 계층제도와 통치 질서는 원시사회 말기의 가부장제 가정에서 시작되었다. 가부장과 구성원 사이에 노예제, 농노제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노역관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가족제도는 전제주의의 시원(始原) 중 하나이다. - 647, 648

진나라는 엄격한 종실 계승제를 시행했다...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들이 계승하는 원칙에 따라 왕위가 승계된 사례가 서른 번...이었다. 영진 선대부터 무공까지 대부분의 태자는 부친이 사망하면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관철시켰다. - 653

사회를 구성하는 세포이자 국가를 이루는 기초로서 종법적인 가정은 여전히 정치, 경제의  단위였으며 종법의 기본 원칙은 여전히 가정 내부의 등급관계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가정, 가족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진 왕조의 정치 및 법률의 주요 내용이자 임무 중 하나였다.
진 왕조에서 친소와 귀천을 구별하고 밝히는 것은 여전히 종법의 기본 취지이자 가족 조직의 기본 법칙이었으며 또 그런 일을 가능케 하는 일부 구체적인 방법에는 시대적인 특징이 담겨 있었다. 사회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부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간의 존비관계가 널리 인정되었다. 사상적으로 윤리 강상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후세의 ‘삼강오륜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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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충효’편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 충신의 도리”를 강조하여 “자리를 안정시키고 가르침을 하나로 하기 위한 도”라고 했는데, 그 근거는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자식은 부친을 섬기며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법이다. 이 세 가지가 순조로우면 천하는 다스려지고 반대의 경우에는 천하가 문란해진다. 이것은 천하의 마땅한 도리이며 군주나 신하가 아무리 현명해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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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왕조에서 가부장의 권력은 가장 먼저 가족 재산에 대한 지배권으로 나타난다. 가족의 재산은 가부장이 소유하고 가장의 명의로 관리되고 사용된다. 법률적으로 세대(가정) 역시 국가 및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채무, 매매, 부동산 처리 등 경제 행위는 가장만이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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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의 권리는 주로 인신지배권으로 나타났다. 진 왕조의 법률은 가장이 임의로 친자식을 죽이거나 심하게 체벌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시대적인 변화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법률은 동시에 가장이 이런 가혹 행위를 해서 누군가가 고발을 해도 공식적으로 소송을 수리하지 않는 ‘가죄’로 규정했다. 고발한다고 해도 법정에서 받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소를 고집하면 ‘고소한 자가 유죄’가 되었다. 또한 진 왕조의 법률에는 ‘불효’죄가 있었다. 일부 사례를 보면, 자녀가 효도하지 않는 것은 중죄에 속했고 죄의 경중에 따라 ‘옥족’(발에 형구를 매다는 벌), 유배, 심지어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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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는 가족 구성권 내부에서 최하층에 속했으며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특히 노예는 인신의 자유가 없었다. 그는 주인이 점유하는 물건으로서 법률적으로 재산의 범주에 속했다. [봉수] ‘원서’ 편을 보면 ‘노복 누구, 시비 누구’와 같이 주인의 재산 목록에 올라 있다. 노예는 반드시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하며 주인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고신] ‘원서’ 편을 보면 노예 누군가가 거만하고 난폭하여 논밭 일을 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 형사책임을 진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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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에서는 연좌법에 따라 ‘함께 살고’ ‘세대가 같을’ 경우 법적 책임을 연대하여 져야 했지만 노예는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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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진 법률은 주인이 노예를 임의로 살육하고 형벌을 내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 역시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했다. 그러나 이 또한 가죄家罪로 보아 법정에서 고소를 수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예의 생명권은 여전히 보장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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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관계에서 진 왕조의 법률은 공식적으로 등기된 혼인관계만 보호했고 부권을 훨씬 더 보호했다. 부인이 남편을 배신하고 도망가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했다. 이를 어긴 자는 이유를 막론하고 모두 처벌되었다. - 659~662

진 왕조에서 황제는 형법과 민법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그의 각종 특권은 법률에 따라 치밀하게 보호되었다. 형법에서 관료와 평민, 작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가장과 기타 가족 구성원, 주인과 노비의 법률적 지위는 현격하게 구별되었고 관료, 작위가 있는 사람, 가장, 주인 등의 특권은 구체적으로 보호되었다. - 664

진 왕조에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노예 신분에 속했다...국가나 주인은 그들을 매매할 수 있었고 법정 가격과 시장 가격이 매겨지기도 했다. 주인 죄를 저지르면 집안의 노비가 대신 복역했다. - 667

진 왕조에는 대체로 다음 열 가지의 사회계층이 존재했다. - 668

1) 황제...정치적으로 황제는 최고 통치자이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그의 신하와 백성이었다.

