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에 쓴 거 :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60
이한 선생님께,
오랜만에 인사 드리네요. 설 연휴는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설에도 평소처럼 별일 없이 지내며,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지내냐구요? 어지간하면 그저 말이라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 드리겠지만, 요즘같은 때는 그런 빈말도 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냐구요?
팔레스타인이라는 곳
예전에 선생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하셨던 거 기억하시나요?
"미니씨, 팔레스타인 같이 위험한 곳은 왜 굳이 가려고 그래요?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까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지요.
"거기도 사람 사는 데고, 게다가 저는 외국인인데 별일 있겠어요. 이스라엘 군인한테 총 맞아죽을 확률보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때는 저도 참 겁이 없었나 봅니다. 그런 농담을 했을 정도니까요. 지금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얘기지요.
괜히 걱정하실까봐 선생님께 말씀 드리지 않았던 얘기가 하나 있네요.
처음 팔레스타인에 갔을 때였어요.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집회에 참석했지요. 이스라엘 군인들이 우리쪽을 향해 총과 최루탄을 쐈어요. 그때 제 옆에 있던 한국인 친구가 제게 했던 말이 글자 하나 빼지 않고 목소리까지 지금도 그대로 기억나요.
"형, 나 맞은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그 순간에는 얼른 느낌이 오지 않더라구요. 눈앞에서 군인들이 총과 최루탄을 쏘는 것을 보고 있는데도 제 곁의 친구가 맞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예요.
마침 가까이에 앰뷸런스가 있어서 응급 처치를 받고 병원으로 갔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리에 맞아 뼈를 크게 다쳤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니 말이에요.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요르단에 있다 팔레스타인까지 가서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계획했던 일들은 하지도 못하고 한동안 누워만 있어야 했으니 말이에요.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다리가 아니고 다른 부위에 맞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아래 사진 보이시죠? 총을 든 군인과 희뿌연 최루탄 연기. 사진을 찍으며 가만히 서 있는데 머리 옆으로 ‘쉿’ ‘쉿’ 하며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니까요.
아무튼 그 일이 그 친구나 제게 큰 충격(?)은 아니었나봐요. 몇 해 있다 또 팔레스타인에 갔으니 말입니다.
그동안 그 일에 대해 별다른 이야기를 한 적도 없어요.
훤한 대낮에 탁 트인 공간, 외국인임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총이든 최루탄이든 쏘아대니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오죽할까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리를 절며 걸어도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고통에 비할까 싶어 아프다는 말조차 하기 미안했는지도 모르구요.
2023년 10월 7일, 그날 이후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는 그 친구가 얼마전에 그러더라구요.
"형, 사실 요즘 잠을 잘 못 자겠어.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계속해서 뉴스를 보게 돼. 솔직히 너무 힘들어."
20년 넘게 알고 지내는동안 그 친구가 무언가에 대해 힘들다는 얘기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형, 나 맞은 것 같아’라고 하고 나서도 겨우 한다는 말이 ‘형…나 아파…’ 정도였는데,
처음으로 크고 무겁게 한숨 쉬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어 저도 말했습니다.
"너나 나나 참 큰 일이다. 10월 7일부터 나도 정말 마음이 무너져서 미치겠어. 불쑥 불쑥 다 때려부수고 싶어."
선생님도 뉴스를 보셔서 아시죠? 지난 10월 7일부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Gaza 지구에 폭탄을 쏟아 붓고 있는 거요.
10월 7일 이후 저의 하루 일과는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도 않고 핸드폰을 열어 알 자지라(Al Jazeera)에 접속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국내외 언론들이 이스라엘 편에서 엉터리 같은 뉴스를 쏟아낼 때, 알 자지라가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같이 알 자지라에 접속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매일 같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넉 달이 넘었습니다.
OCHA(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 홈페이지에 들어갔습니다. 가자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주더라구요. 가자 지구에 약 230만 명이 사는데, 2024년 2월 7일까지 2만 7천 명 가량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집계된 사망자만 전체 주민의 1%가 넘는 겁니다. 1천만 서울 시민으로 치면 벌써 10만 명이 넘게 죽었다는 거잖아요. 그것도 넉 달 동안의 군사 공격으로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습니다. 어쩌면 제 삶은 2023년 10월 7일, 그날 이전과 이후로 조금 나뉠 것 같습니다.
아직도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수천 명이 묻혀 있는데다, 이스라엘의 공격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으니 또 얼마나 많은 귀한 생명들이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이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디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마음조차 듭니다.
몸도 마음도
선생님께 아래 얘기는 제가 처음 하는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말고 다른 나라에 갔다가 제 앞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채로 쓰러졌습니다. 총소리가 계속 나고 있었지만 그 생각은 전혀 들지 않더라구요. 곧바로 구멍 뚫린 가슴에 저의 왼손을 올리고 그 위에 오른손을 겹쳐 쏟아져 나오는 피를 막으려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와 함께 수다를 떨던 그 사람이 죽지 않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일이 있고 한참 동안 화가 난다거나 무섭다거나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일이 있었지 싶은 단순한 기록과도 같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때 제가 얼마나 당황하고 혼란스럽고 놀랐는지가 떠올랐습니다. 마치 깊이 묻어둔 기억이 점점 되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던 미지근한 피에 대한 느낌은 점점 뚜렷해졌습니다.
저는 지금도 총을 보면 무섭고 긴장됩니다. 그때 그 순간이 떠올라 심장이 쿵쾅거리기도 하구요.
이번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일들을 보면서 제 가슴에 남아 있던 그 상처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보다 백 배, 천 배 큰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싶습니다.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눈 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집으로 군인들이 쳐들어와서 남편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모습을 바라본 아내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피난을 떠나는데 탱크가 몰려와서 토끼몰이하듯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모습을 본 팔레스타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옷을 벗기고 눈을 가리고 손은 뒤로 묶인 채 트럭에 실려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가자 지구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이 난리에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불쑥 불쑥 솟아나는 두려움과 울분, 슬픔과 억울함, 무력감과 좌절감에 평생을 시달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몸과 마음 모두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몸도 마음도 모두.
잘 못 지냅니다
근래 사람들을 만나면 저에게 이렇게 묻곤 합니다. "요즘 팔레스타인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그러면 저는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리고 대화의 주제를 다른 쪽으로 바꾸는 편입니다. 차라리 '모래에도 꽃이 핀다' 같은 드라마 얘기를 하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이라는 말만 나와도 눈물이 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 빈말이라도 ‘저는 잘 지냅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잘 못 지냅니다’라고 말씀 드리는 게 가장 솔직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제 마음에 안정을 주려는 노력 또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냐구요?
요즘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합니다. 특히 베토벤의 곡을 치고 있으면 잠시나마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것 같습니다. 베토벤이 들려주는 그 선율만으로도 저는 큰 위안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런 위안과 용기가 있기에 지금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라도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너무 너무 화가 나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예 싫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인사 드리면서 너무 무거운 얘기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선생님께 이런 말이라도 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몇 마디 적다보니 어느새 밤 12시가 넘었네요. 내일 아침은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하고 또 간절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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