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밀애>를 다시 봤습니다.
“지리멸렬”, 김윤진과 이종원의 결혼 생활에 꼭 적합한 말인 것 같습니다.
부부가 꼭 사랑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싶은데...아무튼 김윤진 부부에게도, 이종원 부부에게도 사랑은 없거나 희미한 것 같아요.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헤어지는 것도 아니구요. 서로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를 애틋이 감싸거나 아껴주는 것도 아닌 채로 살아가요.
많은 부부가 그런 것 같아요. 사랑을 꿈꾸며 만났지만 사랑은 점점 희미한 추억이나 헛된 환상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지요. 사랑이란 것을 마음에 떠올리기엔 아프고, 찾기엔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런 부부와 그런 결혼이 어쩌면 평범하고 정상(?)인 것인지도 모르구요.
정상(?)이 아닌, 그러니까 결혼이나 부부 속에서 설레는 사랑을 찾고 다정히 쓰다듬는 손길을 기다린다면...제 정신이 아니거나 철이 없거나 어이없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구요.
바람이 나무의 어깨를 쓰다듬어요. 나무들이 파릿하니 몸을 떨구요. 김윤진이 이종원의 손길을 떠올려요. 몸이 꿈틀대고 가슴이 아리지요.
결혼도 했고 애도 있는 여자가 그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구요? 그러면 결혼도 했고 애도 있는 여자는 열심히 밥이나 하고 애 뒷바라지나 하며 사랑도 설렘도 없이 그렇게 세월 보내다 죽어야 하나요?
결혼도 했고 애도 있으니 사랑 타령일랑 집어치워야 하는 게 아니라, 결혼도 했고 애도 있지만 사랑도 설렘도 없으니 결혼을 집어치우는 게 더 나은 건지도 모르지요.
애를 생각해서 그러면 안 된다구요? 엄마가 매일 같이 두통에 머리가 아파 약을 먹고, 아이는 엄마가 또 아플까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걸까요? 어쩌면...김윤진이 남편 아닌 이종원을 사랑했기 때문에 딸을 더 많이 쓰다듬고, 딸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몰라요.
자식은 밥만 먹이고 옷만 입히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자식에게 필요한 것이 밥과 옷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에요. 웃으며 얼굴을 쓰다듬고 따뜻하게 껴안으며 격려와 용기의 말을 건네고 가만히 귀 기울이는 그런 마음 또한 필요할지도 몰라요.
엄마의 마음이 늘 우울하고 엄마가 늘 머리가 아파서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면, 언제 어떻게 아이에게 웃음과 편안함을 건넬 수 있을까요. 엄마의 마음이 행복하고 즐거워야 아이에게도 그런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거에요.
김윤진이 이종원과 떠나서 둘이 살면 잘 살았을 거냐구요? 그거야 모르지요. 이종원이 말했잖아요. 우린 이미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고, 잘 안 될 수도 있다구요.
어차피 사는 건 다 같으니, 괜히 일 벌려서 이 사람 저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그냥 눌러 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달라요.
어차피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거니까 괜히 일 벌려서 이 고생 저 고생 하지 말고 그냥 지금이라고 콱 죽어버려야 할까요? 아니면 어차피 죽을 거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살아 있는 동안 조금 더 기쁘고,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생기 있는 삶을 찾아보는 게 좋을까요?
때론 경찰이나 법보다 다른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손가락질이 더 아프고 무서울 때가 있어요.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을 기원하기보다는, 헐뜯고 비난하고 조롱하길 잘하는 사람들이지요. 물론 그 사람들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존재일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날카롭고 쓰리게 아픈 상처를 안기는 사람일수도 있구요.
김윤진은 하릴없이 누군가를 욕하거나 씹어돌리지 않아요. 오히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은연을 감싸줘요. 남편을 피해 도망가는 은연에게 편지를 하라고 하지요. 은연도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해요.
나쁜 년이고, 이기적인 년이고, 바람난 년이고, 제 정신 아닌 년이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껴주지 않는 은연을 위로하고 아껴주는 거에요. 나쁘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고 바람나지 않고 제 정신인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여자의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는 거지요.
사랑하지는 않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결혼을 유지하는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삶을 선택하려는 사람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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