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 <열녀의탄생>, 돌베개, 2009
1장 문제의 제기
우리가 알고 있는 종법제宗法制에 입각한 가부장적 친족 제도가 완벽한 형태로 정립된 것은 대개 18세기 이후다. 그것은 17세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제 형태를 드러냈던 것이다...신라 이후 친족 제도에서 부계적 원리는 일반적으로 관통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또 어떤 강도의 권력으로 관철되었는가 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 13, 14
유교적 가부장제의 성립은 곧 친족 제도 내에서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 권력의 일방적 강화, 아내에 대한 남편 권력의 강화, 딸에 대한 아들의 권력적 우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곧 남성 중심적 친족 제도의 성립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저락을 의미하였다. 유교적 가부장제는 남성이 여성을 권력적으로 지배하는 시스템의 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이전 사회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18세기 이후 사회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 - 14
고려와 17세기 중반까지의 조선 사회에서 혼인 이후의 거주 형태는 대개 남편이 아내의 집에서 거주하는 부처제婦處制가 일반적이었다. 친정에서 남편을 맞아들여 자녀를 낳고 기르는 생활 형태를 취하는 이상, 친족 내부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낮을 수가 없었다. - 14, 15
고려조에는 없었던 열녀가 조선 시대에 와서 출현한다. 열녀는 ‘열행烈行을 실천한 여성이다’. 열행은 행위 주체의 강고한 의지에 의해 일어난 모종의 인상 깊은 행위를 의미한다. 열녀의 사례에서 열행의 성격을 정의하자면, 여성이 사회적으로 유일하게 공인된(혹은 공인될) 성적 대상자(대부분은 남편)에게 자신의 ‘성적性的 종속성’을 천명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거나, 신체의 일부 또는 신체 전부를 희생하는 것(從死)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이고 잔혹성을 띤 열행의 강제는 고려 시대에는 물론 존재하지 않았으면, 그런 어휘도 없었다. 열녀라는 어휘와 이 어휘가 지시하는 여성의 행위는 조선 사회가 유교적 가부장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명된 것이다. - 16, 17
17세기를 통과하면서 형성된 부계친족 제도, 곧 유교적 가부장제는 극도의 남성 중심주의로서, 남성의 욕망을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관철시킴으로써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예컨대 열녀담론은, 남성이 복수의 여성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데 반해 여성은 사회적으로 인정된 단 한 사람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어야만 한다는 남성 중심의 성적 욕망을 윤리화한 것이었다. - 17, 18
17세기 이후 [내범內範], [규범閨範] 등 ‘내(內)’ 자와 ‘규閨’자를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여성 교육서가 무수히 출현한 것은, 바로 일상에서 여성을 남성의 욕망에 따라서 작동하는 기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윤리와 규범의 이름으로 여성이 자발적으로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위한 유일한 길은 그 윤리와 규범을 여성의 대뇌에 설치하는 것...윤리와 규범은 텍스트의 형식으로 만들어져, 흔히 교화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대뇌에 주입되었다. 텍스트의 담론에 의해 의식화된 여성은, 텍스트의 윤리와 규범의 지시에 의해 행동하게 되었다. 그 여성은 아마도 한국 사람이라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조선의 여성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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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 세뇌’야말로 이 텍스트의 제작 의도이자 수행 결과일 것이다...그 ‘여성 교양’의 존재가 이념적 세뇌와 대척적인 형태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세뇌는 ‘품위 있는 교양’의 함양이라는 우아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18, 19
지배와 이데올로기. 특정한 성격이나 정서 상태를 갖게 해서, 특정한 행동 유도.
2장 유교의 ‘이상적 여성’ 발명과 구체화의 시작
유교적 가부장제란, 부권(父權) 또는 부권(夫權)의 일방적 행사, 곧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두고 말하면, 남성의 권력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의미한다...그것은 남성의 일방적 권력 행사에 대한 여성의 순응, 즉 자발적 복종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 27
남성이 조작한 심리 체계에 따라 여성들이 행동한다는 의미는 알겠으나 자발적 복종이란 것에 대해서는...
복종이란 것은 나의 의지가 상대의 의지와 상충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내가 상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닐까? 따라서 자발적인 복종이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자발적이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고, 복종하는 것이면 자발적인 것이 아닌.
