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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요?

순돌이 아빠^.^ 2023. 12. 12. 10:04

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요_231208.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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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 <아디> 링크 : https://www.adians.net/contents/?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7220852&t=board

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요?

안영민(평화운동가, minibabo.tistory.com)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2023년 10월7일부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또다시’ 대규모로 폭격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12월7일 현재, 이미 사망자가 1만7천명을 넘고 있고, 실종자가 7천명이 넘습니다.[1] 이번 일을 겪으면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울지 못하는 아이

수많은 사진과 영상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가운데 앞으로 두고두고 제 마음을 떠나지 않을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한 아이가 이스라엘의 폭격에서 겨우 살아남아 병원 복도 의자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2] 이름은 무함마드. 무함마드의 표정은 그야말로 멍한 상태입니다. 얼굴과 몸에는 온통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고 커다란 눈은 움직이지 않은 채 벌벌 떨고만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고 무섭고 당황했으면 그랬을까 싶습니다. 백번의 말보다 그 아이의 표정 없는 작은 몸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교실 수업 풍경

조금 있다 의사 한 명이 아이에게 다가옵니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몰려들고,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의사가 무함마드에게 먼저 한 행동은 가만히 아이를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안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아이는 의사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는 울지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가 이제서야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디 아프다는 것도 아니고 무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엄마 아빠가 어디 갔는지 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아저씨 품에 안겨서 크게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심리적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힘을 빼앗겼고, 다른 사람과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생존자가 역량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연결을 생성해 갈 때에 회복할 수 있는 토대가 생성된다. 회복은 관계를 밑바탕으로 할 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고립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새로이 연결된 가운데, 생존자는 외상 경험으로 인해 손상되고 변형되었던 심리적 기능, 즉 신뢰, 자율성, 주도성, 능력, 정체성, 친밀감 등의 기본 역량을 되살려 낸다.[3]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자리에 누운 채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언론사 <알 자지라> 앱을 여는 겁니다. 또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혹시나 전쟁이 멈추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루는 뉴스를 확인한 뒤 몸을 일으켜 메신저 <왓츠앱>을 켰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친구와 연락을 하려구요. 한국은 아침이지만 팔레스타인은 한밤중인 시각입니다. 제가 무심코 ‘굿 나잇’이라고 했고, 그 친구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사실 요즘은 잠을 잘 못자. 이스라엘이 계속 공격을 해서. 

지금도 우리집 저 옆에서 폭발 소리가 들려. 지붕 위로 비행기가 시끄럽게 날아다니고."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저는 그냥 일어나자마자 친근한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굿 나잇’이었는데…결코 ‘굿’일 수 없는 상황인 거지요.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별 생각 없이 ‘굿’이란 말을 내뱉은 것이 미안했고, 나는 이렇게 별 일 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나의 친구는 지옥 불구덩이 속에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당장에 이스라엘의 전쟁을 멈출 수 있는 힘이 제게 없다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당장에 전쟁을 멈출 수도 죽음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 괴로워 잠도 잘 못 자겠고, 수시로 뉴스를 보게 되더라구요. 심지어 베토벤의 곡을 피아노로 치면서도 머릿속에는 악보가 떠오르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이 새끼들…’하는 말이 계속 맴도는 겁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유튜브에 있는 뉴스에 댓글을 다는 겁니다. CNN, BBC, AP 등등 가리지 않고 계속 이스라엘을 욕하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한다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러다 댓글달기조차 멈춘 곳이 있습니다. KBS, MBC, YTN 등 한국의 언론사가 만든 뉴스입니다.

▲ KBS 유튜브 화면 캡처

"어차피 하마스가 선빵을 날린 거 아니냐."

"이왕 시작한 거 이스라엘은 끝장을 봐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한창 폭격하고 있고, 군인들이 가자지구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총질을 해대고, 이미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이런 식의 댓글을 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반박 삼아 댓글을 달았지만 결국 포기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상하더라구요. 하마스를 욕할 수는 있지만, 기왕 시작한 거 다 쓸어버리라니요. 그 말과 글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화가 나고 슬프고 마음이 무너져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라구요.

