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춘향수절가', [춘향전], 민음사, 2012, 송성욱 옮김
이도령과의 만남
이때 내아(內衙)에서 술상이 나오거늘 한 잔 먹은 후에 통인과 방자 물려 준다. 술기운이 도도하야 담배 피워 입에다 물고 이리저리 거닐 제 - 21쪽
조선시대 숙종이 아버지를 남원 부사에 임명하자, 그의 아들 이도령도 남원으로 옵니다. 광한루에 놀러 나간 이 도령은 남들이 차려 준 술상으로 술을 먹습니다. 음식을 만들고 차리는 사람 따로 있고, 먹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겁니다.
술 한 잔 걸치고 얼큰한 상태에서 담배를 피워 물던 이도령의 나이 16세. 지금 만약 16세의 사람이 광한루에서 술 먹고 얼큰하게 취해 담배를 피워 물고 이리저리 거닌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지요.
청소년들의 생각이나 행동, 말투, 옷차림, 머리, 걸음걸이 등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라고 요구하는 것 말고는 모두 금지 시킵니다. 술과 담배가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청소년에게 마시지도 피우지도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냥 핑계입니다. 모든 것을 지배하고 간섭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뭔가 적당한 이유를 들이 밀어야 하겠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건강에 해롭다는 거지요. 그렇게 건강에 해로우면 성인들도 마시지도 피지도 말아야지요.
“향단아 밀어라”
한 번 굴러 힘을 주며 두 번 굴러 힘을 주니 발밑에 작은 티끌을 바람 쫓아 펄펄. 앞뒤 점점 멀어 가니 머리 위의 나뭇잎은 몸을 따라 흔들흔들. 오고 갈 제 살펴보니 녹음 속의 붉은 치맛자락 바람결에 내비치니, 높고 넓은 흰 구름 사이에 번갯불이 쏘는 듯 잠깐 사이에 앞뒤가 바뀌는구나.
......
낙포의 선녀인가 무산의 선녀인가. 도련님이 혼이 빠져 일신이 괴로우니 진실로 장가 안 간 총각이로다. - 25
이도령이 광한루에서 놀고 있는데 단옷날이라고 춘향이도 그네를 타러 나왔습니다. 이때의 그네라는 것이 요즘 동네 놀이터에 있는 작은 그네가 아니라 큰 나무에 묶여 있는 줄이 아주 긴 그네입니다.
치마를 입고 긴 그네에 힘을 주어 하늘 높이 솟았다 내려왔다 하면 치마가 흔날리고 속치마가 보이고 얼핏 얼핏 맨살도 드러났겠지요.
속옷과 맨살은 이도령을 성적으로 자극했을 겁니다. 치마->속옷->맨살->성기->성행위 쪽으로 이미 마음은 움직이고 있겠지요.
혼이 빠졌다는 것은 심리적 에너지가 한 곳으로 쏠리면서 다른 곳에 쓸 에너지가 없다는 겁니다. 일신이 괴롭다는 것은 성 에너지가 강하게 방출을 요구하지만, 당장에 방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지요.
눈은 커지고 코는 벌렁거리고 숨은 가빠지고 가슴은 쿵쾅대며 성기는 발기 되었을 겁니다.
통인이 살펴보고 여쭈오되,
“다른 무엇 아니오라 이 고을 기생 월매 딸 춘향이란 계집아이로소이다.”
도련님이 엉겁결에 하는 말이,
“아주 좋다. 훌륭하다.”
......
“들은즉 기생의 딸이라니 급히 가 불러오라.” - 26
성 에너지는 폭발할 지경이고 당장에 성 행위를 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가가서 ‘우리 한 번 할까요?'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양반이고, 나름대로 법도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자아가 욕망을 통제하는 거지요.
어떻게 하면 접근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기생의 딸이라고 하니 성욕을 실현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생각했겠지요. 만약 그 여성이 어느 대감의 아내였다면 쉽게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겠지만, 기생이라는 단어가 듣는 순간 성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여겼겠지요.
