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보자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멎었다. 낯선 남자의 출현에 그들의 표정은 불신으로 굳어졌다. 머리 끝에서 발치까지 그들의 태도는 돌연 방어적으로 변해, 단단히 여민 블라우스 섶을 손으로 불안스럽게 움켜잡았다. 공포가 그들의 핏속에서 출렁거렸다. 수 세기 동안 사라센인들로 이루어진 코르세르 해적은 이슬람 국가 정부의 묵인 아래 이 아프리카에 면한 크레타 해안을 기습하여 기독교인들의 양과 여자와 아이들을 노략질하지 않았던가.
...
나는 겁에 질린 소녀들이 마치 넘볼 수 없는 방벽을 이루려는 듯 서로 몸을 꼭 붙인 채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옛날엔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지금은 이유 없이 반복하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과거의 필요가 여전히 그들의 행동 리듬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 49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 책들, 2019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연쇄살인범 까불이가 동백의 가게 벽에 까불지 말라는 위협의 글을 남깁니다. 동백이 까불기는 뭘 까불었다는 건지 졸라 열 받아요. 이런 씨댕이!!!
아무튼 그 글을 보고 나서 동백은 아들 필구를 찾으러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저기 길 한 켠에 어느 술 취한 남자가 널부러져 있습니다. 동백은 길을 가다 망설이고 겁을 먹고 움츠러들고 용기를 내려합니다. 그냥 길을 가는데도 겁을 먹고 움츠러들고 용기가 필요한 겁니다. 어찌나 손을 꽉 쥐었던지 땀이 한 가득입니다.
크레타의 소녀들처럼
옹산의 동백처럼
오늘도 많은 여성들이
겁을 먹기도 하고
조심하기도 하고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혹시나 하기도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한 채
길을 걷고 있겠지요
남성들의 그런 폭력이 없었더라면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두려움과 위축감입니다
그녀들의
몸짓이나 행동
감정이나 생각 하나하나에
여성들이 살아온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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