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초조하게 임신테스트기를 바라보던 어느 날 오후, 두 개의 붉은 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붉은 선은 ‘너의 삶은 이제부터 정지될 예정’이라고 선고하는 것 같았다. 예감은 실제였다. 임신중절수술 후 몇 개월 동안 두통과 복통, 외로움과 배신감에 떨었다. 내 몸속에 정자를 배출한 애인은 사회 정의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겠다며 갑자기 연락이 되질 않았다. - 5
‘콘돔은 있어? 없으면 섹스는 안 돼’ 다음엔 꼭 이렇게 말해야지 다짐했지만 번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섹스를 했다.
그렇게 불편한 섹스를 하면서도 나는 왜 불편하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섹스할 때 내 고통이나 걱정, 불안, 피임, 임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라고 느꼈다. - 158
섹스와 임신은 둘이 함께 했는데 이 고통에서 왜 나는 혼자일까. 그는 낙태한 내가 부담되어서 도망갔다. 그는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렇게 한다. 수많은 여성이 이렇게 방치되어왔을 것이다. 사회는 영아를 유기한 여자를 손가락질하고, 자기 배 속의 태아를 낙태시킨 여자를 살인마라 부른다. 거기에 남자들은 없다. - 182
- 홍승희, <붉은 선-나의 섹슈얼리티 기록>, 글항아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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