유독 고려조의 끝에 와서 여성을 전쟁과 관련시키되, 강간에 저항한 여성을 형상화하여 기념하려는 것은 전에 없던 의식이다. - 33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너희 왜놈에게 더렵혀지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의(義)를 지켜 죽겠다.” [열부최씨전]
“내가 어찌 도적놈들에게 더럽혀지랴.” [배열부전]
최 열부와 배 열부는 모두 ‘오염된다’고 생각한다. 오염되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은 죽음을 택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강간은 폭력이며, 폭력에 대한 저항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저항이 반드시 ‘오염’과 결합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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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이라는 어휘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성적 대상자, 곧 남편 이외의 남성과의 성관계를 부정한 것으로 보는 관념의 소산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유일한 성적 대상자 외의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을 바라는, (여성이 아닌) 남성의 원망願望이 강렬하게 투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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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욕망은, 자신의 성적 대상자가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갖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소멸되기를 바라는 남성의 강력한 이기적 욕망이다. - 33, 34
절부는 남편의 사망 이후 개가(改嫁)하지 않은 여성, 곧 새로운 성적 대상자를 찾지 않은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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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는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시공간에서도,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공인된 유이한 성적 대상자에게 성적 종속성을 실천하는 여성이다. - 34
최 열부는 1389년에, 배 열부는 1382년에 정려되었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행동으로 보였을 경우, 국가는 정려로 그 여성을 기념한다. 여성에 대한 정려는, 남성의 욕망이 국가 권력을 통해서 집행되고 관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부의 탄생은, 남성-양반의 욕망이 국가권력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인 것이다. - 35
아내가 사망한 뒤에도 다시 결혼하지 않는 남성을 의부라고 불렀던 것이다. 절부와 의부가 한 묶음으로 사용되었다면 여성만이 남성에 대한 수절의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니라, 남성 역시 여성에 대한 수절의 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 - 37
마치 여성의 선천적인 본성처럼 인식된 열녀의식은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 건국 이후 국가-남성의 다양한 전략을 통해서 여성에게 내면화된 결과다. - 48
고려가 망하기 불과 2년 2전인 1390년 사대부 정권은 왕에게 이런 정책을 건의한다.
공양왕 원년 9월에 도당에서 아뢰었다. “① 산기(散騎) 이상 관리의 처로서 명부(命婦)인 경우는 재가(再嫁)를 허락하지 말 것입니다. 판사(判事) 이하 6품관의 처까지는 남편이 사망한 뒤 3년까지는 재가를 허락하지 않되, 이것을 어기는 자는 실절(失節)한 것과 같이 여겨야 할 것입니다. ②산기 이상 관리의 첩과 6품 이상의 관원의 처와 첩으로서 수절을 자원하는 경우는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고 상을 내려주도록 할 것입니다. - 49
태종 6년 6월9일 대사헌 허응은 개가와 가묘(家廟) 문제 등에 관한 시무 7조를 올린다. 그중 개가 문제를 다룬 둘째조를 인용한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부인은 삼종지의(三從之義)가 있고, 다시 개가하는 이치는 없습니다.
지금 사대부의 정처(正妻) 중 남편이 죽거나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자는, 혹 부모가 뜻을 빼앗기도 하고, 혹 몸단장을 하여 스스로 시집을 가기도 하여, 남편을 두 번 세 번 바꾸기까지 하면서 절개를 잃고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풍속에 누가 됩니다.
바라옵건대 태소 양반의 정처로서 세 번 남편을 얻는 경우는, 전조(前朝)의 법에 의거해 자녀안(恣女案)에 기록하여 부도(婦道)를 바로잡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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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恣는 곧 방종하다는 뜻을 가진 말로, 자녀는 성저긍로 방종한 여성을 말한다. 자녀안은 그런 여성의 명단을 말한다. - 52
조여평의 아내 소비가 시동생 호군 조길통과 노비 문제 때문에 다투면서 서로 비난하였던 바...
조길통 : 너의 어머니가 재가하였으니 그러고도 사람이냐. - 57
성종은...예조에 이렇게 전지했다.
전(傳)에 이르기를, “신(信)은 부녀자의 덕이다. 한 남자와 결혼했으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는다”하였다. 이런 까닭에 삼종지의가 있고, 한 번도 어기는 예가 없었다. 하지만 세도(世道)가 날로 비속해지면서 여자의 덕이 곧지 못하여, 사족(士族)의 여자가 예의를 돌아보지 않고, 혹은 부모가 뜻을 빼앗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중매하여 딴 사람을 따르니, 스스로 가풍(家風)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진실로 명교(名敎)를 더럽히는 것이다. 만약 금방禁防을 엄히 세우지 않으면 淫壁한 행실을 그치게 하기 어렵다. 이제부터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사판에 끼우지 말게 하여 풍속을 바르게 하라.
성종에 의하면, 개가는 음란한 행위다. 그는 개가를 여성이 성적 욕망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여성의 성적 욕망의 해결을 음란한 행위로 판단한 것이다. - 61
7월28일 개가 금지에 찬성 의견을 올린 임원준 등도 정자의 말을 인용...