2) 봉군과 고위 관료...경제적으로 그들은 거대한 경작지와 재산을 소유해 논밭이 끊없이 펼쳐져 있었으며 문객과 심부름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러한 재물은 황제가 하사한 것이며 봉록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들은 부세와 요역에서 면제받을 특권을 지녔고 각종 특권을 이용하여 더욱 부를 축적했다. - 669, 670

3) 기타 대지주와 대상공인
이 계층은 정치적 신분은 없었지만 거대한 경제력을 장악한 덕분에 사회적 지위가 높았으므로 사회정치적 영향력이 컸다...거대한 부는 이 계층의 사회적 지위를 뒷받침해주는 기둥이었던 것 - 670

4) 중․하급 관리와 중․하급 작위를 받은 사람 - 671

5)정치적 신분이 없는 중소지주..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소작농, 고용농, 축노畜奴(노예) 등을 활용해 부를 축적해서 하층 민중과 노비를 어느 정도 지배 - 672

6) 중소 상공인... 7) 자영농 및 기타 자유 노동자 - 672

8) 공전을 경작하는 농민과 기타 각종 형식의 예속 농민...국가에서는 100묘에서 300묘까지의 토지를 받아 경작했다. 각 세대가 조세를 내고 부역을 져야 했으며 임의로 거주지를 옮기지 못했다...사실상 그들의 지위는 국가의 농노에 해당 - 672, 673

9) 고용농과 각종 고용노동자
그들은 “머슴으로 고용되어 씨앗을 뿌리고 경작하는 사람”...그들은 고용농에 속했고 육체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으며 노동력으로 생계를 유지 - 673

10) 공노, 개인 노예 및 각종 노예와 비슷한 사람들


10장
경제-천하를 손에 넣은 최고 통치자

진시황은 여섯 제후국이 각각 시행한 경제제도를 폐지하고 통일된 경제를 확립했다 - 680

도량형의 통일...도량형은 경제활동의 중요한 도구...중앙에서는 각급 지방정부에 통일된 규격으로 제작된 표준 측량기를 배포 - 680

화폐본위제로 통일...나머지 물품은 더 이상 화폐로 쓰지 못하게 했다...동전의 형태를 통일했다...화폐 주조를 통일했다...화폐의 주조권은 국가가 장악하며 개인이 화폐를 주조하는 것은 위법 행위에 속했다...화폐 주조를 통일시킨 것은 진시황이 재정 금융에 대한 관리를 강화한 중요한 조치 - 683, 684

진 왕조의 각급 정부에는 경제를 관리하는 행정 기구가 설립되었고 경제를 관리하는 법규를 제정하여 경제생활을 광범위하게 관리, 통제, 간섭 - 685

진 왕조의 법률은 합법적인 상업활동을 보호하면서 모든 불법적인 활동을 금지...농민이 술을 파는 것을 금지했다....상품의 가격 제한, 공정거래 보호, 밀수 금지 등의 규정 - 688

진왕조의 토지제도는 국가 소유가 대부분이고 기타 각종 소유 형식 역시 행정권력의 지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정부는 직접 경영하는 토지 이외에 일부 땅은 공로를 세운 신하와 백성에게 나눠주고 나머지 땅은 수전제授田制를 실시하여 직접 서민에게 분배하고 경작하게 했다. 그리고 국가는 토지점유권과 사용권을 얻은 신하와 백성에게 지대와 세금을 합친 부세를 징수하며 지배권 또는 소유권을 행사했다. - 691

진 왕조에서는 이미 토지사유제가 점차 발전하는 움직임...국가 소유제 위주의 토지 정책을 시행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점유, 소유, 사유 형식이 병존 - 692

국가가 경작지를 분배하면 농민은 농토를 받았다. 이렇게 분배된 토지의 소유권은 국가에 속했지만 사용권은 분배받은 수전 농민에게 있었다...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였다. 이러한 군민관계는 이중적인 속성을 띠었고 정치관계(황제와 백성)이자 경제관계(지주와 전농)였다. 이중적인 지배관계에서 신하와 백성은 사실상 농노였다. - 695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고 광산, 칠원(옻나무 밭), 기타 물산을 몰래 가질 수 없었다. - 699

[전율]의 규정에 따르면 토지 관리 직책을 맡은 지방 관리는 반드시 서면으로 중앙정부에 비가 내린 후 토양의 습도, 농작물의 이식이 나오는 상황, 미개간된 황무지의 규모 등 토지 사용 현황을 보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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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경작에 쓰이는 소의 사망률이 삼분의 일을 넘으면 하등급으로 평가되어 전색부나 이전里典은 형사책임을 져야 했다. - 699, 670

토지의 경계를 몰래 바꾸면 남자의 경우 귀밑머리와 수염을 깎이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몰래 토지 경계를 바꾸는 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 규정을 둔 취지는 국가가 허락한 합법적인 권리를 보호하기 위함 - 700, 701