하마스가 선빵을 날렸잖아

이스라엘도 그렇게 말하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이스라엘에게 선빵을 날렸고 이스라엘이 이에 대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고, 그 생각자체를 탓하거나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동의하지 않으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건의 시작 지점을 2023년10월7일로 놓고 보면 하마스가 먼저 공격한 게 맞습니다. 하마스의 공격에 맞서 이스라엘이 맞대응을 한 것도 맞구요. 적어도 2023년10월7일을 사건의 시작으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왜 동의하지 않느냐구요? 저는 사건의 시작을 2023년10월7일로 보는 것 또한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 하나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틀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 팔레스타인 가자지구(Gaza)와 서안지구(West Bank). 그림 출처 : OCHA

그럼 언제, 무엇이 시작이냐구요. 시간을 조금만 거꾸로 돌려볼게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대규모로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08-2009년, 2012년, 2014년, 2021년에 짧게는 8일, 길게는 50일동안 가자지구를 공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수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했지요. 이렇게 보면 이번 사건의 발단은 4차례에 걸친 이스라엘의  공격일 수도 있겠지요.

시간을 조금만 더 돌려볼까요?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레바논에 있던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에서 수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브라, 샤틸라 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4] 자기 땅에서 쫓겨나 레바논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또다시 죽인 겁니다. 시간을 더 돌려볼까요? 19세기 후반부터 다수의 유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이주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요. 문제가 된 것은 이 유대인들 가운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시오니스트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텅텅 빈 땅도 아니고, 아랍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만들겠다고 덤벼든 겁니다.[5] 이들은 영국의 지원 아래 조직을 만들고 무기와 돈을 모았지요. 유대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아랍인들을 죽이고 내쫓았습니다. 이때 발생한 난민의 수만 75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6] 마치 유럽의 백인들이 아메리카로 몰려가서 원주민을 죽이고 내쫓으며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던 것과 비슷합니다.

230만명가량이 사는 가자지구를 어떻게 봉쇄했고, 물이나 전기와 같은 생필품의 공급 권한을 쥐고 어떻게 가자지구 사람들을 괴롭혔고, 5차례에 걸친 대규모 군사 공격 사이에도 계속 폭격을 하고 총을 쏘았다는 얘기는 일단 빼자구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선빵이고 어떤 것이 발단이고 시작입니까? 이전 4차례의 군사 공격입니까, 1982년 사브라, 샤틸라 학살입니까? 1967년 3차 중동 전쟁과 가자지구 점령입니까? 아니면 1948년의 나크바(Nakba, 대재앙)와 추방입니까?

저는 뉴스에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공격을 중단하라."

그러자 제 글에 어떤 분이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너 같으면 그렇게 당하고 참겠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니 이스라엘이 보복을 하는 것이고, 그 보복이 정당하다는 거지요. 지난 2023년 10월22일, 미국 대통령 바이든을 비롯해 서방 6개국 정상들은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를 지지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습니다.[7] 만약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권리를 지니고 이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이스라엘이 무력을 사용하면 자위권 행사이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무력을 사용하면 테러일뿐인가요?

지난 10월30일 UN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도중 길라드 에르단 이스라엘 대사가 <NEVER AGAIN>이라는 글자가 적힌 노란색 별을 왼쪽 가슴에 달았습니다.[8] 홀로코스트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요. 또한 이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대하던 것을 떠올리게 하며 하마스를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입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선 안된다는 것에는 백번 천번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히틀러와 나치가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점령지 폴란드에서 저지른 살인과 마찬가지로 그 조치는 돌이킬 수 없는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 ‘안락사 계획’이라고 에둘렀지만 1939년 가을부터 정신병자와 불치병 환자를 죽이는 그 사업은 나중에 오는 본격적인 절멸 사업의 신호탄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은 히틀러가 이념적 ‘사명’을 완수하기로 결심하고 벌이는 전쟁과 맞닿아 있었다.[9]

특정한 집단을 아예 쓸어버리고, 절멸시키겠다는 것이 나치의 이념이고 행동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건 여자건, 나이가 많건 적건 유대인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가요? 지난 11월 5일, 아미하이 엘리야후 이스라엘 ‘예루살렘 문제와 유산 담당 장관’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가자지구에 핵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했다지요.[10]

▲ 팔레스타인인을 향해 총을 쏘는 이스라엘군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기도 했고, 새롭지 않다고도 여겼습니다. 깜짝 놀란 이유는 이스라엘의 그냥 보통 개인이 아니라 정부의 장관이 핵무기 사용을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새롭지 않다고 여긴 이유는 이스라엘 건국 과정부터 지금까지 시오니스트들의 변함없는 이념적 목표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랍인들을 쓸어버리고 몰아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948년 전후 유대 군인들이 여기저기 총을 쏘고 다니며 아랍인들을 자기 살던 마을에서 내쫓았지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가 어린이이건 성인이건, 야파 출신이건 예루살렘 출신이건 오직 하나의 정체성 아랍인이면 무조건 죽이거나 쫓아내는 겁니다.

