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춘향수절가', [춘향전], 민음사, 2012, 송성욱 옮김
변학도 부임과 수청 거부
이때 몇 달 만에 신관 사또가 부임하니 자하골 변학도라 하는 양반이라...부하 관리들이 사또를 맞이하러 간다...“또 네 고을에 춘향이란 계집이 매우 예쁘다지?”...“급히 갈 준비를 하라” - 94, 95쪽
변학도가 사또로 오면서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예쁜 여자 춘향입니다. 변학도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성욕을 내보이는 것은, 그래도 될 만한 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춘향이가 변학도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쉽게 그러지는 못했을 겁니다.
“수노 불러 기생 점고 하라.”
호장이 분부 듣고 기생 명부 들여 놓고 차례로 호명을 하는데 - 98
조선시대 국가는 직접 기생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남성 관료들의 성욕을 위해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관리했던 거지요. 앞에서는 도(道)가 어떠니 충(忠)이 어떠니 예(禮)가 어떠니 하며 고상한 척 했지만, 뒤에서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성욕을 실현했던 겁니다.
여성에게는 일부일처제와 정절을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여러 명의 아내를 두거나 기생과 성 관계를 가졌지요.
이런 남성들의 우두머리가 왕이었습니다. 왕들은 여러 명의 아내와 수 십 명의 자식을 거느리기도 했지요.
“춘향이가 기생도 아닐 뿐 아니오라 전임 사또 자제 도련님과 맹세가 중하온데, 나이가 다르다 하지만 같은 양반이라. 춘향을 부르면 사또 체면이 손상할까 걱정하옵니다.”
사또 크게 성을 내어,
“만일 춘향을 늦게 데려오면 호장 이하 각 부서 두목들을 모두 내쫓을 것이니 빨리 대령하지 못할까?” - 104
성 에너지가 춘향이를 향해 강하게 흐르고 있는 변학도. 성욕 실현을 방해하는 것들은 처벌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오늘부터 몸단장 바르게 하고 수청을 거행하라.”
“사또 분부 황송하나 일부종사一夫從事) 바라오니 분부시행 못하겠오.”
......
이때 회계 나리가 썩 나서 하는 말이
“...너 같은 기생 무리에게 수절이 무엇이며 정절이 무엇인가?...너희 같은 천한 기생 무리에게 ‘충렬(忠烈)’ 두 자가 웬 말이냐?” - 110, 111
나라에 충성하고 남성에게는 정절을 지키라고 그리 강조하던 이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그 따위 것 버리라고 합니다.
남성들이 여성에게 순결이나 정절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 아닌 다른 남성과 성 관계를 갖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순결이나 정절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남성이 대상이 되는 여성과 독점적 성 관계를 갖겠다는 겁니다.
정절 때문에 성 관계를 갖지 못하겠다는 여성에게는 그 따위 것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년 들어라. 모반과 대역하는 죄는 능지처참하고, 관장을 조롱하는 죄는 율법에 적혀 있고, 관장을 거역하는 죄는 엄한 형벌과 함께 귀양을 보내느니라. 죽는다고 설워 마라.” - 113
공권력은 공적인 권력인 것 같지만 사실을 사적인 권력입니다. 누군가의 욕망,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공권력이고 국가이지요.
춘향이 악을 쓰며 하는 말이,
“유부녀 겁탈하는 것은 죄 아니고 무엇이오?” - 113
변학도가 국가 권력을 이용해 춘향을 강간하려 하자 춘향이 강하게 저항합니다.
남성의 성욕과 국가 권력의 관계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권력을 가진 남성은 다른 남성과의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자신 원하는 여성과 성 관계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권력은 상대 여성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남성들이 권력을 가지려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성욕 실현입니다.
장자연 사건이 있습니다. 장자연이라는 배우가 강요에 못 이겨 여러 남성들과 성 관계를 가졌고, 나중에 자살을 했습니다.
누가 장자연과 성 관계를 했는지가 드러나려 하자 국가와 언론 등이 나서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억눌렀습니다. 사실을 밝히려는 이들은 처벌․보복 하겠다고 했지요. 장자연과 성 관계를 가진 남성들은 대한민국에서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은 국가와 언론 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지배계급에 속한 남성들이 성욕을 실현할 수 있도록 국가와 언론 등을 이용하지요.
지배계급 남성의 성욕 실현 도구로써의 국가
여보아라. 그년에게 다짐받아 무엇하리. 묻지도 말고 형틀에 올려 매고 정갱이를 부수고 물고장을 올려라. - 114
춘향이가 성 관계를 거부하자 변학도가 분노하며 춘향이를 때리기 시작합니다.
지배계급 남성이 자신의 성욕을 위해 국가를 동원하고 여성을 고문하는 겁니다. 내 성기를 밀어 넣을 수 없는 여성의 몸은 차라리 부셔버리겠다는 식입니다.
강한 욕망과 강한 분노.
“여보, 사또 들으시오. 여자가 한번 한을 품으면 생사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이 그리 모르시오. 계집의 모진 마음 오뉴월에 서리 치네. 넋이 되어 하늘에 떠돌다가 우리 임금 앉은 곳에 이 억울함을 아뢰오면 무사할까. 덕분에 죽여 주오.” - 123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피가 터지면서도 춘향이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다. 누구와 사랑을 하고 누구와 성 관계를 할지는 자신이 선택하겠다는 거지요.