부세는 주로 국가의 재정과 관련이 있기에 현대 사회의 ‘세금’의 범주에 속한다. 징세는 국가의 존재 기반을 마련하는 경제적인 방법이었고 각종 세수는 국가 재정의 주요 수입원이자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부세는 단순한 재정 행위가 아니었다. 부세는 현대적인 의미의 지대租 개념도 포함하고 있었다. 국가가 토지 소유권을 전제로 수취한 지대 및 기타 세금은 토지 소유권을 실현하는 경제적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부세는 지대와 세금이 합쳐진 개념이었다. 또한 부세는 경제적 수단을 넘어서 강제적인 성격도 매우 짙었다. 부세는 단순한 경제 행위가 아니라 국가와 군주가 전국의 토지, 자원에 대한 점유권 및 신하와 백성에 대한 각종 인신 지배권을 행사하고 강제 수단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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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세제도는 정치관계를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 재정 제도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으며 실제로 정치제도의 범주에 속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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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세는 지대와 세금, 요역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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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한 점을 볼 때 강제성도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 702, 703

징세와 납세는 국가의 출현과 동시에 생겨났다. - 704

조助는 노동력을 공납하는 것이고 조租는 현물을 공납하는 것 - 704

토지 조세...징수 대상은 국가의 농경지를 경작하는 생산자...진 왕조의 토지 조세로는 전조, 추고가 있었다...전조는 농작물의 열매에 부과...추고는 목초와 곡물, 줄기에 부과...국가와 각급 정부에는 사육해야 할 가축이 많이 있었고 농작물의 줄기는 각종 토목 건축사업에 대량으로 쓰였기 때문에 반드시 “나라에 쓰이도록 추고세를 바쳐야 했다.” - 705, 706

진 왕조에서 인두세는 구전口錢과 산부算賦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인두세의 징수 대상은 연령으로 규정했다. - 706

진 왕조에는 관시關市, 산택세山澤稅, 관세, 시조市租, 주세 등 상업세 , 염철 등의 특산물에 대한 조세와 민간 수공업에 부과하는 공업工稅 등이 있었다...국가는 상품 매매에 대해 영업세, 통관세를 징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관시의 징수였다. 당시 각 제후국의 검문소와 시장에는 관리가 이들 조세를 징수 - 707

진 왕조 때 각종 조세 부담은 매우 컸다. 대략 “수확물의 삼분의 이에 가까운 부세를 거둬들였다...정상적인 상황에서 백성은 1년간 고되게 노동하여 거둬들인 수확물의 대부분을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박탈당했다. - 709

요역은 국가가 행정적인 강제 수단으로 신하와 백성을 동원한 방식 중 하나이다...이들 법률은 요역을 복역하는 시작 연령과 끝나는 연령, 요역 면제 조건, 요역에서 도망간 자에 대한 처벌, 각급 정부의 관련 직책 등을 분명하게 규정 - 709, 710

진 왕조에서 요역은 경졸지역, 정졸지역, 수졸 지역 세 가지가 있었고, 이 요역에 동원된 사람들을 “경졸” “정졸” “수졸”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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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졸은 자신이 사는 군에서 요역...작위가 없거나 혹 작위가 있어서 불경 이하인 사람은 매년 자신이 거주하는 군현에서 1개월간 요역한다고 규정...요역에 나온 사람들은 주로 도성의 토목, 도로, 수로, 궁궐 등 대규모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고 또한 물자 수송, 말 사육, 소금과 야철 산업 등 각종 잡무에도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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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졸은 정역(군역)의 성격이 강했으며 경사, 내부에서 병역의 잡일을 담당하고 1년간 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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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졸은 변경지역의 요역 - 710

진시황 통치 시기에 요술 이외에도 적술謫戌 제도가 시행되어 ‘발적發謫’의 형식으로 수많은 사람을 징발해서 변방을 수비하도록 했다...‘발적’의 대상은 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 - 711

전적傳籍제도...현대의 호적제도에 해당된다. 호구 정리는 법령의 제정, 요역의 징발, 부세의 부과 및 징수, 등급 판별, 권력 분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이며 국가가 농민을 호적에 편재하는 것은 부역을 징발하고 치안 관리를 강화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진 왕조 때 호적제와 십오什伍편제를 법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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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인구를 남녀 불문하고 호적에 등재하여 “살아 있는 자는 호적에 올리고 죽은 자는 호적에서 삭제했으며”, 임의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을 금지했고 거주지를 옮긴 호구는 반드시 관청에 가서 신고해 “백성이 조세로부터 도망갈 수 없게 하고 들판이 황무지가 되거나 잡초가 무성해지는 일이 없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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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의 주민이 서로 감시, 보증하고 연대 책임을 져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반드시 관청에 보고하는 십오연좌 책임제였다. 한 집이 죄를 지으면 나머지 네 집이 함께 신고하고, 아홉 집이 서로 고발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열 집이 모두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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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16년(기원전 231) “처음으로 남자의 나이를 기록하라는 영을 내려” 전국의 남자에게 법에 따라 연령을 기록하게 했다...이전까지는 요역을 징발하기 위해 주로 키를 재서 요역의 연령이 되었는지의 여부를 판단 - 713