그렇게 모두 쓸어버리려고 계속 시도 했지만 100% 절멸과 추방을 이루어내진 못했지요. 팔레스타인 외부로  쫓겨나지 않은 사람들은 좁은 지역에 가둬버렸습니다. 나치가 게토 속에 유대인들을 가두던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동안 자기 집에서 쫓겨나 도시 북쪽의 황폐한 세 지구(스타레 미아스토, 바우티, 마리신)로 이사했다. 이 모든 움직임은 발트 해 출신 혈통독일인들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고, 유대인들이 이사한 지구가 바로 게토 후보지였다. 그곳에는 이미 6만 2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곳이 게토로 전환되면 우치와 교외의 유대인 10만 명이 추가로 이주해올 예정이었다…그로부터 열흘 뒤인 5월 10일, 셰퍼는 게토 거주민을 나머지 세계로부터 분리하는 조치를 취했다. “유대인은 원칙적으로 게토를 떠날 수 없다…독일인과 폴란드인은 원칙적으로 게토에 들어올 수 없다.[11]

나치 독일은 유대인들에게 갑작스레 집을 비우고 게토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집과 재산은 고스란히 다른 독일인들이 차지했구요. 마찬가지 일이 팔레스타인에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가자지구 주변 땅에는 이스라엘이 장벽을 만들었지요. 땅굴을 파지 못하도록 땅 밑으로까지. 바다는 좁은 어업 영역만 제외하고 군함이 지키고 있습니다. 예전에 가자지구에 공항이 있었는데 그것도 이스라엘이 부셔버렸구요. 게토의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도 특별한 허가를 얻어야만 외부로 나갈 수 있습니다. 외부인이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전에 가자지구에 간 적이 있었는데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허가를 얻는데만 보름가량이 걸렸습니다. 걸어가면 금방 갈 수 있는 곳인데도 장벽과 검문소에 막혀 그럴 수 없었던 것지요.

▲ 지나가던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연행하는 이스라엘 군인

가자지구가 그러면 서안지구는 어떠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고립’의 관점에서 서안지구를 바라보면 가자지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면이 있습니다. 가자지구가 ‘가자지구’라는  하나의 수용소나 감옥처럼 되어 있다면, 서안지구는 여러 도시와 마을들로 쪼개져  고립되거나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흔히 언론을 보면 서안지구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있어서 마치 팔레스타인인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지요.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 사이에 이스라엘이 검문소를 설치하고 수시로 체포와 구금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주권은 그냥 말하기 좋은 겉치레일 뿐입니다. 게다가 서안지구 주변을 둘러싸는 장벽을 쌓고 있으니 점점 더 수용소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12]

75년, 아니 100년여년동안 이루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살인, 추방, 고립을 빼고 오늘의 이 전쟁을 말할 수 있을까요.

하마스의 이스라엘 파괴

우리는 폐하의 평화애호 정신을 잘 이해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정치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영국과 미국이 제국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에 발발한 것이다. 본래는 폭력으로 대동아 건설을 수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 개시 후에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것이 동아에서 영미를 축출하여 동아의 민족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3]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일본인들이 했던 생각입니다. 일본은 본래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영국과 미국이 위협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자위권 차원의 행동이라고 하는 거지요. 어느새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성공할 것이고 또 성공해야만 한다고 히틀러는 못 박았다. 적이 이기면 우리 독일 민족은 절멸당할 것이다. 아시아의 야만성이 유럽에 뿌리내릴 것이다. 독일 여자는 이 짐승들의 사냥감이 될 것이다. 지식인은 도살당할 것이다. 우리를 고등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특성은 절멸되고 말살당할 것이다. 반대로 제국이 이겨서 ‘생존 공간’을 확보하면 다음 세대들은 곡물, 철, 석탄, 석유, 아마, 고무, 목재를 무진장 얻을 것이다.[14]

히틀러는 유대인과 볼셰비키의 음모, 즉 독일인들을 절멸시키려는 시도에 맞서 싸울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전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거지요.