“방자야 네가 물건에는 각기 그 주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도다. 형산에서 나는 백옥과 여수에서 나는 황금이 각각 임자 있느니라. 잔말 말고 불러오라.” - 27
심리적 에너지가 온통 성 행위에 집중된 상태에서 권력을 소유한 자는 여성에 대해 이해도 존중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소유해야 할 물건이니까요.
이 같은 광한루 경치 구경하는데, 그네를 매고 네가 뛰어 외씨 같은 두 발길로 흰 구름 사이에서 노닐 적에 붉은 치맛자락이 펄펄, 흰 속옥 갈래 동남풍에 펄렁펄렁, 박속같은 네 살결이 흰 구름 사이에 희뜩희뜩한다. 도련님이 이를 보시고 너를 부르시니 내가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잔말 말고 건너가자.“ - 28
이도령이 무엇에 자극을 받고 흥분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방자가 이도령처럼 춘향이를 보고 흥분을 했다고 하더라도 방자는 춘향이에게 오라 가라 할 수 없을 겁니다. 이도령이 춘향이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대상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자기에게 오라고 명령을 하는 겁니다.
춘향 어미 썩 나 앉아 정신없이 말을 하되,
“꿈이라 하는 것이 모두 허사는 아니로다...사또 자제 도련님...양반이 부르시는데 아니 갈 수 있겠느냐. 잠깐 다녀오라.” - 29
춘향의 어머니 월매, 그가 갖고 싶었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도령이 자신의 딸을 찾습니다. 얼른 보내려고 하겠지요.
도련님 좋아라고 자세히 살펴보니 요염하고 정숙하여 그 아름다움이 세상에 둘도 없는지라. 얼굴이 빼어나니 청강(淸江)에 노는 학이 설월(雪月)에 비친 것 같고, 흰 치아 붉은 입술이 반쯤 열렸으니 별도 같고 옥도 같다...춘향이 추파를 잠깐 들어 이 도령을 살펴보니 천하의 호걸이요 세상의 기이한 남자라. 이마가 높았으니 젊은 나이에 공명을 얻을 거시오, 이마며 턱이며 코와 광대뼈가 조화를 얻었으니 충신이 될 것이라. - 31, 32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할 일이 벌어집니다. 대화 한 번 나눠 본적 없고, 서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두 사람이 거칠 것도 가릴 것도 없이 서로에게 끌립니다. 성격이 좋다거나 인품이 훌륭하다거나 공감대가 넓다거나 뭐 이런 것은 없습니다.
사흘 굶은 이가 먹을 것이 앞에 나타나면 그게 무엇이든 세상에서 제일 맛나 보이듯이, 성 에너지를 방출하려고 대상을 찾던 이들이 서로에게 첫 눈에 반하고 끌리는 것이 그리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사랑에 빠진 거지요.
사랑은 청강에 노는 학 같다느니, 천하의 호걸이라느니와 같은 환상도 일으킵니다.
하늘이 정하신 연분으로 우리 둘이 만났으니 변치 않는 즐거움을 이뤄 보자. - 32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니고 둘이 서로에게 강한 매력을 느낀 거지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의 만남을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라느니 운명적인 만남이라느니와 같은.
우연히 광한루에서 춘향을 잠간 보고 안타깝게도 그냥 보내었지. 꽃을 탐하는 나비와 벌의 취한 마음, 오늘 밤에 오는 뜻은 춘향 어미 보러 왔거니와 자네 딸 춘향과 백년언약을 맺고자 하니 자네의 마음이 어떠한가? - 49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더니...로미오와 줄리엣이 하던 일을 이도령과 춘향이가 그대로 합니다. 보자마자 끌리고, 만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결혼은 두 사람의 성과 사랑을 지켜주고 보장해 줄 수 있는 울타리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요.
