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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몽생종,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순돌이 아빠^.^ 2015. 7. 10. 20:50

리히터의 연주가 너무 좋아서 그의 삶에 관한 책을 읽어 봤다.

사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연주가 닮은 느낌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연주했던 것일까...





브뤼노 몽생종,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정원, 2005



프랑스의 몇몇 돌팔이 기자들이 쓴 글을 읽으면 사람들은 내가 마치 스탈린에 맞서 싸우느라 세월을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정작 나는 정치에 흥미를 느껴본 적도 없고 내가 싫어하는 분야와는 일절 관계를 맺어본 적도 없는데, 그 기자들은 어떻게 그런 어리석은 것을 생각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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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탈린의 장례식과 관련된 일들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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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끝나고 마침내 ‘원주 홀’을 떠나려는데, 라디오의 스피커에서 ‘우리의 새로운 지도자들...’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부터 모스크바 어디에서나 베리아와 불가닌을 연호하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말렌코프를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요컨대 ‘왕이 죽었다. 왕 만세!’라는 소리였다.

나는 스탈린을 싫어했지만, 그가 죽기가 무섭게 새로운 지도자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에는 구역질이 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저 샤워가 하고 싶을 뿐이었다. 스탈린이 죽은 것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가 죽었다고 해서 내 삶이 새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 48~51

나는 늘 책을 끼고 살았다. 열 살 전후에는 책이란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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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나는 독서를 많이 했다. 한번은(세월이 많이 흘러 전쟁 중에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알렉산드로 게디케가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르리흐테르...에게 꼭 이렇게 전해 주세요. 거리를 걸으면서 책을 읽는 건 위험하다고 말이에요’
알고 보니 그가 모스크바 시내 어딘가에서 나와 맞추쳤는데, 내가 괴테의 [시와 진실]을 읽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그에게 인사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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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때에 나는 일종의 희곡인 [도라]를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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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게 멋있고 즐거웠다. 열한 살 때까지 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내 인생의 가장 끔찍한 시기가 도래했다. 학창시절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학교를 싫어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진다. 학교에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의무적으로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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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나는 학교에 가는 것처럼 집을 나가 학교엔 가지 않고 오데사 주위를 돌아다녔다. 나의 일탈은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의 방법으로 세상을 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가르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독일인 학교에서보다 내가 돌아다닌 수풀 속의 학교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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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음악을 발견한 것은 여덟 살 무렵, 에멜무지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면서였다. 사실 나의 아버지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저녁에 두세 시간씩 피아노를 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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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성실한 독일인답게 나의 학습법,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그 무(無)방법의 방법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애를 내버려두세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두세요. 저 애한테는 무언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는 편이 나아요”...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음계 연습을 하고 싶지 않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돼” 덕분에 나는 음계 연습을 해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교육용 연습곡으로 훈련을 해 본 적도 없다. 체르니도 연주해 보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연주한 곡은 쇼팽의 [야상곡 제1번]이었고, [연습곡 E단조, 작품 25의 5]가 그 다음이었다. 뒤이어 나는 베토벤의 소나타들, 특히 D단조 소나타의 초견연주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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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연극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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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어린 시절에 나의 흥미를 끌었던 건 결코 피아노가 아니었다. 오페라야말로 내 교육의 핵심이었다. - 58~63

아버지는 바로 이 오데사에서 소비에트 사람들에게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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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포는 물론 체포가 흔히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오데사 오페라극장의 상황도 고약했다. 바야흐로 ‘숙청’의 시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고, 모두가 태만, 부패, 방탕 등 무슨 이유로든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저마다 남을 고발하고 ‘인민의 적’의 정체를 폭로하는 집회가 무수히 열렸다.