예전에 정자가 “재가는 단지 후세에 추위에 떨고 굶어 죽을까 싶어서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개를 잃는 일은 지극히 큰 문제이고,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문제다”하였다. “절개를 잃은 사람을 취해 자기 짝으로 삼으면 역시 절개를 잃은 사람이다”하였습니다. 대게 한 번 결혼을 했으면 종신토록 개가하지 않는 것이 부인의 도리입니다. - 62
태조 1년9월21일 대사헌 남재 등이 12개조의 상언을 올리는데, 그중 하나를 들어 보자.
옛날에는 시집을 간 여자는 친정 부모가 죽었을 경우 근친覲親하는 의리가 없었으니, 그 근엄함이 이러했습니다. 전조의 말엽에 풍속이 타락한 나머지 사대부의 처가 권세가의 집을 찾아다니면서도 태연히 여기고 부끄러운 줄을 몰라, 식자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원컨대, 지금부터 문무 양반의 부녀자들은 부모․친형제․친자매․친백부․친숙부․친외숙․친이모를 제외하고는 왕래를 허락하지 않도록 하여,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남재의 요구는, 여성은 부모, 남자․여자 형제, 아버지의 형제, 어머니의 남자․여자 형제를 제외한 사람은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이 조치는 사실상 여성의 활동 공간을 가정 내부로 봉쇄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남재의 황당한 제안은 [경제육전經濟六典] 예전禮典에 정식 법령으로 등재되었다. - 66
여성의 성적 일탈을 막기 위해 여성의 활동 공간을 제한하려는 의도는 세조 때 앞서 현석규가 말한 바와 같이 <원육전>, <속육전>에 실렸고, 세조대의 <경국대전>을 거쳐 성종 을사년에 완성된 을사본 <경국대전>의 형전 금제조禁制條에 실려 영원히 조선의 법이 되었다. 이 부분을 인용해 보자.
유생儒生, 부녀婦女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여승도 같다)......도성 안에서 야제野祭를 행한 자,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산간이나 물가(水曲)에서 놀이나 잔치(遊宴)를 하거나, 아제, 산천․성화의 사묘제祠廟祭를 직접 지낸 자는......모두 장 1백에 처한다. - 75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절부는 고려 때에는 효자․순손․의부義父와 한 묶음을 이루었지만, <경국대전>에서는 ‘의부’가 누락된다. 의부를 누락시킨 것은 남편의 사망, 아내의 사망 모두에 배우자를 다시 얻지 않는 것을 동등하게 표창하던 관습에서, 오로지 여성에게만 배우자 얻는 것을 금지하고 하는 가부장제의 욕망 때문이다. - 81, 82
대개 열녀는 정문과 복호로 표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복호는 원래 가호家戶에 부과된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는 것이었으나, 이 시기 복호는 전세(田稅)와 공부(貢賦)까지 면제해 주었으니, 복호를 받을 경우 경제적 이익이 매우 큰 편이었다.
가장 큰 표창은 정려였다. 정려는 충신․효자․열녀가 사는 마르에 붉은 홍살문인 정문을 세워 그 인물의 존재를 알리고 해당자의 명예를 높이는 방법이었다. - 82
<경국대전>의 규정대로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관찰사가 열녀를 조사해서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것은 민중을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관찰사 영에서 군과 현으로 조사와 보고를 요구하고, 군과 현이 그 하위 단위인 마을과 자연호(自然戶)에 대해 조사를 하고 보고한다. 이러한 과정은 효행과 절행(節行)의 실천 사례와 그것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평가가 어떤 것인지 민중에게 깊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정려와 같은 상징물로 구체화 되어 가시적으로 존재하게 되면, 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해서 흥기(興起)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효와 열과 같은 윤리를 상기하고 실천토록 유도했던 것이다. - 82
성리학은 국가를 가족의 확대된 형태로 파악한다. 즉 지배/피지배층의 관계를 가족 관계로 본다. 성리학은 가족 관계를 윤리로 결속된 상태로 규정하고, 그 확대 형태인 국가 역시 윤리적 관계의 집합으로 파악한다. 가족은 국가의 축소 형태이고, 국가는 가족의 확대 형태였다. 국가는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가부장적 질서가 왕과 신하라는 동일한 구조로 확대된 것이었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아버지와 동등한 어머니, 남편과 동등한 아내의 지위는 참으로 곤란한 것이었다. 가부장제의 정립을 위해 어머니를 아버지의 아래에, 아내를 남편이ㅡ 아래에 위치 지우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 86
남성들의 지배도구로써의 국가의 여성지배와 개별 남성의 여성 지배. 계급지배와 성적 지배의 결합.