테러범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에게 가했던 가혹한 학대행위로 인해 법적절차를 밟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 그런 학대행위를 초래한 원인 제공자는 바로 피해자 자신들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피해자들에게로 돌린다…비난의 귀인은 양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테러범들은 스스로를 탄압에 맞서 보복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로 간주하며 책임을 피하려 한다.[15]

이스라엘이 지난 수십년동안 계속해서 하는 말이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입니다. 하마스의 힘이 커지기 이전에는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아라파트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파괴하려고 한다고 했구요. 문제의 책임과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일본이 영국과 미국에게 책임이 있고, 히틀러가 유대인과 소련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이스라엘이 탱크 포격으로 파괴한 건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파괴하려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정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부터 말씀드리면 하마스의 이스라엘 파괴는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핵무기에 관한 얘기부터 해보지요.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2022년 연감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90여기 가량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16] 이에 비해  하마스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아랍 국가 곧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누가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F-16, F-35를 비롯해 300대 이상의 전투기, 아파치를 포함한 140대 가량의 헬리콥터, 2,200대 이상의 탱크, 그밖에도 수십대의 전함과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17] 게다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18]은 물론이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이스라엘에게 대규모로 무기와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있지요.[19] 그에 비해 하마스는 어떤가요? 혹시 하마스가 핵무기나 전투기, 탱크나 잠수함을 가지고 있다는 뉴스 보셨나요? 하마스가 가지고 있는 무력이라고 하면 로켓이나 소총 정도입니다. 이스라엘과 비교한다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수준입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고 하든, 아니면 이스라엘이 하마스가 우리를 파괴하려고 한다고 하든 현실은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습니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파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이 그랬고, 히틀러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지난 10월14일, KBS가 이스라엘 재무부 차관 미갈 월디거를 만난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분노 키워가는 이스라엘…“잔인한 짐승, 끝장을 봐야”’.[20] 미갈 월디거가 하마스를 짐승이라고 했다는 거지요.

베트남의 많은 미군들은 베트남 문화와 사람들의 긍정적이고 친근한 측면으로부터 격리된 채 그 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들이 접해 본 베트남인이라고는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자들이거나 베트콩 혹은 베트콩을 돕는 것으로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뿐이었다. 그들은 뿌리 깊은 의심과 증오를 키울만한 토양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한 베트남 참전 용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였다.”[21]

베트남이 미국을 침공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해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강간했지요. 그러면서 미군들은 베트남인들을 짐승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식물이 아닌 동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피지배자들에게 온갖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것이겠지요. 히틀러가 유대인을 칭할 때 자주 썼던 말이 세균과 바이러스입니다. 유대인이 세균과 바이러스이니 죽이는 것은 아무런 죄가 되지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22]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흑인 노예들을 지배하면서 덧붙였던 이미지도 비슷합니다. 무식하고 무능력하고 무질서하며, 사고할 능력이라고는 없는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거지요. 그러니 이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23] 마치 자신들은 문명의 세계이고 상대는 야만의 세계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24] 피지배자를 비인간화하거나 사물화 함으로써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거지요.[25]

이것이 인간인가

탈진으로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몸, 우리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겨우 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금의 기운이 남은 친구들은 침착하게 이렇게 말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버텨야 해!” 다른 친구들은 그들 곁에서 죽어 간다.[26]

나치 수용소에서 학대 받고 극한까지 몰렸던 한 생존자의 이야기입니다. 로베르 앙텔므는 수용소 안에서 내가 당장 먹고 쉬고 생명을 유지할만한 여력조차 없는 상황에서 다른 이를 돕고 걱정하기도 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비인간화하고 사물화한다고 해서 피지배자들의 감정이나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인간됨을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 얘기하면서 왜 나치 수용소를 이야기하냐 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가자지구, 적어도 지금의 가자지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 수용소와 수용소 인간입니다.[27] 누구는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가자지구를 수용소라고 표현하냐구요.[28] 나치는 수용소의 존재를 비밀로 했습니다. 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이 수용소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했고 서서히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에이 설마’하면서 믿지 않으려고 했구요. 제가 가자지구에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지 외국인인 저에게  물었습니다. 차를 타면 1시간가량이면 되는 거리의 예루살렘을 그들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29]

▲ 골목에서 뛰어놀고 있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아이들

예전에 가자지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골목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 순간에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요. 지금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런 마음이 듭니다.