내 저를 조강지처같이 여길 테니 내 부모 때문에 염려 말고 장가들기 전이라고 염려마소. 대장부가 먹은 마음 박대하는 행실 있을쏜가. 허락만 하여 주소 - 51
사랑을 이루기 위해 ‘조강지처 같이 여기겠다’ ‘부모는 염려 말라’와 같은 약속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만큼 사랑의 힘이 큰 거지요. 진심일 겁니다.
조선시대는 가부장제 사회였겠지요. 결혼은 당사자의 일이 아니라 가부장(아버지)의 일일 거구요. 가부장이 없는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그 역할을 대신하면서 자식의 결혼 문제를 결정합니다.
영화 <춘향뎐> 가운데
두 팔을 구부정하게 들고 춘향의 섬섬옥수 꼭 잡고, 옷을 공교하게 벗기는데, 두 손길 썩 놓더니 춘향의 가는 허리를 담쏙 안고,
“치마를 벗어라”
......
도련님 왈칵 쫓아 들어 누워 저고리를 벗겨 내어 도련님 옷과 모두 함께 둘둘 뭉쳐 한편 구석에 던져두고 둘이 안고 마주 누웠으니 그대로 잘 리가 있나. 한창 힘을 쓸 제, 삼베 이불 춤을 추고, 샛별 요강은 장단을 맞추어 청그렁 쟁쟁, 문고리는 달랑달랑, 등잔불은 가물가물. 맛이 있게 잘 자고 났구나. 그 가운데 재미있는 일이야 오죽하랴. - 57
16세 두 남녀가 만나 격정적으로 성 행위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 재미가 오죽하겠습니까? 그동안 쌓여 있던 성 에너지를 한꺼번에 방출하면서 느끼는 짜릿한 쾌감.
이 궁(宮) 저 궁(宮) 다 버리고 네 두 다리 사이에 있는 수룡궁에 나의 힘줄 방망이로 길을 내자꾸나 - 65
여성의 성기가 궁은 아니고, 남성의 성기도 방망이가 아닙니다. 여성의 성 기관 가운데 클리토리스는 남성의 성기에 비해 크기는 작지만 외부로 돌출되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와 관련된 표현은 성기의 생김새나 기능과 관련되어 있기보다는 남성 지배 사회를 반영한 것이거나 성 행위 때 남성이 기대하는 역할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여성은 기다리고, 수동적이며,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존재. 남성은 다가가고, 적극적이고, 들이밀고, 쏟아내는 존재.
임신의 경우도 남성이 제공한 정자와 여성이 제공한 난자가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은 밭에다 씨를 뿌리고 여성은 그 씨를 받아 키운다는 식이지요.
이팔과 이팔 둘이 만나 미친 마음 세월 가는 줄 모르던가 보더라. - 72
강한 성 에너지를 지닌 16세 남성과 여성이 만났으니 좋고, 좋고 또 좋겠지요. 세월 가는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이 함께 있는 시간은 아주 짧게 느껴집니다. 잠깐 손잡고 얘기 했을 뿐인데도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지요. 사랑에 빠진 이들이 느끼는 시간은 일을 할 때의 시간보다 빨리 갑니다.
영화 <춘향뎐> 가운데
이별
내가 올라가더라도 도련님 큰 댁으로 가서 살 수 없을 것이니 큰 댁 가까이 방이나 두엇 되는 조그마한 집이면 족하오니 염탐하여 사 두소서. 우리 식구가 가더라도 공밥 먹지는 아니할 터이니 그렁저렁 지내다가, 도련님 나만 믿고 장가 아니 갈 수 있소. 부귀공명 재상가 요조숙녀를 가리어서 혼인할지라도 아주 잊지는 마옵소서. - 75
아버지가 승진을 해서 한양으로 가게 되자, 이도령도 춘향이와 이별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춘향이는 모든 것을 이해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으니 이도령이 양반 집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말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저 이도령 가까운 곳에서 살며 언뜻 언뜻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거지요.