호적에 기록할 때는 숨기거나 허위로 신고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진 왕조의 호구책에는 성명, 원적, 신분, 가족 인원수, 삼대 조상의 출신과 호주 및 가족 구성원의 연령, 키, 건강 상태 등을 상세하게 명기 - 713

호구 등기는 ‘백성’이 자발적으로 신고하고 마을의 전(典)과 오의 노(老)가 대조 및 확인을 했다. 전노는 신고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을 발현하면 반드시 상급 관청에 보고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다. - 713

진 왕조의 법률을 보면 백성들에게 수준 높은 요역 노동이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율]에 따르면 징발 명령이 내려졌는데 제때에 출발하지 않거나 목적지에 도착한 시간이 지연되었을 경우 모두 처벌했고 도착 시간이 늦어질수록 처벌의 강도는 더 높아졌다. 요역으로 완성된 결과물은 1년 이상 문제가 없어야 했다. 만약 1년도 안 되어 이상이 발생하면 해당 토목공사를 주관한 행정 및 기술 책임자에게 죄를 물었고 그 공사에 동원되었던 사람들은 다시 공사해야 했으며, 이때 소요되는 시간은 요역 기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진율잡초]의 관련 규정을 보면, 토목공사의 평가에서 하등급, 건축 자재 낭비, 가축 손상 등의 평가가 나오면 모두 법에 따라 처벌되었다. - 716

전국시대에 각 제후국에서 시행된 요역은 시작 연령이 보통 15세부터 50세 이하였고 끝나는 연령이 최고 65세였다. 진 왕조에서 요역이 끝나는 연령은 60세로 전국시대와 비슷하거나 낮았다...진 왕조의 부역제도는 백성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했지만 이 제도는 진 왕조 이전에도 존재했다. 전국시대의 칠웅은 이를 기반으로 오랜 세월 제후국을 다스렸고 진나라 역시 부국강병을 달성했다. - 719, 720


11장
법제 - 중국 고대 사회의 으뜸 ‘법치’ 제왕

진시황은 군주와 법이 단일한 권위를 누리는 지배 원칙을 세우고자 했다. - 725

인의를 주장한 맹자 역시 형刑이 정치적으로 차지하는 위상과 작용을 긍정했고 묵가는 형정(刑政)과 법제 강화를 주장했다. 도가 가운데 황로학파는 법은 도가 체현한 것이며 입법 행위와 법을 집행하는 것은 위정의 근본이라면서 법치와 법에 따른 판단을 주장했다. - 729

법가의 정치이상은 군권지상, 중앙집권, 법치국가, 공천하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 731

전국시대 이래 각 제후국은 체계적인 형법전과 관련 행정, 군사, 경제, 문화 방면의 각종 법규를 제정 - 734

상앙은 관료가 법령을 잘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우매한 백성들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성이 법률 문제를 자문하면 관리는 반드시 사실대로 대답해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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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의 관리와 백성 중 법을 모르는 자가 없게” 했다. 이로써 법률은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준수해야 하는 강제적인 사회 규범이 되었다. - 735, 736

법가의 이상적인 왕국은 군주만이 존귀하고 독재하는 법치 사회 - 739

진시황은 법제의 보급에 열중한 황제였다. 진 왕조의 법제는 공개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진율은 신하와 백성은 법에 따라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먼저 위반자에 대한 처벌 수단과 양형 기준을 금지 내용에 대한 사전 경계 및 위협의 방식으로 밝힌 다음, 신하와 백성에게 의무 이행을 촉구 - 744

진 왕조는 법치를 시행했기 때문에 제도가 세밀하고 치밀했다. 심지어 ‘분서갱유’와 같은 진시황이 저지른 폭정 역시 기본적으로 정해진 제도와 법률에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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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폭정은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나라 법의 가혹함에 있었다. 가혹한 법률에 따라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법률에 따르는 것이 폭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745

인류 문명사를 살펴보면 고금의 역사에서 죄형법정주의는 오랜 발전 과정을 거쳤으며 결코 ‘민주주의 사회’만이 독점하는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죄형법정주의는 ‘법률’이라는 사회제도가 자발적으로 요구한 것 중 하나였다. - 746, 747

