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 치러 갔더니 ○○ 누나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뜸 큰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 : 야, 너거 셰익스피어 원본대로 읽어 보기로 한 거 정말 잘했다
미니 : 그래...
○○ : 안 그래도 우리 △△가 셰익스피어를 짧게 요약한 것만 읽어 봐서 좀 그랬는데... 우리 △△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별로 안 좋아할 거야. 사랑 얘기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 다른 여자 애들은 좋아하겠지만...
미니 : 그럼 햄릿이랑 둘 다 하지 뭐
○○ : 지난번에 △△이가 ‘엄마 나 논어 다 읽어 봤어’하길래, ‘야, 논어 원본이 얼마나 두꺼운데 그라노’그랬지
미니 : 맞아. 요약한 거 말고 좀 힘들어도 그냥 전체를 다 읽어 보고 나면 생각이 확 크고 그럴 건데...
동네 중딩들과의 책읽기 모임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 보기로 한 것을 두고 ○○누나가 얘기를 꺼낸 겁니다.
저번에 책읽기 모임할 때 이덕무의 벗에 관한 얘기가 나왔고, 모임을 함께하는 △△가 공씨입니다. 그래서 ‘야, 니 공씨니까 공자 알겠네’하면서 논어를 꺼내 논어에 나오는 벗에 관한 한 구절을 읽어 줬습니다. △△가 집에 가서 ‘엄마, 나 논어를 읽어 봐야겠어요’라고 했다네요. 그러더니 청소년용으로 짧게 편집된 논어를 읽었나 봅니다.
신영복의 묵자와 묵자의 묵자
황광우의 <철학콘서트>나 신영복의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강좌 한국철학>,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한권의 책 속에 다양한 사상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겁니다. 이런 책들은 대체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글을 쓰기도 하지요.
이런 책들을 읽고 나서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독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상이나 사상가들에 대해 뭔가 안듯한 느낌을 갖는다는 겁니다.
만약 독자가 이런 책을 읽고 나서 뭔가 안 듯한 느낌을 가졌다면 그것은 그 사상가의 생각에 대해 안 것이 아니라 그 사상가의 생각을 풀이한 사람의 생각을 안 것이겠지요.
독자가 읽은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니라 황광우가 풀이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고, 공자의 <논어>가 아니라 신영복이 풀이한 공자의 <논어>입니다.
황광우의 <철학콘서트>만을 읽고 ‘나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쯤은 알아’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있고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란 책의 제목을 아는 것이겠지요. ‘나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쯤 알아’라고 한 것도 사실은 ‘나도 황광우가 말한 마르크스의 자본론 정도는 알아’가 되는 걸 거구요.
인터넷 책방에 검색을 해 보면 정말 여러 수 십 종류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습니다.
A와 B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각각 요약하고 각색했다고 하지요. A는 집안의 반대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B는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요. 그들은 각각 자신의 생각에 따라 글을 요약하고 각색할 겁니다.
이러다 보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누군가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맛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따라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독자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바탕으로 누군가 새롭게 만든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게 될 거구요.
한마디로 묵자에게 있어서 판단의 표준은 묵자의 사회 정치적 입장을 의미합니다. 묵자의 입장은 기층 민중의 이익입니다. 그리고 기층 민중의 이익은 전쟁을 반대하고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것 교리交利입니다. - 신영복, [강의], 돌베개, 2006, 393쪽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천만번 죽었다 깨어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앞의 문장은 신영복이 해석한 묵자이지 <묵자>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겁니다.
직접 읽어보기
누군가 해석하고 풀이한 책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풀이한 사람이 원문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해하거나 일부러 왜곡하는 경우를 우려하는 겁니다. 원 저자가 명료하게 표현한 것을 풀이하는 사람이 애매하게 만들기도 하고, 원 저자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건넨 한 마디를 풀이한 사람이 얼렁뚱땅 후려치는 것을 우려하는 겁니다.
요즘 책방에 가면 독서논술이다 청소년 철학이다 뭐다 해서 짧게 요약하고 쉽게 풀이한 책들이 아주 많습니다. △△의 집에도 <논어>부터 헤겔의 <정신현상학>까지 정말 많은 책들이 있더라구요.
그 많은 책들을 보면서 갖게 된 저의 걱정은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들어보지 않은 것도 없고 읽어보지 않은 것도 없지만 제대로 읽어 본 것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 자꾸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되더라구요.
무슨 얘기 나오면 ‘어? 그거 나도 알아’하면서 으쓱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물어보면 껍데기만 슬쩍 훓고 지나갔을 뿐인 경우인 거지요. 결혼식 뷔페에서 이것저것 많이 먹기는 먹었는데 돌아서고 나면 뭘 먹었는지 모르겠고, 괜히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떠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할까요.
많은 사상들을 해석하고 풀이한 책들을 통해서 ‘아하 이런 것도 있구나’하며 그런 사상들을 소개 받았다고 여기면 될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책을 읽을 수는 없으니 소개한 책을 시작으로 원래 글로 직접 들어가면 좋겠지요.
가을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백번 듣는 것보다는 한번이라도 직접 가을 바람을 느끼고, 가을 하늘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