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농민봉기와 국왕에 대한 충성

순돌이 아빠^.^ 2013. 7. 8. 10:05

1358년에 폭발한 프랑스의 쟈끄리...그들의 봉기는 단순히 개별 장원영주를 겨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귀족계급 전체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전쟁으로 해석된다. 농민들이 보기에 귀족은 특권계급이자 전사집단으로서 농민의 보호라고 하는 고유의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수탈하기만 하는 도적 같은 존재로 비칠 뿐이었다. 성채는 바로 그러한 자들의 소굴이자 억압의 근거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장원의 문서들을 불사른다든가 혹은 또다른 봉건적 지배 세력인 교회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례는 쟈끄리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국왕에 대해서는 농민들이 대단한 충성심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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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년 영국의 농민봉기는 이처럼 철저하게 反봉건적 양상을 보였다. 봉기 농민들은 봉건지배체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적, 물적 요소에 폭력을 가함으로써 그에 대한 거부의사를 분명히 표출됐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왕에 대한 반감이 거의 표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될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지향성을 강하게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자들은 국왕에 대한 복종심과 아울러 자신들의 고역을 그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내내 견지하고 있었던바

- 윤승준, '중세 말 근대 초 유럽 농민봉기의 성격에 대한 예비적 검토',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5-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



농민군측에서는 민씨정권을 타도한 뒤 어떠한 정권을 세우려고 구상하였을까. 대원군은 바로 이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농민군은 4월16일 영광에서 발표한 통문에서 “우리가 오늘 의거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국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하게 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존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호하며, 이로써 부자의 천륜과 군신의 대의를 온전히 하여 난신적자가 자연히 사라지게 함”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농민군은 국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면서 대원군의 정권장악을 주장하였던 것
- 박찬승, '1894년 농민전쟁의 주체와 농민군의 지향',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5-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




왜 그랬을까? 귀족은 공격하면서 왜 귀족의 우두머리인 왕에 대한 투쟁을 벌이지 못했던 걸까? 프랑스에서도,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의 농민들도...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권위에 복종하는 정서 아니면 두려움이었을까? 이데올로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