수절이니 정절이니 하면서 여성이라고 해서 평생 한 명의 남성과만 성 관계를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성들이 여러 명의 여성과 성 관계를 하듯이 여성도 여러 명의 남성과 성 관계를 할 수 있는 겁니다. 한 명과 하든 여러 명과 하던 그것은 여성의 선택에 달린 일입니다.
재회와 어사 출도
“광한루야 잘 있더냐? 오작교야 무사하냐?”...어사또 누각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니 석양은 서쪽으로 저물고 잘 새는 수풀로 들어간다. 저 건너 버드나무는 우리 춘향 그네 매고 오락가락 놀던 양을 어제 본 듯 반갑도다. - 159
이도령이 장원급제를 하고 어사가 되었습니다. 권력욕도 이루고 부모로부터 사랑도 받은 셈이지요.
춘향이가 변학도에게 온갖 고초를 겪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이도령은 이리저리 구경도 하고 추억도 찾으며 느긋합니다.
이도령과 춘향이가 처음 만나 한 1년 동안 뜨겁게 사랑을 했지요. 이 사랑에 쏟는 두 사람의 에너지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장애물이 나타나자 두 사람이 사랑에 쏟는 에너지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드러납니다.
어머님 나 죽은 후에라도 원이나 없게 하여 주옵소서.
나 입던 비단 장옷 봉황 장롱 안에 들었으니
그 옷 내어 팔아다가 한산모시 바꾸어서
물색 곱게 도포 짓고
흰색 비단 긴 치마를 되는 대로 팔아다가
관, 망건, 신발 사 드리고
좋은 병과 비며, 밀화장도, 옥지환이 함 속에 들었으니
그것도 팔아다가 한삼(汗衫) 고의 흉하지 않게 하여 주오. - 168, 169
이도령은 극적인 등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거지 모양으로 나타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월매와 춘향을 속이지요. 춘향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팔아 이도령 옷이며 신발 등을 사 주라고 합니다.
“관청색 불러 다과를 올리라. 육고자 불러 큰 소를 잡고, 예방(禮房) 불러 악공을 대령하고, 승발 불러 천막을 대령하라. 사령 불러 잡인을 금하라.”
이렇듯 요란할 제 온갖 깃발이며 삼현육각 풍류 소리 공중에 떠 있고, 붉은 옷 붉은 치마 입은 기생들은 흰 손 비단 치마 높이 들어 춤을 추고 - 172
변학도의 생일날입니다. 큰 잔치를 벌이고 여기저기서 손님이 찾아 옵니다.
권력을 소유한 자들은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 비해 성욕을 실현하기 쉽습니다. 또한 노동하지 않고도 온갖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를 비꼬며 변학도 앞에서 거지 행색의 이도령이 시를 읊습니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반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일반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았더라. - 176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급이나 관료들이 호화롭게 입고 먹고 마시는 것들은 모두 생산자들이 애써 만든 것들을 빼앗은 것입니다.
달 같은 마패를 햇빛같이 번쩍 들어,
“암행어사 출도야.”
외치는 소리에 강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집히는 듯 초목금수(草木禽獸)인들 아니 떨랴 - 177
권력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당장에 총과 칼을 들어 죽이겠다고 덤비지 않지만 권력자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권력자는 지금이 아니라도 언제든 총과 칼을 들고 상대를 죽일 수 있으니까요. 권력은 폭력을 통해 유지됩니다.
영화 <춘향뎐> 가운데
변학도의 권력과 이도령의 권력이 충돌해 이도령의 권력이 이깁니다. 욕망과 사랑을 이루기 위한 투쟁.
권력을 가진 자만 욕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권력을 더욱 더 가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권력이 없으면 욕망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으니까요.
욕망 실현을 위한 투쟁+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
어사또 분부하되,
“너 같은 년이 수절한다고 관장(官長)에게 포악하였으니 살기를 바랄쏘냐. 죽어 마땅하되 내 수청도 거역할까?”
춘향이 기가 막혀,
“내려오는 관장마다 모두 명관(名官)이로구나. 어사또 들으시오, 층암절벽 높은 바위가 바람 분들 무너지며, 청송녹죽 푸른 나무가 눈이 온들 변하리까. 그런 분부 마옵시고 어서 바삐 죽여 주오.” - 181
큰 고통에 빠져 있는 춘향 앞에서 이도령은 변학도 흉내를 냅니다. 얼핏 보면 농담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냥 농담이었을까요? 이도령은 춘향이를 한시바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보다 정말 순결한지, 오직 나와만 성 관계를 할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줄리엣의 아버지가 자신이 가진 욕망 때문에 딸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듯이 이도령 또한 순결에 대한 욕망 때문에 춘향의 고통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은 게 아닐까요?
어사또 출도 장면은 이도령의 나르시시즘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짜잔하며 나타나서 억눌린 사람을 구원한 거지요. 곁에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이도령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나 멋지죠?’ 하는 게 아닐까요?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 받고 사랑 받는 게 좋은 거지요. 아이들이 뭔가 일을 하고 나서 엄마에게 ‘나 잘 했지?’라고 하면 엄마가 ‘응 아주 잘 했어’라고 하고, 그러면 아이가 좋아할 헤헤 웃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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