법률제도는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실제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것이지 한 개인이 임의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752

법률은 통치계급의 의지를 집중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통치 행위를 옹호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법치’ 황제인 진시황은 법률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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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왕조의 법률제도에 나타난 기본적인 특징은 입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입법권과 최고 사법재판권 모두 최고 통치자에 속했다. 또한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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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권을 독점한 황제는 최고 행정수뇌이자 최고 재판관이었다. 그는 사법 행위에 있어서 최고 결정권자이며 최고 재판관, 각급 법 집행 관리의 임명권, 사면권을 부여받았다. - 753, 754

진 왕조 법률체계의 병폐는 복잡, 가혹, 세밀, 잔혹하다고 정리할 수 있다. 사회의 각 측면을 ‘모두 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진시황은 엄격하고 세밀한 법망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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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망이 너무 세밀하고 법 규정이 단편적이어서 소의 무게가 1촌 빠지고 도둑질한 물건의 가격이 1전 부족한 경우 등 아주 세세한 상황들이 모두 법률의 다스림을 받았다. - 762, 763

진 왕조의 법률에서 법정 죄명은 매우 많다. 현존 문헌만 해도 약 200종이나 된다. 예컨대 황권침범죄의 경우 ‘모반죄’ ‘비방죄’ ‘옛것으로 오늘을 비난하는 죄’ ‘방술이 효험을 발하지 못하는 죄’ 등이 있고, 기타 정치 범죄에는 ‘나랏일을 성실하게 처리하지 않은 죄’ ‘서적을 사사로이 소장한 죄’ ‘짝을 지어 시와 서를 논하는 죄’ ‘사람을 미혹시키는 사악한 말을 하는 죄’ 등이 있었다...방화죄...요역에서 도망친 죄...살인죄...간악한 자를 숨겨준 죄...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훔친 죄...남의 부인이 되어 도망친 죄...이혼했으나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죄...청렴하지 않은 죄...적을 유리하게 한 죄 등이 있었다. - 764, 765


12장
토건 - 공전의 토목공사를 일으킨 황제

최초의 도시들의 경우는 성벽이 상징하는 바가 컸고, 성벽과 성지(도시를 방어하는 연못)는 최초의 군사방어 장치였다. - 799

흉노 기병이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흉노가 중원으로 남진하는 길목에 인공 장벽을 횡으로 구축했다. 몽염 장군이 군대 30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융적을 쫓아버리고 하남을 차지한 후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과 산세의 기복에 따라 요새를 만들었으며 이는 임조에서 요동까지 1만여 리나 되었다...새로운 장성은 각 제후국이 세웠던 옛 장성을 기반으로 재건되고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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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에는 약 500미터마다 주둔하는 병사들이 수비하는 적루(敵樓)가 설치되어 있었다...장성에는 무장한 병사가 주둔 해 있고, 그 주변에 대규모의 백성을 이주시켜 군민이 장성의 각종 군사 시설을 이용하여 신속하게 흉노의 침입을 막을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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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노동력과 물적 자원이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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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몽염이 이끈 30만 상주 군대와 전국 각지에서 징발한 수졸(변경으로 동원된 요역)이었다. 둘째, 주변에서 요역으로 징발된 백성들이었다. 셋째, 유배 온 죄인들이었다. 만리장성에 동원된 사람들이 가장 많을 때에는 50만 명에 달했다.
장성은 강제적인 병역과 요역에 힘입어 축조되었다...장성의 축조는 험준한 지역에서 이뤄졌기에 노동 조건이 열악했을 뿐 아니라 군민이 크게 다치거나 사망하는 등 공사 현장은 매우 참혹했을 것이다. - 803~805

진 왕조가 세워진 후 첫 번째 중대한 교통 토목사업은 바로 전국에 역도驛道를 체계적으로 설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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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의 도로망을 구축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통치 행위이다. 도로망은 천하의 동맥이고 우전(郵傳)은 “천하의 혈관”으로 불렸다. 큰길, 역참, 우전으로 구성된 도로망은 군사, 정치, 민간 부문이 모두 활용하는 대제국이 갖춰야 할 공공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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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진나라는 파촉을 공격하기 위해 험준한 바위 벽에 구멍을 뚫고 다리를 설치하여 ‘1000리나 되는 잔도를 만들어 촉한 땅과 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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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의 너비는 50보(69미터)이고 도로 양쪽으로 주변 석 장(丈)마다 푸른 소나무를 심고 금속 재료를 써 양쪽 노견을 만들었다“고 했다. 치도는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종횡으로 분포 - 809, 810

국가적인 도로망 정비사업과 동시에 역참망 구축도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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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망과 정보망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역졸(驛卒)과 신사(信使)는 중앙정부의 명령이나 지방정부의 보고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런 대형 역참․우전망은 방대한 제국 통치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 811

