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예술과 함께

나이 들며 더 좋아지는 바흐

순돌이 아빠^.^ 2023. 3. 5. 12:01

피아노 수업 시간에 바흐의 곡을 공부중이에요

샘 : 나이가 들수록 바흐가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순돌이아빠 : 저도 그래요. 어제 낮에 요 옆 공원에서 순돌이와 산책을 하면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들었어요

샘 : 그 곡도 너무 좋죠?

순돌이아빠 : 조용한 공원에 햇살을 환하게 비추고 바흐의 음악이 나오니 정말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더라구요

샘 : 맞아요. 정말 그럴 거에요

순돌이아빠 : 그렇다고 베토벤이 덜 좋아지는 게 아니라 베토벤은 베토벤대로 더 좋아지고, 근데 바흐는 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더라구요

샘 :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공감해요 ^^

https://youtu.be/0xW-dH0a23s?list=PL3U0S8lpDeK7dqgWS6aoSMe-TaeczQnuI

András Schiff, J.S. Bach: The Well-Tempered Clavier

그래서 오늘은 같은 공원에서 순돌이랑 산책을 하며 생각을 해봤어요. 왜 나이가 들면 바흐가 더 좋아지는 걸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걸 아니지요. 나이가 들수록 임영웅이 좋아질 수도 있고, 최백호가 좋아질 수도 있는 거니까요.

다만 적어도 샘과 저는 그런 것 같아요.

구체적인 것에 대한 피로감, 힘겨움

저보다 나이도 많고 학원도 더 오래 다니신 60대 한 분이 있어요. 그 분이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라구요.

사람들과 어울리면 자꾸 남 흉이나 보고, 또 혼자 있으면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드는데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그래도 마음이 편안해요.

제가 직접 들은 말은 아니지만 무슨 말씀인지 바로 알겠더라구요

순돌이와 산책 중에 만난 오래된 나무와 햇살

그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이든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살잖아요. 돌아보면 후회도 되고 자신을 한탄하기도 하고. 

그러니 또다시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피하고 싶을 거에요. 좋고 나쁨도 아니고, 옳고 그름도 아니고 그냥 피하고 싶은 거지요. 

게다가 이제는 좀 편안하고 안정되고도 싶구요.

그런 면에서 바흐의 음악이 도움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https://youtu.be/_JpXlliAn2I

shubert, serenade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나 엘가의 사랑의 인사도 좋아요. 마음이 많이 울컥하기도 하고 그러지요.

그만큼 흔들림도 많다는 거구요.

여전히 뜨거운 사랑 시절을 추억하지만, 곧 차가운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도 알게 된 거겠지요. 

그래서 어떤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특별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것들보다 조금은 추상적인 것들이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지난 인연들로부터 잠시 떠나온 듯한.

소리 그 자체만으로도

샘한테 그런 얘길 했어요.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구체적인 메시지가 있지 않아도 소리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 같아요.

고흐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면 정말 마음이 쿵해요. 이것이 해바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색깔이.

노란색도 그냥 노란색이 아니라 고흐의 노란색이 주는 강렬함이 있는 것 같아요.

고흐

이 색으로 해바라기가 아니라 밀밭을 그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이 밭이 밀밭인지 보리밭인지보다는 그 노란색이 저를 더 흥분시켰는 거지요.

바흐의 음악에 그런 게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선율도 너무 아름다워요. 그리고 선율뿐 아니라 그 소리만으로도 아름다운 거지요. 

선율이란 건 그 하나 하나의 소리들이 어울렸을 때 일어나는 일 같아요. 고흐가 붓질을 하나 또 하고 해서 쌓이면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지듯이 말이에요. 

비어 있는 것들 속에서

노자가 그랬던가요.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 쓸모가 생긴다고.

바흐의 음악에서 소리와 소리 사이에 비어 있는 순간이 좋을 때가 많아요. 

신기하죠? 음악이란 게 소리를 통해 듣고 느끼는 건데 소리가 비어 있는 순간이 좋다니 ㅋㅋㅋ

너무 모든 것이 꽉 차 있으면 부담스럽잖아요. 적당히 비어 있으면 여유도 생기고 숨 쉴 공간도 생기고, 가만히 한 소리 한 소리 느껴볼 수도 있고.

순돌이와 산책을 하다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강아지를 옆에 앉혀 놓고 의자에 앉아 햇살 쬐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언제는 그 자리도 비어 있었겠지요. 그리고 지금은 나이든 그분들에게 쉼의 자리가 되었을 거구요. 

음과 음 사이가 비어 있음으로 해서 잔향이나 울림 같은 것도 생기는 것 같아요. 

피아노 건반을 힘으로 냅다 두드리는 것보다 건반을 누르고 나서 살짝 힘을 빼주듯 하면 소리가 더 울려서 멀리날아갈 것 같듯이 말이에요.

사람도 그렇잖아요. 지지고 볶고 난리를 피우며 함께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그 사람과 멀어지고 나면 새롭게 떠오르고 느껴지는 게 있어요.

아…그랬구나…아…왜 몰랐을까…아…그렇게 할 걸…

https://youtu.be/zEHXTrJb3HQ?t=0

Bach - Cello Suite no. 5

그렇게 비어 있는 것들을 채우며

새로움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