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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더 리더]를 보고]
아침에 일어나 차를 한잔 하며 노찾사의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5월이 다가 옵니다. 세월이 가면서 5월이란 말에 가슴 떨림이 점점 덜해 지고 있구? 5월, 죽은 자와 죽인 자.
뜬금없는 질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두환이나 정호용 같은 놈들뿐만 아니라 광주항쟁 당시 시민들을 공격하고 짓누르는 일에
참여했던 모든 군인과 공무원, 언론인들을 찾아서 이름을 밝히고 그들 모두를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약 모두가 아니라면
누구까지 처벌해야 하는 걸까요?
오늘은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5월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죽은 자와 죽인 자에 관한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본 느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책임에 대해서
일주일 사이에 이 영화를
두 번 봤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마음이 참 거시기 하더라구요. 액션 영화를 볼까 하다가 이 영화를 함께
봤던 친구는 어찌나 울었든지 눈이 퉁퉁 부었고, 다른 친구에게 문자로 영화 얘기를 했더니 그 친구도 그 다음날 영화를 보고 많이
울었대요. 그렇게 슬픈 영화냐구요? 슬프다기 보다는 뭐랄까...
유대인 학살 과정에
참여했으니 주인공 한나 슈미트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 근데 한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생활을 하기 위해 일을 했고, 위에서 시키니깐
열심히 했던 것뿐입니다. 특별한 의도나 출세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한 거죠. 그래서 나치에 대한
전범재판에서 판사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습니까?’라고 물으니깐 한나가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잘못인가요? 판사님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라고 묻습니다. 판사는 아무런 말을 못하구요.
한나는 유대인들을 가둬둔
교회에 불이 났는데도 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대해 감시원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다했고,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특별히 유대인에 대한 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의 행동으로 사람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일에 성실했고 그 일의 결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몰랐던 거지요. 나치,
살인자, 전쟁범죄자 등의 온갖 비난을 받는 사람에게 그 일의 동기를 묻자 나오는 대답이 분노, 증오, 충동과 같은 말이 아니라
성실, 질서와 같은 말인 셈이죠.
한나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에 생각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 행동의 결과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면 한나에게는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잘못이 있겠지요. 그리고 비록 ‘생각하지 못한 죄’이지만 잘못을 저질렀으니 처벌을 받아야 할 거구요. 같은 식으로 얘기하면
베트남이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참여했던 한국 군인들도 이름을 밝히고 법정에 세워서 처벌해야 될 거구요.
그리고 만약 한나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생각했다고 해서 선택이 달라졌을까요? 예를 들어 어느 한국 군인이 자신은 침략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병역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군인들 가운데 몇 명이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병역 거부를 선택할 수 있을까요? ‘온 사회가
미쳐 돌아가더라도 너만은 올바른 정신을 가졌어야 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일을 그만 둬야 할까요?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한나의
‘의도’를 묻습니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런 게 아니냐는 거지요. 그러면 국가 공무원이든 회사 직원이든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하는 사람이 명령, 지시, 업무, 역할 등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의도나 자발성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는
걸까요? 스스로 했으니 모두 자발적인 걸까요? 스스로 했지만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면 그 사람은 얼마만큼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요?
정의에 대해서
유대인 학살과 나치에 관한 전범재판이니 대단할 것 같지만 영화 속 대사처럼 마치 ‘서커스’ 같습니다. 그리고 그 서커스 같은 재판에 가장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이 바로 한나입니다.
한나는 왜 재판정에 서게 되었을까요? 범죄자니깐, 잘못을 저질렀으니깐요?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재판정에 서지 않았겠지요.
나치 전범재판이라는 것이
승자의 죄는 묻지 않고 패자의 죄만 묻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인이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죄가 되지만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많은 일본 민간인을 죽인 것은 죄가 되지 않지요. 패자의 행동은 죄가 되고 승자의 행동은 무용담이 됩니다.
재판이라는 것은 선과 악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인간이 그 선과 악을 판별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서 진행되는데 과연 선과 악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걸까요? 한나를 처벌했던 전범재판은 선과 악을 판별하는 공간이었을까요, 아니면 승자의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공간이었을까요?
여러분 혹시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보셨나요? 혹시 안 보셨다면 이 영화를 보시기 전이나 보시고 나서 한 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이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나치였던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정의에 대해서, 법과 재판에 대해서, 인간의 행동과 책임에 대해서 그리고 특히 인간의 사유/무사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거든요. 아이히만의 모습이 한나 슈미트의 모습과도 비슷하구요.
[더 리더]에서는 한나의
사랑과 부끄러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이클을 만나서 행복이란 것을 느끼고,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감추고 싶어 했고, 마이클의 관심 속에 늦게나마 글을 배우고, 그 마이클과 자신이 서로를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크게 낙담하고...
판사가 그랬듯이, 세상이 그랬듯이, 마이클이 그랬듯이 한나의 삶에 대해 ‘넌 왜 그런 짓을 한거야?’라고 묻는 동안 한나에게 정작 소중했던 것은 따뜻한 웃음과 작은 행복이었던 거죠.
한나는 길에서 아픈 사람을
만나면 돌봐주고 안아 주면서 감싸 줄 줄도 아는 사람이고, 교회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는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도 아픈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그러면서 유대인을 선별해서 가스실로 보내기도 했지요.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제
마음이 복잡했던 겁니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은 분명 맞는데 그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마귀가 아니더라는 거죠. 또 우리
주변에도 별 다른 생각 없이 행동을 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와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겁니다. 그게 저
자신일 수도 있구요. 그러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디까지 생각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요?
사회가 부정의할 때 개인은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을까요?
선과 악이라는 것은 과연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걸까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처벌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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