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리아는 한국에도 2번 왔었던 사람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글을 쓰고 있구요. 오늘은 자카리아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일행 중에 환자가 생겼습니다. 미연이가 어제부터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더니 얼굴 한쪽에 염증이 생겼는지 아파서 잠을 잘 못 잤다고 합니다. 다행히 자카리아가 아는 치과 의사가 있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자카리아와 셀림과 미연이가 엑스레이를 찍어간 사이 저만 치과에 남아서 의사인 아메르와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치아 건강 문제가 많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차를 마실 때 설탕을 많이 먹으니깐요.”
“음...... 차에는 오히려 불소가 들어 있구요,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돈이 없다는 거에요.”
순간 질병 발생의 원인 가운데 큰 부분이 사회 제도와 계급 등의 문제라는 것을 먼저 떠올리지 못했던 제 머리가 쿵!
생각을 바꿔라
오늘 자카리아를 만나들은 얘기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계속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을 폭파 시킵니다.”
“왜 이스라엘이 집들을 파괴 하나요?”
“첫째 이유는 총이나 활동가들을 찾는다는 것도 있구요, 다른 이유는 생각을 바꾸라는 겁니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죠. 더 이상 희망은 없고, 우리에게 대항해 봐야 피해만 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례에서도 늘 들어왔던 얘기입니다. 공포를 줌으로써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려 시도한다는 것.
“이스라엘이 올리브 나무를 계속 베어내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점령촌 사이를 잇기 위한 도로를 만들려고 그러는 거구요, 또 하나는 군사용으로 가시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베어내는 경우도 있구요, 다른 하나는 만약 누군가 돌을 던지거나 총을 쏘거나 했다면 보복 차원에서 그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올리브, 이곳에 오면 참 익숙한 나무입니다. 어딜 가나 올리브 나무가 있고 올리브 기름에, 올리브 비누, 올리브 짱아찌도 있으니까요.
사진 1 자카리아
“라말라는 다른 도시에 비하면 그나마 상황이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최근 5년 동안 인구가 2배로 늘어났습니다. 제닌이나 나블루스에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왜요?”
“인티파다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아침에 라말라로 와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그랬는데, 인티파다가 시작된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봉쇄가 심해져서 그럴 수가 없게 된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예 라말라로 일을 하러 오고 주말에나 집으로 가는 거죠.”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점령과 봉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이 이주를 해야 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어서 곧 총선이 있을 거라서 선거를 얘기를 꺼내 봤습니다.
“하마스에 대한 지지가 커지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점령 때문입니다. 지난번 96년 선거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파타를 크게 지지 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고 상황은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그러니깐 사람들이 자연히 다른 대안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마스가 대안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요. 하마스가 대안인 것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에겐 별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의회를 주도하게 될 경우 여성 문제에 대해 우려를 하던데요.”
“맞아요, 우리의 자유가 제약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와 싸워야 합니다. 하나는 점령과 싸워야 하고, 다른 하나는 보수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파타나 PLO의 부패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번 선거에서 그게 큰 쟁점인데요, 하마스 같은 경우도 깨끗한 손을 뽑으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핵심 문제는 부패냐 깨끗한 손이냐 보다 이스라엘의 점령입니다. 깨끗한 손을 얘기하면서 점령은 빠져 있습니다.”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하하하. 아직 확실히 정하지는 않았는데요, 제 아내의 경우는 인민전선(PFLP, 팔레스타인해방 인민전선-미니 주)을 지지하는 것 같구요. 저는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좌파 정당 아니면 중도 좌파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종교 정당이 아닌 세속 정당을 지지합니다.”
한 인간이 겪은 전쟁과 점령 이야기
“1967년 전쟁이요? 뭐 생각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갑자기 점령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하기 전에는 요르단 영토였는데, 전쟁이 벌어지고 요르단은 아무런 힘이 없었고, 이스라엘은 아주 쉽게 점령 했습니다.”
지난번 헤브론의 시장에서 만났던 나이 많았던 그 분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아랍군은 싸우지도 않고 그냥 도망갔었다고.
“저는 1969년도에 공부를 하러 이라크로 떠났었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왜요?”
“이스라엘이 만든 규정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2년 동안 외국에 갔다 오겠다고 하면 정확히 2년이어야 합니다. 제 말은 1달 뒤에 돌아오는 것도 안 되구요, 정확히 2년 째 되는 날이 아니라 하루라도 지나서 오는 것도 안 됩니다. 정확히 2년째 되는 날 국경에 도착하지 못하면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제가 그 경우인데요, 이라크에서 몇 년 있다가 돌아오려고 하니깐 돈이 없어서 좀 늦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깐 이스라엘이 입국을 거부했고, 결국 고향을 떠난 지 25년이 지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전이든 이후든 단 하루도 다르지 않고 정확하게 돌아와야 된다...... 어떻게든 팔레스타인을 떠나라는 말로 밖에는 안 들립니다.