"지금도 이 아이들이 살아 있을까?"

어쩌면 저 사진속 누군가는 살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번 전쟁으로 죽었겠지요. 만약 누군가 살아 있다면 저는 저들을 위해, 저들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유명인이거나 정치인도 아니고, 커다란 힘이나 돈을 가진 것도 아닌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들의 고통 앞에서 저는 어떤 인간이고, 어떤 존재인지 아프게 묻습니다.

인간이 전쟁에 기꺼이 호응하는 것이 파괴 본능의 결과라면, 가장 두드러진 방책은 파괴 본능의 적수인 에로스로 하여금 거기에 저항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 감정적 유대가 생겨나도록 조장하는 것은 전쟁에 불리하게 작용할 게 분명합니다. 이 감정적 유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 유대는 비록 성적 목적은 갖고 있지 않지만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계와 비슷한 관계일 수 있습니다. 종교도 역시 똑같은 말-<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은 이런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두 번째 유대는 동일화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관심사를 공유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이 감정의 일치, 즉 동일화를 낳습니다.[30]

이 글은 1932년 아인슈타인이 ‘인류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며 편지를 보냈고, 프로이트가 그에 대한 답으로 쓴 것입니다. 1932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십여년이 지난 후이고, 2차 세계대전 발발을 몇 해 앞두고 있는 때이지요. 저는 프로이트의 말에 공감합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 사랑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고 행복해질 거다 식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윤리적 태도와 정서적 밑바탕으로써의 사랑입니다. 동일화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같은 종種·동류同類라는 의식이나 감정으로부터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평화의 연대가 싹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등동물들 사이에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봉사는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을 통해 위협을 서로에게 경고하는 것이다…사회적 동물은 서로 세세한 여러 가지 봉사를 한다. 말은 서로 가려운 부위를 입술로 다듬어주고, 소는 서로를 핥아주며 원숭이는 외부 기생충을 찾아준다…사회적 동물은 서로를 지켜준다. 북아메리카의 바이슨 들소는 위험이 닥쳐오면 암컷과 어린 송아지들을 중심에 모으고 수컷들은 바깥을 둘러싸며 방어 태세를 취한다.[31]

인간을 비롯해 많은 동물이 위협이 닥치면 다른 개체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 신호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는데도 그렇게 합니다. 게다가 다윈의 이야기에 나오는 들소처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다른 개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맨 앞에 놓은 위험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에게 그런 윤리적인 의식이나 타인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지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 <마인드헌터> 같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들이 그렇습니다.[32] 나치·탈리반·이스라엘 같은 집단이 하는 행동을 보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다르지 않다 싶구요. 병원이고 학교고 가리지 않고 폭격을 해대는 이스라엘군을 보면 독일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33]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들이 있는 세상에서 공감이나 연민, 우정이나 사랑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싶기도 하구요.

지금 가자지구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관이 없어서 하얀천에 싸서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죽은 5살 아이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엄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있습니다.[34] 엄마는 죽은 아이에게 말합니다.

"내 사랑, 내 심장, 생일날이 되면 너가 먹고 싶어하던 케익을 꼭 만들어줄게. 엄마가 맹세한다. 내 사랑, 내 심장."

아이의 엄마도 울었고, 그 영상을 보는 저도 울었습니다. 비극이고 비참이고 비통입니다. 생일 잔치 때 케익을 먹고 싶다던 5살 아이를 떠나보낼 수 밖에 없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누가 이 전쟁을 지지하고 옹호한다는 말입니까. 저 아이가 하마스이고 저 엄마가 테러리스트입니까.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전쟁 앞에서 사랑이 왠말이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저도 감히 꺼내지 못했던 말입니다. 너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서 사랑이니 연대니 하는 긍정적인 마음은 아예 들지도 않았습니다. 저 또한 증오의 마음이 넘쳐서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아이를 손에 안고 가자의 엄마들이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는 것을 보면서 저 또한 사랑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왜 전쟁에 반대하고, 왜 지금 이 전쟁을 멈추고 싶어하는지 생각하면서 그 시작은 언제나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전쟁과 폭력이 싫은 거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함께 눈물 흘리고 안타까워 하는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집회나 모금에 참여하는 것이겠지요.