진나라는 경수와 낙수를 연결하는 정국거를 개통했다. 운하를 개통해서 병력과 군수무라를 수송한 선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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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거 수로는 사실 군사 목적으로 만든 대규모 시설이었다...진군은 초를 멸망시킨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남하하여 백월을 평정했다. 당시 영남 일대는 산길이 험준하여 군대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에 매우 불편했다...진시황은...“수로를 파서 군량미를 조달하고” 누선으로 병력을 수송할 것을 명했다. - 813~815

진시황 26년(기원전 221) 제나라가 멸망하면서 천하가 통일되었다. 진시황은 왕조의 중요한 제도들을 정립하면서 “천하의 병기를 수집하여 함양에 모아놓고 그것을 녹여서 종과 종걸이를 만들게 했으며, 무게가 각각 1000석인 동인상 12인을 만들어 궁궐의 뜰에 두도록” 영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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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볼 때 ‘칼날과 화살촉을 녹여 종과 종걸이를 만든’ 조치는 정상적인 통치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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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병기를 거둬들인 것은 병기 진나라의 제도와 관련이 있다. 운몽진간을 살펴보면, 진나라에서 병기는 모두 국가가 소유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평상시에 국가가 일괄적으로 병기를 제조하고 보관했으며, 군대를 동원할 때는 국가가 이를 발급하고 명부에 등록했다. 퇴역하면 일괄적으로 병기를 회수했으며, 등기된 내용이 사실과 맞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가격대로 배상해야 했다. 귀족과 관리 부여한 소량의 패검 등 의례적인 병기 이외에 전쟁에 쓰이는 병기는 모두 국가가 보관했으며 개인은 평상시에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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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거둬들인 병기는 여섯 제후국에서 몰수한 것으로 수거된 병기의 총량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국시대 말기, 대국 간의 겸병전쟁이 갈수록 치열해져서 각 제후국의 전체 병력이 수백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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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기 관리를 강화한 데에는 통치질서를 확실히 다지고 백성의 저항을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 817~822
진시황 35년(기원전212) ‘함양에 인구는 많은데 선왕의 궁전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 진시황은 함양성을 대규모로 재건하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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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방에 전전前殿을 만들었는데 동서로 500보, 남북으로 50장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5장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 사방으로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궁전 아래에서부터 남산까지 곧장 이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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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이 완성되면 이름을 선택하여 다시 명명하려고 했으나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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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자 했다...황권의 천하에서 견줄 자가 없는 당당한 기세, 천하를 군림하는 위엄, 황실의 존귀함을 구현하는 것이 진시황을 포함한 역대 제왕이 궁궐을 재건한 주요 취지였다. - 831

궁실과 능묘를 재건하기 위해 진시황은 ‘궁형과 유배형을 받은 70여만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거나 여산에 능묘를 짓게 했다. 북산에서 석재를 채취하고 촉과 형 땅에서 목재를 운반해 관중까지 옮겼으며, 3만 가구를 여읍으로 이주시키고 5만 가구를 운양으로 이주시켜 모두 10년간 요역을 살지 않도록 면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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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과 궁실, 원유를 전무후무하게 대규모로 축조한 것은 백성의 노동력과 재산만 빼앗았을 뿐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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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아방, 아방이 진시황을 죽이리라”라는 민요도 있었다. 당시의 통치를 질책하는 풍자의 말 - 833, 834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능묘는 황권을 유지하고 통치를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세계 어느 곳이든 제국이 있는 곳이라면 제왕의 능묘가 있다. 일반적으로 제국이 강성할수록 제왕의 능묘도 그에 비례해서 웅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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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를 통틀어 진시황 여산릉의 크기와 투입된 재원의 규모는 전무후무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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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의 인류는 영혼불멸을 믿었고 이러한 관념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권문 귀족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하늘을 동경하고 귀신에 대한 미신이 있었으며 존엄을 유지하고 부귀를 널리 알리고자 능묘를 조성하고 많은 부장품을 같이 묻어 순장했다. 중국에서 성대한 장례를 치르는 풍습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사후를 생전과 같이’ 치르는 예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고고학의 발굴에서 출토된 상나라 왕과 후비, 귀족의 묘가 그 선례였다. 춘추전국시대 이래, 성대한 장례를 치르는 풍습은 더욱 성행했고 여기에 봉토封土를 더욱 올려 산릉山陵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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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상 진시황이 자신의 수입을 자기 능묘를 조성하는 데 썼다는 말은 사실상 백성의 고혈과 국가의 요역이 투입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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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서는 “진시황은 막 제위에 올라 여산을 뚫어 다스렸고 천하를 통일하여 전국에 70여만 명을 이주시켰다. 땅을 깊이 파게 하고 구리 물을 부어 틈새를 메운 다음 외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궁관, 모든 관원, 기이한 기물, 진귀하고 특이한 물건들을 만들어 가득 채우게 했다. 기술자에게 자동을 발사되는 활과 화살을 만들도록 명했으며 그곳에 접근하여 파내려는 자가 있으면 즉시 발사하게 했다. 수많은 개천, 큰 강, 넓은 바다를 만들었고 기계에 수은을 넣어 흐르게 했다...물고기 기름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초를 두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계획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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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총의 높이는 50장(약 115미터), 동서 길이는 약 485미터, 남북의 너비는 약 515미터이다. 2000여 년간 온갖 비바람과 침식, 인위적인 파괴를 당했지만 오늘날까지 높이 76미터, 너비 350미터, 길이 345미터라는 대규모의 구릉이 보존되어 있다.
진시황은 능읍과 원침園寢제도를 수립했다. 그는 “3만 가구를 여읍으로 이주시켜” 관동 지역의 수많은 백성을 능원 부근에 거주하게 했다. 이들 주민의 임무는 황제는 능원을 재건, 유지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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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원 관리를 전담하는 관직도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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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여산릉은 약 40년에 걸쳐서 조성되었다. 능묘 조성에 동원된 이들은 유배형을 받은 사람과 장인 기술자들로 수십만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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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궁, 여산릉에만 장기간 70만 명이 투입되었다. 이 인력 소모는 북방의 흉노족을 방어하고 남쪽으로 백월을 정벌할 때 동원된 인력의 총합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 - 835~839