3장 여성 의식화 텍스트의 도입, 제작과 보급
유가에서 법과 예의 대립은 유명하거니와, 유가에서 법은 정치 행위에 있어서 차선의 선택이며, 그 이전에 윤리를 피지배자에게 내면화하는 과정을 요구하였다. 유가에서 말하는 교화는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다. 다만 그것은 윤리의 이름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 91, 92
<소학>이야말로 조선 시대 여성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하고 지배했던 엄청난 무게를 갖는 책...<소학>은 성리학의 완성자 주자가 편집한 책...<소학>은 주자의 상상력으로 엮어진, 성리학이라는 철학의 교육적 연장...정치․경제․사회는 물론 개인의 극미한 일상적 영역에 이르기까지 실천의 방법을 제시 - 95
[명륜편]의 ‘명군신지의明君臣之義’의 맨 마지막 장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바꾸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라는 짧은 인용문은 원래 충신의 덕목이었고, 또 이 때문에 ‘명군신지의’에 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구는 충신이 아니라, 뒷날 여성의 개가를 불허하는 고전적 근거가 되었다. - 99
[예기禮記] <내칙內則>에서의 인용...
말을 하거든 남자는 빨리 대답하고 여자는 느리게 대답게 하며...일곱 살이 되면 남자와 여자가 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며 음식을 함께 먹지 않는다.
여덟살이 되면 문호門戶의 출입함과 저리에 나아가고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장자長者보다 뒤에 하도록 하여, 비로소 겸양謙讓을 가르친다.
...
여자는 열 살이 되거든 밖에 나가지 않는다. - 100, 101
이것은 남성 지배계급의 일생이다...남성의 생애가 나이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다면 여성의 일생은 7셍 남성과 분리된 뒤, 10세에 규방에 유폐되고, 16세에 성인식(계례), 20세(또는 23세)에 혼례를 치른다. 남성은 20세 이후 학문 연마와 벼슬 등의 지적․사회적 활동이 있으나, 여성의 일생은 결혼으로 끝이다. 남성의 일생이 다채로운 반면, 여성의 일생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 단순성은, 여성이 가정 내에 유폐되어 있으며, 여성의 일이 가사노동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물의 직조, 음식의 조리(특히 제사음식)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 102
①의 ‘느린 어투’와 ③의 ‘상냥한 말씨’, ‘부드러운 용모’, ‘명령에 대한 복종’의 대상은 남성이다. 곧 ‘부드러움’을 통해, 남성에 순종하는 여성을 규정한다. - 103, 104
[소학]은 여성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는가.
공자가 말씀하셨다. “부인은 남에게 복종하는 자이다. 따라서 독단으로 판단하는 의義가 없고, 세 가지 따르는 도(道)가 있으니(無專制之義, 有三從之義), 집(친정)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를 다르고, 남에게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 감히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 가르침과 명령이 규문閨門을 나가지 않으며 부인의 일은 음식을 마련하는 등의 일이 있을 뿐이다. - 104
규문 안에서만 생활한다는 것은 지배계급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이라는 거.
<명륜편> 67장에 명기된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다.
부인은 일곱 가지 경우 내쫓기니,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쫓기며,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며, 음란하면 내쫓기며, 질투하면 내쫓기며, 나쁜 질병이 있으면 내쫓기며, 말이 많으면 내쫓기며, 도둑질하면 내쫓긴다. - 105
<소학>의 여성에 관한 언술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을 관철시키기 위한 의도로 가득 차 있다. 여성과 남성을 분리시키는 것도 바로 이 차원에서 발생한다. - 108
<명륜편> 바부지별은 여성의 분리와 유폐를 노골적으로 말한다.
...남자는 밖에 거처하고 여자는 안에 거처하며...감히 남편의 옷걸이와 횃대에 옷을 걸지 않으며, 감히 남편의 상자에 물건을 보관하지 않므며, 감히 같은 욕실에서 목욕하지 않는다. - 108
[소학]...<명륜편> 66장...여자는 문을 나갈 적에 반드시 그 얼굴을 가리며 - 109
여성은 관료로서, 학자로서, 농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딸과 아내와 어머니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 113
여성에 관한 기본적인 관념을 제공한 [소학]의 여성 관계 기록은 거의 [예기]에서 인용된 것 - 115
세종 때 엮은 [삼강행실도]...[삼각행실도]에 부가된 그림은 문맹인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수단 - 120 ,121
세종은 개인에게 윤리적 삶을 권유한다는 차원에서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것이 아니었다. 이 윤리서는 유가 정치의 산물이다. 세종이 “윤리를 두터이 하고 풍속을 이루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의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 124
[삼강행실도] 열녀편...