▲ 팔레스타인 깃발을 들고 있는 어린이

사랑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것이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구요. 하지만 다행히도(?) 인간이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고, 서로 협동할 수 있으며, 우리 안에는 고통 받는 존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 여러 연구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감은 타인의 쾌락과 고통을 인지한 뒤에 그의 안녕과 자신의 안녕을 나란히 놓는 데서 비롯된다….어떤 아이가 짖어 대는 개에 놀라 마구 울부짖는다면, 내 공감적 반응은 아이를 따라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안심시키고 보호하는 것이다.[35]

이 말에 빗대어, 만약 어느 팔레스타인 아이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본다면 저의 공감적 반응은 그냥 울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안심시키고 보호하려 행동하는 것이겠지요. 가자의 한 의사가 무함마드를 위해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타인의 고통 앞에 사랑을 느끼도록 진화하고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당신과 같은 많은 인간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멀고 먼,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도 화가 나고 괴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겠지요. 그 아이들에게 무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댓글달기를 하는 거구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미안하고 죄책감마저 드니까요.[36]

▲ 케테 콜비츠.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현장 연구자들은 볼커가 에이미의 새끼를 위협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볼커는 침팬지 수컷이 자주 그러듯 새끼를 채가려 했던 걸까? 그랬다면 볼커는 공동체의 방어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새끼에게 손을 대려 하는 수컷은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이런 갑작스런 폭력은 보노보 사회의 축제판 같은 겉모습 저 안쪽에 존재하는 보호막의 존재를 시사한다. 이는 가장 약한 존재의 이익을 보호하는 도덕적 관습과 유사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위반하면 집단 전체가 관습을 복구하려 든다. 사회의 가장 높은 서열, 가령 우두머리 암컷이라도 감히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37]

당신과 제가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사랑을 느낄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

비참이 끊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입니다.[38]

[3]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플래닛, 2007, 225쪽

[4]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해서는 노암 촘스키, <숙명의 트라이앵글>, 이후, 2008 참고

[5]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공세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인 19세기 말 이전까지는 3%의 유대교도, 9%의 기독교도, 88%의 이슬람교도가 같은 신을 믿는 형제 종교인들로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홍미정,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의 역사’, 홍성태 엮음, <전쟁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 문화과학사, 2007, 45쪽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대해서는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열린책들, 2023.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현대사>, 후마니타스, 2009. Benny Morris, < Righteous Victims: A History of the Zionist-Arab Conflict, 1881-2001>, Vintage, 2001 등 참고

[6] 흔히 ‘팔레스타인 문제’라고 하면 현재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상황을 중심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더 앞선 문제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는 팔레스타인 난민과 그들의 귀환권(the right of return) 입니다. 이스라엘의 인종청소와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해서는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Oneworld, 2007. Naseer Aruri (Editor),<Palestinian Refugees : The Right of Return>, Pluto Press, 2001 등 참고.

[7] VOA, <미∙영∙프 등 서방 6개국 정상 “이스라엘 자위권 지지, 분쟁 확산 방지”>, 2023.10.23, https://www.voakorea.com/a/7322308.html

[8] 연합뉴스, <'노란별' 달고 유엔 간 이스라엘 대사…홀로코스트 단체는 비판>, 2023.10.31, https://www.yna.co.kr/view/AKR20231031133051009

[9] 이언 커쇼, <히틀러 2>, 교양인, 2010년, 328쪽

[10] 한겨레, <이스라엘 장관 “핵 공격” 언급 파문…아랍 22개국 들고일어나>, 2023.11.07.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115065.html

[11]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313~314쪽

[12] 서안지구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생활 모습에 대해서는 안영민, <팔레스타인에 물들다>, 책으로여는세상, 2010 참고.