13장
생활 - 존칭을 향유하는 천자

진시황과 모후 조희의 관계는 비교적 복잡하며 중대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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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모후가 수렴청정할 때 발생했다. 조희가 노애와 정을 통하고 모의하여 영정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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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부노하여 모후를 연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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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동생 성교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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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다른 두 동생도 진시황에게 처형당했다. 두 동생은 이복형제로 태후 조희와 환관 노애가 통정하여 낳은 사생아다...진시황 9년(기원전 238) 노애가 반란을 일으켜 진시황을 죽이려 했으나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진나라 법에 따라 노애는 거열에 처해지고 삼족을 멸하는 형을 받았다. 진시황의 두 동생은 어리고 죄도 없었지만 연좌제에 묵여 처형되었다. - 851~853

당시의 후비제도에 따라 진시황은 수많은 처첩을 둘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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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대에 왕은 일부일처다첩제를 시행했다. 상주의 무정은 처첩이 수십 명이었고, 서주는 잉혼제를 실시해 천자는 12명의 여자를, 제후는 9명의 여자를 부인으로 두었다. - 857

처를 얻는 일은 부모가 책임졌고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진시황 개인의 바람은 반영되지 않았을 것 - 859

진시황은 처첩이 많았기 때문에 자녀도 많이 두었다...진시황에겐 수십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 860

환관은 제왕과 후비를 위한 전문적인 관원 및 가족 노비 등을 일컫는 총칭이다. 그중에 엄환閹宦(고자 내시)은 특별히 후비희첩을 위하여 설치되었으며 엄환을 둔 목적은 후비의 정절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 864, 865

진시황은 제왕으로서 궁정에서 정무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생활이었다. - 867

진시황은 황제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인을 새라고 불렀다. 황제의 인신만 ‘새’라고 할 수 있고 옥에 조각하여 신민은 반드시 이를 지키라고 명확히 규정했다. 이때부터 황제의 도장을 “옥새”라 불렀다. - 871

한 고조 7년(기원전 200) 10월 초하루의 조의대전에 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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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 가운데에는 차, 기병, 경위병이 서 있었고 각종 병기가 늘어서 있었으며 수많은 깃발이 휘날렸다. 궁전 내에 영을 전하여 ‘추’(좁은 보폭으로 빨리 걸어 공경을 나타냄)라고 외친다. 낭중이 궁전 앞의 계단 양옆으로 늘었는데 계단에 수백 명이 있었다. 공신, 열후, 수많은 장군, 군리는 서열에 따라 계단 서쪽에 서서 동쪽을 향했고 문관, 승상 이하의 관원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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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수레를 타고 방에서 나오니 백관과 집직이 정숙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제후왕부터 시작하여 600석 관원까지 순서대로 축하를 올렸다. 제후왕부터 모든 관원들이 두려워하며 태도를 조심하고 공손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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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와 집법이 예에 부합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바로 잡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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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에 따르면 군신은 매번 조하나 봉참할 때 황제에게 삼궤구개(두 무릎을 땅에 세 번 대고 땅에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린다. 무릎을 꿇을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림)를 행하고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쳐야 한다. 또한 황제가 순행하면 그곳의 백성들은 반드시 ‘만세’를 외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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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를 세 번 부르는 의식과 만수무강이라는 찬미는 군권의 신성함과 더불어 왕은 높고 신하는 낮음을 널리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런 조의제도는 마치 신도들이 상제나 귀신을 공양하는 것과 흡사했다. “만세”라고 불리는 황제는 하루아침에 신민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우상이 되었다. - 873, 874

