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기에 문제의 관건은 농민이 무엇-공리인가 또는 도덕인가-을 추구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사유 매커니즘으로 그것을 인식하고 추구했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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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민공사시대 광시 농촌에서 이런 현상을 목격했는데, 농민은 실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신기술에 대해 항상 시험해 보길 좋아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농민은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에서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하면 곧바로 농민은 자기는 ‘그럴 팔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재시도를 거부하며, 객관적으로 실험과정을 분석하여 논리에 합당한 실패원인을 찾아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논리와 실증의 각도에서 보면 분명히 성립될 수 없는 일에 대해 농민은 오히려 조상과 신령의 보호라는 모종의 주관적 정서를 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계속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면서 실패 원인을 ‘경건한 정성’의 부족 탓으로 돌린다. 이런 시험의 목적은 객체의 속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상당한 정도로 주체의 운명과 정성을 검증하는 데 있다. 따라서 경험을 중시하는 농민 집단에서 미신이 동시에 성행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농민집단에서 주체의 개체화는 거의 발전하지 못하고 인식활동은 상당한 정도로 공동체의 정서에 기초하고 있다. 가치판단, 곧 “그래야 하는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판단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실판단, 곧 “이다, 아니다”라는 판단도 공동체의 제약을 받아야 했다. 농민의 심리과정 속의 집단적이고 감정적인 성질은 상당히 두드러져서, 협소하고 분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종법집단에서는 집단표상이 개인의 정신보다 강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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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상황 아래서 집단표상과 그 상호 연관의 힘은 이처럼 커서, 감지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증거도 그것과 대항할 수 없으며 현상 사이의 아주 비정상적인 상호관련성은 흔들릴 수 없는 신념이 된다. 이런 상황 아래서는 감정과 격정의 요소는 진정한 사유가 어떤 우세도 점하지 못하게 하며, 따라서 인간의 사유 속에 적나라한 사실과 실재의 객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이런 사유에서는 객체의 속성이 집단표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표상이 객체의 속성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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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표상은 상호침투로 추상을 배제하고 감정으로 논리를 배척하고 심상으로 개념을 배척했기 때문에, 종법농민의 사유방식은 개념에 근거하여 감지한 재료를 정리하고 논리적 순서에 따라 해석하는 능력을 결여했다. 그들은 흔히 모순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논리적 오류를 발견하고 경험을 통하여 오류를 교정하거나 거짓을 증명하여 사유를 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추동력을 상실했다. 중국 후한 말 농민들 사이에는 상서로운 물과 주문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태평도가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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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표상 또는 집단무의식도 어느 개인-일반적으로 공동체의 대표자인 천연수장-에 대한 맹목적·초논리적·초경험적인 숭배를 야기함으로써 경험이 우상파괴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유에서는 천자는 현명하다는 신앙과 도처에 이재민이 가득한 현실 사이에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고, 현실의 고난은 간사한 소인이 천자의 총명을 가린 결과로 간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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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공동체에 대한 의존이 공동체 성원의 천연수장에 대한 의존의 전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이지理智의 집단표상에의 종속도 대중이지가 천연수장의 의지意志에 종속되는 기초이다. 후자는 종법농민 비이성의 세 번째 측면, 곧 상부에 절대 복종한다는 사유방식을 구성하는데 이때 이른바 ‘상부’는 당연히 당국만이 아니라 대형, 장자掌家, 채주, 단주와 농민 영수 등을 포괄한다.
신비주의 비이성은 표상 속의 임의 관련을 통하여 “모든 좋은 것은 카리스마 영수의 공이고, 모든 나쁜 것은 마귀의 화신 탓으로 돌리는” 사유양식을 형성했고, 그로 인해 권위숭배의 심리적 매커니즘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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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1476년 독일의 예언자적 선동가 한스는 성모의 이름으로 “이후 다시는 황제·제후·교황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선언하고, 자칭 성모가 보낸 사자라고 주장하며 3만여 농민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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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국가에서 이성의 해방은 결국 민주혁명이라는 거시적인 진행과정의 일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민주도 이성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의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충분히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 있어야만 비로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고, 마음 속에 내재하는 심리과정이 자신의 개성을 확립할 수 있게 해야만 외재적인 권위에서 벗어나 그 개성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반드시 개인의 의지가 집단표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하며, 추상력과 논리분석 능력에 기초한 주체의 개체화를 전제로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집단표상이 지배하는 상황에서의 민주는 단지 군중성 히스테리의 일종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바로 전제주의와 상호 보완한다.
- 글출처 : 친후이·쑤원, <전원시와 광시곡-농민학에서 본 중국의 역사와 현실사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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