[13] 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2022, 611쪽

[14] 이언 커쇼, 같은 책, 633쪽

[15] Albert Bandura, <도덕성의 분리와 비도덕적 행위의 정당화>, 교육과학사, 2018, 259~260쪽

[16] 한겨레, <지구상에 있는 1만2천여개 핵무기… 35년만에 다시 증가세로>, 2022.06.22,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1046786.html

[18] YTN, <"이스라엘이 원하는 모든 것 지원"...미국, 발 빠른 지원 나선 이유는>, 2003.10.09, https://youtu.be/2GnbNWHfz94?list=LL

[20] KBS, <분노 키워가는 이스라엘…“잔인한 짐승, 끝장을 봐야”>, 2023.10.14,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92951

[21] 데이브 그로스먼, <살인의 심리학>, 플래닛, 2011, 250쪽

[22] ‘가스라이터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적을 사회악으로 규정한다…가스라이터는 모든 것을 특정 집단의 탓으로 돌리고 국민의 절대다수가 그 집단을 증오하게 만든다.’, 스테파니 몰턴 사키스, <가스라이팅>, 수오서재, 2021, 162쪽

[23] ‘뉴스영화나 뉴스사진에서는 아랍이 언제나 군중으로 나타난다…이러한 화면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군중의 분노와 비참 또는 비이성적인(그러므로 희망이 없을 정도로 기괴한) 제스처이다. 이러한 이미지 전체에 숨어 있는 것은 ‘지하드’의 위협이고, 그 결과 이슬람교도(내지 아랍인)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공포가 생겨난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7, 459~460쪽. ‘가령 알제리에서의 프랑스 측 폭력이 가끔 언급되었어도, 그것은 원주민의 ‘광신적 태도와 약탈을 좋아하는’ 탓으로 인해 프랑스 군도 어쩔 수 없이 불쾌한 폭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식으로 완화되었다.’, <문화와 제국주의>, 문화출판사, 2005, 354쪽.

[24] 연합뉴스, <네타냐후 "하마스는 IS"…문명과 야만의 대결 주장>, 2023.10.10, https://www.yna.co.kr/view/AKR20231010068100009

[25] ‘유대인들에게서 모든 인간성을 빼앗아 버리고 역겨운 존재로 취급함으로써 독일인들은 모든 유대인 계층 사람들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가책을 없앨 수 있었다’, Albert Bandura, 같은 책, 261쪽

[26] 로베르 앙텔므, <인류>, 그린비, 2015, 406쪽

[27] ‘수용소에서 가장 나쁜 상황에 처한 집단이 바로 이 세번째 집단으로, 이들은 완전히 무고한 사람들이었다…수용소의 궁극적 목적, 즉 소련에서는 일부 달성되었고 나치 테러의 마지막 시기에 명백하게 드러났던 궁극적 목적은 전체 수용소 주민을 이 범주의 무고한 사람들로 채우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사, 2021, 236쪽

[28]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수용소가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12, 38쪽

[29] 수용소에 갇힌 가자지구 주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디, <선을 넘는 팔레스타인 여성들>, 사단법인 아디, 2020 참고

[30] 지그문트 프로이트, ‘왜 전쟁인가?’,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07, 349~350쪽

[31]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 1>, 한길사, 2006, 171~172쪽

[32] ‘사이코패스는 냉담하고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사람들로서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끼친 피해를 자각하지 못하고 죄책감이나 후회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감정적·사회적 교감은 피상적이며,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로버트 D. 헤어, <진단명 사이코패스>, 바다출판사, 2005, 11쪽

[33] ‘게슈타포 출동 부대 :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동부 점령지의 유대인 말살과 정적 탄압을 위해 투입한 친위대 소속 특수부대’,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교양인, 2011, 735쪽

[35]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사이언스북스, 2017, 978쪽

[36] ‘이타성-친족 이타성도 아니고 호혜적 이타성도 아닌, 전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을 상대로 한 진정한 의미의 이타성-은 분명 존재한다…사회가 별도로 이러한 행동을 권장하지 않더라도, 혹은 개인주의적 경쟁력을 증진시키느라 오히려 이러한 행동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더라도, 이러한 이타적 실천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피터 싱어, <다윈주의 좌파: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 이음, 2012, 93~94쪽

[37] 프란스 드 발, <착한 인류-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미지북스, 2014, 119쪽

[38]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변경시킬 수 없지만, 그 명령에 반항할 것인지 그 벽 안에서 번성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후자의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주목하고 관계로부터 힘을 이끌어 낼 것이며, 그 지혜와 능력을 자녀들에게도 물려 줄 것이다.’, 토머스 루이스 외, <사랑을 위한 과학>, 사이언스북스, 2002, 3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