피위제도는 등급이나 명분, 제왕의 존엄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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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신민은 황제나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거나 쓸 수 없었다. 이를 어기는 것은 바로 대역무도에 해당되었다. - 874

어떤 의정 방식이건 황제는 최종 결정자로서 회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다양한 의견을 드는 것’도 황제가 독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 880


14장
교만과 사치 - 한 시대에 화를 미친 포학 군주

분서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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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진 왕조 정치에 대한 평론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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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야 주청신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여 공덕이 천고를 뛰어넘었다고 칭송했다. 그러나 박사 순우월은 진시황이 자식에게 분봉을 행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고 이런 행정은 칭송할 것이 아니며 망국의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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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과 ‘군현’제도의 차이...진의 정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군현’과 ‘법치’를 공격했다...군현에 대한 논쟁은 구체적인 제도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신구 정치 제도의 형태를 다투는 것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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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이사의 분서령과 협서령의 반포했는데, 사관과 민간에서 소장한 [시경]과 [서경], 백가의 말을 일률적으로 지방관에게 보내어 모두 태워버리고 ‘의약서, 점서, 농서’ 이외의 책을 개인이 소장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또한 옛것으로 현재를 비방하는 일을 엄금했는데 특히 [시경]과 [서경]은 토론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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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목적...‘유생들이 새로운 시대를 따르지 않고 옛것을 배워 현실을 비난하며 백성을 어지럽히고 있으므로’ 약간의 금지 조취를 취했다...결론적으로 황제와 국가 법령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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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정견을 제거하고 모든 비평을 완전히 금지하는 방식으로 주권의 존엄을 유지하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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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조서가 내려오자 각지에서 분분하게 금서를 태우는 일이 일어났고 30일도 지나지 않아 민간의 서적 대부분은 잿더미가 되었다. 황실 도서관에만 비교적 완전한 장서가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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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예외도 있었으나 선진에서 유가, 묵가, 도가, 법가를 막론하고 적극적인 치세를 주장하던 사상가는 대부분 사상의 통일을 주장했다. 법가는 심지어 “시와 서를 불태워서 법령을 밝히고” 각종 법치에 불리한 학파에 대하여 강제적 수단으로 “행동을 금하고, 무리를 깨고 그 당을 해산시킬 것”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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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수단으로 사상을 통일하고자 강행한 것이 너무 쉽게 ‘분서’를 향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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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고대사에서 강제 수단으로 이단을 소멸하고 사상을 통일시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서구 중세의 기독교 정교합일 정권은 무력으로 ‘이단’ 신앙을 금지하고 유관서적을 태워버렸으며 ‘마녀사냥’ 방식으로 이교도를 잔인하게 죽였다. 아랍인은 알렉산드리아 성을 공격한 후 이슬람교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도서관을 불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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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유’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고 ‘갱술사’라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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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불태우고 술사를 묻어 죽이면서 유학이 받은 손실이 가장 심각하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그러나 휴학과 유가만을 겨눈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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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사, 후생, 노생 등은 전형적인 정치사기꾼이다. 이 술사들은 불사약으로 진시황을 속여서 신임과 관작, 재물을 얻었으나 근본적으로 이 황당한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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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법에 따라 처벌하여 대량 살상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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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법을 어긴 자 460여 인을 모두 함양에서 묻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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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살당한 사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후생, 노생 등 죽어 마땅한 술사들이다. 둘째는 적대 세력...셋째는 연좌된 사람이다. 그들은 조정을 비방하지도 않았고 적대 세력도 아니며 악의적으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 939~954


15장
결말 - 2대 황제에서 멸망한 진 제국

진시황 37년(기원전 210) 9월, 호해는 진시황을 여산릉에 안장했다. 10월 무인, 호해가 등극하여 진2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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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해는 자신의 정당성과 권위를 증명하고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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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형제자매를 모조리 죽였다.
탈적으로 획득한 황제의 권력은 종실을 억누르거나 아니면 아예 죽여야 했다. 종실, 특히 여러 황자들도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 곳의 위협적인” 사람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황제는 반드시 자신의 친아들을 포함한 종실을 경계했다. 그런데 호해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황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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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12명을 함양의 시장에서 죽이고 공주 10명을 두현에서 나무에 묶어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그들의 재산은 모두 거둬들였는데, 여기에 연루된 자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 997, 998


16장
역사의 평가 - 진시황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