‘악양자처樂羊子妻’...도둑이 들어와 시어머니를 겁탈하려고 위협하면서, 자기를 따르면 시어머니를 놓아주고 그렇지 않으면 겁탈하겠다 하니,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한다.
...
‘허승처許升妻’...도둑의 강간에 저항하다 살해된다.
‘황보규처皇甫規妻’...동탁이 겁탈하려 하자, 욕을 퍼붓고 살해된다. - 144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후한서]에서 여성-아내만의 관계를 선택하고, 그 관계의 내용을 정절로 채우거나 아니면 가부장적 가문을 위한 여성의 희생(죽음)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의 [후한서] 열녀전이 다루고 있는 다양한 여성상은 모두 폐기하였다. 유향의 [고열녀전]의 현명전․인지전․변통전에 해당하는, 지혜롭거나 사려 깊거나 지적으로 남성에 우월하거나, 통찰력이 있는 여성 또한 채택하지 않았다. - 145
[삼강행실도] 열녀편 역시 절대다수의 여성을 여성-아내와 관계에서 선택하고 있으며, 그 관계의 성격은 정절의 수호이고 그 방법은 죽음이거나 신체 훼손이 압도적이다. - 148
남편이 아닌 남성과의 성관계를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
이씨는 죽은 남편의 유해를 지고 개봉의 여관에 투숙하지만, 주인이 여자 혼자 아들 하나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숙박시키려 하지 않는다. 이씨가 날이 저물어 떠나지 않으니, 주인이 팔을 잡고 끌어냈다. 이씨는 통곡하면서 “내가 부인으로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이 손이 남에게 잡혔단 말인가? 이 한 손 때문에 내 몸까지 더럽힐 수는 없다”하고, 도끼를 가져다가 그 팔을 끊었다...[이씨부해] - 160
열행은 일상 속에서는 관찰되지 않는다. 그것은 성적 종속성의 확인이므로, 대개의 경우 성적 종속성의 실천을 위협하는 위기의 국면에서 확인된다. - 162
전쟁이라는 상황을 압도적 다수로 제시한 것은, 이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성이 어떻게 관철될 것인가라는 문제 설정과 관련이 있다. - 163
열녀편이 설정한 절대 다수의 상황은 전쟁과 남편의 죽음이었던 것...남편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설정한 것은, 유일한 성적 대상자가 부재할 경우, 여성은 어떻게 성적 종속성을 관철시킬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유일한 성적 대상자의 부재를 예고하는 위기의 국면까지 포괄하는 것...귀양...병...화재 - 164
[주처견매]와 [취가취팽]에서 주적의 아내와 취가는 남편의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혹은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인육으로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잃는다. - 166
열녀와 죽음의 결합이 드러내는 열녀편의 메시지는 곧 죽음의 권유였다. 열녀편을 통독하여 그 주제에 감염된다면 즉 의식화된다면, 스스로 죽음을 복제할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 169
강간의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의 격렬한 저항, 즉 강간에 대한 강렬한 거부의 의지와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열행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의지와 행동이 바로 열행의 핵심이다. 이 의지와 행동의 표현이 죽음의 문법인 것이다. - 169
황보규가 죽고, 남은 아내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동탁은 상국이 된 후 황보규의 아내에게 수레 1백 승, 말 20필에 보물을 실어서 맞이하려 하였다. 여자가 비통한 말로 거절의 이유를 말하자, 동탁이 폭언을 한다.
나의 위엄과 명령이 사해를 바람결에 쓰러지게 하는 판이다. 어찌 한 여자에게 이루어지지 못한단 말이냐?
여자는 모면하지 못할 줄 알고 저항한다.
너는 오랑캐의 종자로 천하에 해독을 끼치고도 오히려 부족하냐? 나의 선인은 밝은 덕이 세상에 빛났고 황씨는 문무의 높은 재주로 한나라의 충신이 되었다. 너의 아버지는 심부름하던 하관이 아니었더냐? 감히 예 아닌 일을 네 상전의 부인에게 행하려 하느냐?