계급이 사랑과 결혼의 자유를 가로막습니다.
사정이 그렇기로 네 얘기를 아버님께는 못 여쭈고 어머님께 여주오니 꾸중이 대단하시더라. 양반 자식이 부형(父兄) 따라 지방에 왔다가 기생집에서 첩을 만나 데려가면 앞날에도 좋지 않고 조정에 들어 벼슬도 못한다더구나. 불가불 이별이 될밖에 별수 없다. - 75
춘향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도령 가까이 있는 것에 만족하겠다고 하는 것에 비해 이도령의 태도는 소극적입니다.
만나자 마자 열심히 성 관계를 가질 때는 온갖 것을 다 해 주고, 언제까지나 함께 할 듯이 말했던 이도령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고위 공무원이 되는 길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춘향이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는 거지요. 부모님 말 한마디에 얼른 제 뜻을 접은 겁니다.
여보 도련님, 이제 막 하신 말씀 참말이요. 우리 둘이 처음 만나 백년언약 맺은 일도 대부인 사또께옵서 시키시던 일이오니까? 웬 핑계요...모질도다 모질도다 도련님이 모질도다. 독하도다 독하도다 서울 양반 독하도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존비귀천(尊卑貴賤) 원수로다. - 76
성욕에 이끌려 춘향이에게 온갖 약속을 했지만 권력을 향한 욕망,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 앞에 그 맹세와 사랑은 힘이 약해집니다.
“날 죽이고 가면 가지 살리고는 못 가고 못 가느니”
말 못하고 기절하니 - 85
안타까워 울고불고 통곡을 하던 춘향은 결국 쓰러집니다. 사랑은 큰 행복을 주기도 하고, 큰 고통을 주기도 하지요.
내가 이제 올라가서 장원급제 하여 너를 데려갈 것이니 울지 말고 잘 있거라. - 86
춘향이가 이것저것 다 버리고 사랑을 지키려고 하고, 줄리엣이 아버지의 강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을 먹고 죽은 척이라도 하는 것에 비해 이도령은 어느 것도 손해 보지는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 권력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아름다운 계절 가랑비가 분분히 내리면 길가는 사람의 애를 태우나니, 말 위에서 피곤하여 병이 날까 염려 되오니 일찍 들어 주무시고, 아침에 바람 불고 비 오면 늦게야 떠나시며, 채찍 하나뿐인 천리마에 모실 사람 없사오니 천금귀제 매사에 부디 조심하옵소서. 녹음 우거진 서울에 평안히 행차하옵신 후 한 자 소식이나 듣사이다. 종종 편지나 하옵소서.”
도련님 하는 말이,
“소식 듣기 걱정 마라, 요지의 서왕모도 주목왕을 만나려고 한 쌍 새를 몸소 불러 수천 리 먼먼 길에 소식 전하였고, 한무제 때 중랑장 손무는 상림원 임금 앞에서 긴 비단 편지를 보았으니 흰 기러기 푸른 새 없을망정 남원으로 가는 인편 없을쏘냐. 슬퍼 말고 잘 있거라.” - 86, 87
두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면 춘향의 마음은 직접 이도령을 향해 있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하며 안녕을 빌지요. 그런데 이도령은 이별의 순간에도 온갖 중국 사람들 얘기를 꺼내며 허세를 부립니다. 양반이라는 계급, 남성이라는 성에서 나온 감정과 태도겠지요.
'성.여성.가족 > 성.여성.가족-책과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명관, <열녀의탄생> (0) | 2013.05.28 |
---|---|
변영주, <화차> (0) | 2013.04.22 |
<춘향전>, 성과 권력 - 2 (0) | 2012.07.05 |
<로미오와 줄리엣>, 성․사랑․가족 - 1 (0) | 2012.07.04 |
<로미오와 줄리엣>, 성․사랑․가족 - 2 (0) | 2012.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