오페라 극장의 수석연출가는 에른스트 크레네크의 [자니가 연주하기 시작한다]를 연출한 바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극장의 큰 홀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성토했다. 프리마 발레리나는 아주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음에도 그가 ‘독사 같은 자’였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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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진이 극장 벽 여기저기에 나붙었다. 사진에는 ‘인민의 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가 쫓겨난 자리에는 쓰레기 같은 인물이 대신 들어 앉았다. - 74, 75

시험을 볼 필요도 없었고 콩쿠르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바로 그 조건이었다. 그 필수과목들이란 음악과 아무 상관이 없는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잡동사니였다. 모두가 내겐 너무 낯선 것들이었다. 게다가 시험은 대단히 엄격했다. 마음을 다잡고 강의를 들어야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1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두 번이나 퇴학처분을 당했다. - 80

1948년 새로운 음악, 즉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탄압하는 터무니 없는 명령이 발포된 해이다. 나는 신문이란 읽는 사람의 손가락만 더럽히는 물건이라 여기고 통 읽지 않으므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언제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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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사정에 개의치 않고 당국이 배제하고자 하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계속 연주했다. 억압을 받으니까 오히려 연주하고 싶은 생각이 더 들었다. 니나와 나는 명령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프로코피예프를 프로그램에 넣었다. - 127, 128

그 양식의 명쾌함과 구조의 완벽함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는 일찍이 그와 비슷한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이 작품을 통해 낭만주의의 이상들을 과감히 부숴 버리고, 자신의 음악 속에 20세기의 무시무시한 맥박을 통합시키고 있었다. - 143, 144

이 소나타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평형을 잃은 어떤 세계의 불안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든다. 혼돈과 미지가 지배하는 분위기다. 힘들이 광란한다. 이 힘들은 위협적이고 때로 살인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힘들이 있기에 살아간다. 이 힘들은 계속 존재하며, 인간은 느끼고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제 인간에게는 세상 만물이 인간을 충만하게 하기 위한 대상이다. 인간은 서로 힘을 합쳐 항의의 목소리를 내고 만인의 비탄을 서로 나누어 가진다. 그리고 승리하려는 욕구에 불타서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휩쓸어 간다. 인간은 그 대대적인 투쟁을 통해서 생명의 억누를 수 없는 힘을 확인한다. - 151

이 곡은 프로코피예프의 모든 소나타 중에서 가장 풍요롭다. 대단히 복잡하고 심오하며 대조가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작품인 것이다. 어떤 대목에서는 마치 시간의 가차없는 흐름에 몸을 내맡기기라도 하듯 음악이 둔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대목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곡의 풍요로움에 기인하는 것이다. 마치 나무가 열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이 말이다. - 153, 154

이 소나타는 밝고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까지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누구나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하게 되고 그 매력에 굴복하게 되며 그 완벽함도 더욱 잘 느끼게 된다. 나는 이 소나타가 한없이 좋다. - 161

5번 교향곡은 프로코피예프의 내면이 완벽한 경지에 이를 만큼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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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시간, 역사, 전쟁, 애국심 등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승리가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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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향곡은 프로코피예프 자신이 자기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 것이기도 하다. - 164

크림 반도를 떠나기 직전인 6월27일에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연주회는 발트해 연안의 리가 근처에 있는 진타리에서 열렸다. 이 때만큼은 내 연주가 정말 좋았다. 연주가 끝난 뒤에 나는 드레싱 룸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옆문으로 달아났다. 그 길로 1킬로미터는 족히 달려 해변으로 나갔다. 나는 연미복을 벗어 버리고 어둠에 잠겨 가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파도가 기분 좋게 몸에 부딪혀 왔다. 정말 잘된 연주회였다! - 176

칼로신이라는 가공할 인물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는 우리 일행의 우두머리이자 우리의 가이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감시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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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가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나는 바위처럼 꼿꼿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상시적인 억압을 답답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개 삶의 번잡한 훤소를 무시하였고, 그 부질없는 소란들이 언젠가는 잦아들고 말겠지 하고 생각했다. - 176, 177

푸르트벵글러와 다른 지휘자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런 말이 아니라면 내가 달리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 211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와 쿠르트 잔데를링은 세심한 음악가였고 진정한 지휘자였다. 그들과 함께 음악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소련에서 내가 지휘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나에게 그런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들과 연주를 하고 싶었다. 나중에 유럽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함께 연주했던 것처럼 말이다. 클라이버는 내가 만날 수 있었던 지휘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 -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