예종은 이런 말로 격렬하게 저항하고, 분노한 동탁은 부인을 채찍과 회초리로 쳐서 죽인다...동탁은 예물을 갖추어 예종을 맞이하려 하지만 핵심은 예종과 성관계를 맺으려는 것이다. 동탁이 갖는 거대한 권력이 일방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힘이다. - 170
[유씨투정]에서 배륜의 아내가 설거의 난에 딸과 며느리들에게 집단 자살을 권유하면서 “우리 집은 전해 오는 가풍이 있다. 의리로 보아 뭇 도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고 했을 때의 가풍과 의리는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 171
앞의 전쟁, 반란 등의 상황에서의 죽음 외에 가장 많은 경우는 남편이 사망하여 남편을 따라 죽는 경우다. 전쟁에서의 강간의 경우 성행위를 강요하는 남자가 존재하지만, 남편의 사망은 단순히 성적 대상자의 소멸일 뿐이다...죽음으로써 다른 상대와의 성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포기한다는 의미 - 173
[부처구사]의 부모의 아내 악씨는 18세에 남편이 죽을 때 “당신은 젊으니 다음 남편을 섬기시오”라고 하자 “어찌 차마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같이 죽을지언정 홀로 살지는 않으렵니다”하고 남편이 죽자 목을 매어 자살한다. - 173
대사代死의 경우...[절녀대사]는 남편의 원수가 남편을 죽이려고 하자, 남편 대신 침사에 누워 있다가 죽음을 당한다. - 174, 175
삼종지의에서 보듯, 여성은 주체를 박탈당한 존재이며, 오로지 성적 대상자인 남성에 기생하는 존재이므로, 남편의 부재는 자신의 부재가 된다. 따라서 남편의 가치는 자신의 가치보다 선행하며,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린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 175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장수처럼
남성이 여성을 위해,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 175
[영녀절이]에서 영녀는 남편 사후 친정의 개가 강요가 두려워 머리털을 잘랐다가, 친정에서 실제 개가를 요구하자 양쪽 귀를 자르고, 다시 권고하자 코를 베어 버린다. -178
[여계]...이 책은 여성에 대한 정의->남편->시부모->남편의 형제와의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 관계는 곧 남편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는 부계적父系的 출계 조직 속에서 여성이 가져야 할 의식과 실천을 말하는 것
...
먼저 1장 [비약]의 서두를 인용해 본다.
옛날에는 딸이 태어난 지 3일이 되면 침상 아래 누이고...여아를 땅에 눕히는 까닭은 여자는 낮고 유약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의 아래에 처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 183
“낯빛과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여 남편을 섬기고, 스스로를 맑고 깨끗하게 가다음어 웃고 노는 일을 멀리하며, 술과 음식을 청결하게 마련하여 조상을 받들어야 하니, 이것을 ‘제사를 잇는다’고 하는 것이다.” [여계]는 남성의 하위자로서의 여성이 가부장적 조직 내부에 유폐된 채, 부계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의례 행위, 곧 제사에 관련된 노동을 희생적으로 맡아야 함을 주장한다. - 185
[여계]...남편과 시집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저항할 경우 폭력도 용인된다.
남편을 무시하는 것이 정도를 넘어서면 꾸지람을 듣고, 화내는 것이 그치지 않으면 회초리를 맞는다. - 85, 186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 한씨가 엮은 [내훈]內訓...
대저 남자는 호연한 일에 마음을 두고 놀며, 미묘한 여러 이치를 음미하여 스스로 시비를 구별해 내어 자신을 지킨다...여자는 그렇지 않다. 단지 짜는 베의 굵고 가는 것만을 알 뿐이고, 덕행이 구름처럼 높은 줄을 알지 못한다. - 186, 187
[소학]을 읽음으로써 사대부들은 다른 피지배자와 자신을 분리시키고 구분하는 에토스를 획득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다시 여성과 자신을 구분하는 근거를 얻었다. 이제 남성-사대부는 성리학과 중국의 고전을 통해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얻는 동시에 현실에서 여성과 남성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여성의 성 역할은 무엇인가, 여성의 일생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 193
12년 3월24일 성종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동방은 정신貞信하여 음란하지 않다고 소문이 났는데, 근자에는 사족의 부녀 중에도 혹 실행하는 자가 있으니 내 심히 걱정스럽다. 언문으로 된 [삼강행실도]의 열녀도烈女圖 약간 질을 인쇄하여 서울의 오부와 제도에 반사하고, 시골 마을의 부녀자가 다 강습할 수 있게 하라. 그러면 아마도 풍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217
예조가 보고한 대책은 이렇다. 서울은 종친․재추宰樞, 벌열의 집안은 물론 한미한 가족이라도 모든 가족이 모여 거주하므로 가장이 열녀편을 직접 가르칠 것, 지방은 흩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니 명망 있는 촌로가 교육을 담당할 것이 결정되었다. - 218
중종의 말을 들어 보자.
[삼강행실도]는 다른 책의 예와 다르니 여항의 백성도 모두 알게 하고자 한다. - 226
유교 국가는 국가의 체제와 전례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국민의 유가에 의한 의식화를 겨냥한다. 피지배층에 대한 통치는, 폭력이 아니라 유가적 윤리의 ‘교화’라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말하자면 유가의 이데올로기를 윤리의 이름으로 피지배층에 내면화함으로써 자발적인 그리고 항구적인 복종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 235, 236
폭력 없이 이데올로기만으로 지배 가능? 국가는 폭력의 사용을 기본으로 하면서 이데올로기도 이용. 이데올로기가 효과가 없게 되면 적극적으로 폭력 사용.