사진 2 자카리아의 집에서 저 멀리 언덕 위에 이스라엘 점령촌이 보입니다.
“25년이 지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모든 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점령촌이 들어서 있었고, 예전에 농부이던 사람들이 노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왜요?”
“농사를 지어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으니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의 공장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된 겁니다. 농민과 농업 문화가 중심이었는데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어릴 때 행복하게 같이 놀던 친구들조차도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빠지고 볼은 푹 들어가 있었습니다. 점령 기간 동안 너무 늙어버렸던 겁니다. 저는 제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을 잃어 버렸습니다. 제 친구들과 함께요.”
점령은 인간의 사고와 생활, 노동 과정까지 뒤바꾼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제가 25년 만에 고향에 돌아 왔을 때 어머니는 너무 나이가 많이 되셔서 절 알아보시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도 잃어버린 거죠.”
25년 동안 어머니는 아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셨을까? 하지만 정작 아들이 집으로 돌아와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지금 하늘나라에서 아들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1980년대 초 제가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을 때 일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이 베이루트를 공격했었는데요, 폭탄을 엄청 퍼부었습니다. 공중에서 지상에서 바다에서요. 당시 PLO가 베이루트에 있었고 저는 기자였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지하로 들어가서 손을 머리 뒤로 감싸고 웅크려 있는 것 밖에는요. 폭격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모든 것이 파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다행히 살아남았습니다.”
“다행” 그래, 자카리아는 다행히 살아남았습니다. 다행히도 살아남아서 우리에게 그 때의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라파트가 있다고 생각되는 건물은 모두 폭파 했는데요, 한번은 아라파트를 죽인다고 건물을 폭파해서 350명이 죽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국제 사회에서 군대가 파견되어 도시 주변에 배치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이 떠나고, 이스라엘은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베이루트에 대한 공격으로 몇 만 명이 죽었는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또 이스라엘과 레바논 우파 민병대는 샤브라, 샤틸라 난민촌에서 팔레스타인 난민 수 천 명을 학살 했습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샤론은 베이루트의 학살에 대한 “간접적” 책임을 지고 국방장관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을 점령하고 점령촌을 건설하고 있죠?”
“시리아 땅인 골란고원을 지금도 점령하고 있는데요, 쉽게 얘기해서 이스라엘에겐 국경이 없습니다. 탱크가 가는 곳이 곧 국경입니다.”
탱크가 가는 곳이 국경이라, 저는 이보다 더 정확히 이스라엘의 팽창 정책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점령이 어린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이들이 아니에요.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거에요. 예를 들어 아내가 유치원 교사로 있을 때 일입니다. 남자 아이가 하나가 여자 아이 옷을 입고 왔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도 이상해서 왜 여자 아이 옷을 입고 왔냐고 물으니깐, 이스라엘 군인들이 남자 아이들을 죽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지금 이 얘기를 다시 기억하며 쓰는 순간에도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1차 인티파다 때 일입니다. 라빈이 이스라엘 총리였구요. 이스라엘 정부가 공식적으로 돌을 던지는 아이들 팔을 부러뜨리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팔과 다리를 붙잡고는 돌과 총으로 부러뜨렸죠.”
“아니 도대체 왜 팔을 부러뜨리는 겁니까?”
“돌을 던지니깐 못 던지게 하려는 거겠죠.”
우리가 수없이 봐 왔던 사진입니다.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돌은 던진다고 팔을 부러뜨리다니…….
한 인간에게서 한 집단의 역사를 듣고 나서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만약에 해외에 있는 난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는데, 고향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으면 어떻게 하죠?”
“그건 제가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만 지금 우리는 언젠가 돌아올 난민들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얘기할 뿐이죠.”
지금 생각하면 제가 봐도 아주 멍청한 질문이었습니다.
자카리아와 만남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주 커다란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본 가장 크고 예쁜 무지개였습니다. 그리고 자카리아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습니다.
“우리에게 상황은 아주 불리합니다. 그리고 빛은 아주 가느다랗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저항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진 3 무지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 06년·09년 팔레스타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것이 삶이에요.” (0) | 2009.10.08 |
---|---|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말해 주세요 (0) | 2009.09.24 |
남편이 출감한 1주일 뒤 다시 아들이 감옥으로... (0) | 2009.09.23 |
생활 곳곳에 스며든 점령 (0) | 2009.09.23 |
가슴이 막혀서 눈물이 나던 날 (0) | 2009.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