건국 이후 약 1백 년 동안 국가가 주도한 출판 정책으로 쏟아져 나온 책들은 좁게는 지식계급, 곧 사대부 계급을 탄생시켰고, 거시적으로는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유교 국가의 탄생은 출판과 출판물의 유통으로 가능했다. - 236
책 때문에 유교 국가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국가를 만들고,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 책을 만들어 퍼뜨린 것은 아닐까?
[삼강행실도]와 그것의 언해본은...조선이라는 유교 국가가 피지배층을 의식화, 교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이것은 한국 역사 이래 국가가 민중에게 쥐어 준 최초의 책이었다. 이전까지 책은 오로지 지배층의 것이었다. - 236
제4장 열녀의 발생과 그 성격의 변화
남편이 사망했을 때 여성이 유가적 장의와 제의를 실천하는 것은 조선 초기에는 분명 드문 현상이었을 것이다...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3년을 보낸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는 자기 가학적 행위로, 이것은 열행 문법의 하나다. - 257
세종에서 중종․명종으로, 즉 후대로 갈수록 열녀가 죽음과 결합된 경우가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274
외적 강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망에 순수하게 자발적 의지로 죽는 것을 종사從死라고 하는데, 이 종사형 자살이 점차 증가 - 277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여성이 손가락을 끊어서 약으로 쓰는 신체 훼손이 점차 증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열녀서사들은 모두 남편의 병이 완치되거나 치유의 효과가 높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다시 민간으로 퍼져 단지의 풍습을 더욱 조장했을 것이다. - 281
선조는 1592년(선조25) 4월30일 서울을 떠나 이듬해 10월1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입성 하루 전 비변사는 왕이 도성에 들어가는 것을 사방에 알리기를 청하면서, 충신․효자․열녀의 포상을 건의한다...충신․효자․열녀를 발굴, 표창하는 일이 최우선이 된 것은, 전쟁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차원 이상의 행위였다...이것은 윤리의 회복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양반의 지배체제의 공고화, 곧 가부장적 질서를 세우기 위한 필수적인 과업이었다...전쟁으로 인한 윤리의 붕괴는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 충․효․열의 사례를 찾아내어 정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 293~295
열녀의 죽음은 깊은 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판서 임국로의 처 정부인 한씨는 남편이 죽자 10년 동안 소복을 입고 소식을 한다. 아들 임취정이 광주 목사가 되자 임지로 따라가지 않으며 ‘죄인’을 자처한다. 그리고 처마와 기둥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 죄인으로 자신을 유폐한 것이다. - 310
일단 단지가 유행하자 단지는 다양한 형태로 변이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잔혹성이 증가하고 있었다 손가락은 대개 칼이나 도끼 등으로 찔리거나 절단되었지만, 이 자료군에서는 돌로 손가락을 쳐 짓이겨 피를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 314
병자호란...청군은 강간보다는 부녀자 납치를 선호했다. 그들은 납치한 사람을 모두 전리품으로 보았고, 돈을 받고 포로로 교환하고자 했다. 이것이 대량의 열녀가 발생하지 않은 이유다. - 337
피로被虜 여성-오염된 여성에 대한 억압...대규모의 피로자는 희한한 문제를 제기했다. 즉 부녀자가 속환되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전쟁 발발 약 1년 뒤인 인조 16년3월11일, 장유가 자신의 아들 장선징과 며느리를 이혼시켜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즉 며느리가 강화도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국해 친정에 있는데, 아들의 짝으로 인정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을 수가 없으니, 이혼을 허락하여 아들이 다시 결혼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 339
장유의 요청은 사대부들의 내심 찜찜하게 생각했던 바로 그 부분을 일깨운 것이었다...이 사건을 기록한 사신의 견해를 들어보자...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이것은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변고에 임해 죽을 수 없었으니, 또한 절의를 잃지 않았다 할 수 있겠는가. 절개를 잃은 뒤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다. 결코 억지로 다시 합쳐서 사대부의 기풍을 더럽힐 수는 없다. - 340, 341
5장 임병양란 이후의 여성 의식화 텍스트
송시열 이렇게 말한다.
...
시부모 꾸중하셔도 내 일이 그른 때 꾸중하신다 하고, 사랑하셔도 기뻐하여 더욱 조심하고, 내 부모 집에서 보내는 것 있거든 봉한 대로 시부모 앞에 풀어 드리고, 덜어 주시거든 사양 말고 받아 간수하였다가 다시 드리고, 내 쓸데 있거든 시부모께 다시 아뢰고 쓰라. - 402, 403
한원진이 말하는 과잉의 책벌이란 다름 아닌 고부갈등에서 벌어지는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언어적. 육체적 폭력이다.
...
그 일이 혹 지나친 경우가 있다 해도 그 마음은 실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미루어 나간 것일 뿐이다. 며느리가 된 사람이 이미 자기를 낳은 생부모와 시부모를 다르게 보기 때문에 도리어 이 일로 시부모의 마음을 거꾸로 헤아리고, 그 교훈과 책벌이 자애에서 나오지 않고, 허물을 꾸짖는 데서 나온 것이라 의심하여 분노를 품고 원망을 쌓으며 갈수록 더욱 패역悖逆을 일삼아... - 404, 405
제사는 단순히 죽은 사람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종법을 의례적으로 실천하여,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나의 부계출계 집단의 성원으로 동등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아울러 집안의 공적 영역의 모두에 의미 있는 체계를 규정한다. 제사는 곧 한국 사회에서 부계적 양식을 부과하는 도구로, 조선 전기 사회 변화의 중요한 동인인 것이다. - 414
일반적으로 19세기에 와서 여성이 창작하거나 감상, 유통시킨 가사를 규방가사라고 한다. - 421
[여행록]은 시부모와 며느리, 보다 정확하게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과 시어머니의 일방적 폭력의 실상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나는 주려 배고프고 남은 주려 배부를가
동지섣달 설한풍에 나는 벗어 여름이오
동지설상 엄동시에 남은 벗어 양춘인가
행위로도 하거니와 말씀으로 더 심하다
칼보담도 심한 말로 남의 마음 독히 찔러
죽을 마음 나게 하니 짐승이나 다름 있나
맹수 독가 같은 것도 제 새끼는 아끼건만
부부일신 된 며느리 내 자식이 아닐런가
어찌하여 그대도록 몹시 하고 몹시 하나
_임기중 편, [역대가사문학전집](8), 동서문화사, 1987, 319~320면
...
[여행록]은 시어머니의 다양한 폭력 행위를 이렇게 나열한다. “밥 주면서 수저 뺏기, 겨울 밥에 냉수 붓기, 침선 후에 뜯어 놓기, 이는 쌀에 모래 붓기, 천신만고 사른 불을 물 퍼부어 꺼놓기, 짜는 베에 사침 뺏기, 빨래한 것 땅에 밟기, 주던 밥 도로 빼앗아 개구녁에 들어붓기” 그런가 하면 조그만 실수를 남편에게 고자질하여 구타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 427, 428
가부장제의 폭력을 해체하기보다는 그 폭력에 순종하며 폭력을 회피할 것을 권유하는 것 - 433
대개 혈연 관계가 있는 자식이 부모 또는 조상의, 더 드물게는 자매의 효행이나 열행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 행록을 만들고, 서문이나 발문을 유명인에게 구하는 풍조가 유행...이런 효행과 열행에 대산 선전은 곧 양반 사회 내부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김조순의 말처럼 근거 없는 효행과 열행까지도 선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충만했던 것 - 466
6장 열녀의 탄생
허씨 집안은 4대에 걸쳐 열녀 7명이 나왔던 바, 그중 4명이 죽음으로 열녀의 칭호를 얻었다. 죽지 않은 3명 역시 단지, 할고와 같은 극단적인 신체 훼손으로 열녀로 인정받았다. 한 가문에 열녀가 족출하는 것은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대를 이어 열녀가 출현하는 것은 열녀 이데올로기가 더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492, 493
양반 지식인은 어떤 형태의 죽음이건 남성을 위한 여성의 희생, 그것이 할고든 자살이든, 또 자식을 남기고 죽든 아니든, 늙어서 죽든 젊어서 죽든, 그 죽음의 이유가 아무리 비이성적인 것이라 해도 모든 죽음을 찬미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을 확산시킨 주요인이었다. - 495
7장 열녀담론에 대한 비판과 한계
윤시동은 열녀의 표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행은 남편의 3년상 안에 죽은 사람에 대해 으레 정문을 세워 포상하는 일이 많으니, 이 역시 신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이런 일들의 남잡함이 요즘과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 523, 524
급기야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오면 열녀에게 정문을 내리는 데도 돈을 받았다. - 527
정약용의 비판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윤리적 통치가 분비한 모순을 지적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과격하고 비합리적인 윤리의 실천을 자제하고, 국가의 조장을 멈춤으로써 이전의 지식인들이 고민했던 유가적 윤리 내부의 모순적 충돌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멈춘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열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정약용은 여성을 죽음으로 치닫게 한 남성에 대한 종속성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535, 536
'성.여성.가족 > 성.여성.가족-책과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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