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여러 작품들

백석 - 개구리네 한솥밥

순돌이 아빠^.^ 2009. 12. 5. 20:50

없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돈이 없고 찬바람 피할 곳 없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외로움입니다. 세상에 혼자 남겨 진 것 같고 혼자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때론 몸 시린 것보다 마음 시린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이니깐요. 그래서 오늘은 백석의 글에 강우근이 그림을 그린 [개구리네 한솥밥]을 가지고 잠깐이나마 마음을 데워보겠습니다.
 
옛날 어느 곳에 개구리 하나 살았네,
가난하나 마음 착한 개구리 하나 살았네.
하루는 이 개구리 쌀 한 말을 얻어 오려
벌 건너 형을 찾아 길을 나섰네.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가난하나 마음 착한 개구리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가난하면 가난하고, 착하면 착하지 꼭 옛날이야기에는 가난하지만 착한 사람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어찌 보면 가난과 인간에 대한 삶의 태도가 담겨 있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이나 빈곤에 관계없이 자기 삶의 태도를 지키자는 거지요. 비록 가난이 사회적 문제이고 박탈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건 그거고 우리가 다른 인간을 대할 때는 다른 이를 존중하고 상대의 어려움에 마음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거지요. 가난은 물질적인 부족함을 말하는 거지 다른 이를 감싸 안고 함께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깐요. 더 가진 자의 마음이 언제나 더 풍요로운 것이 아니듯이 덜 가진 자의 마음이 늘 왜소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개구리 덥적덥적 길을 가노라니
길가 봇도랑에 우는 소리 들렸네.
개구리 닁큼 뛰어 도랑으로 가 보니
소시랑게 한 마리 엉엉 우네.
 
두 가지 측면에서 제게 감동을 준 부분입니다. 첫 번째 것은 개구리가 슬금슬금도 아니고 가만히 가만히도 아니고 ‘닁큼’ 갔다는 것입니다. 사전에 찾아 보니 닁큼은 ‘머뭇거리지 않고 단번에 빨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여러분이 만약 길을 가다가 누군가 울고 있으면 ‘닁큼’ 가 보시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을 접했을 때 안쓰럽기도 하고 도움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아픈 소리를 들은 바로 그 순간 얼른 무언가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망설이기도 하고 몇 번 생각하기도 하지요. 사회적 연대를 실천해 본 경험이 적을뿐더러 그나마 살아오면서 잊어버리고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감동 받은 부분은 개구리가 소시랑게에게 도움을 주러 갔다는 것입니다. 파란 개구리가 빨간 개구리에게 간 것도 아니고, 키 작은 개구리가 키 큰 개구리에게 간 것도 아니고 개구리와는 생김새도 전혀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른 소시랑게에게 개구리가 도움 주러 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해 볼까요? 여러분이 해외 여행을 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났습니다. 다른 사람들 다 다쳤고 멀쩡한 사람은 여러분 한 명 뿐입니다. 3명이 서로 도와 달라고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한 사람은 한국 사람으로 한국말로 ‘도와 주세요’라고 하고, 한 사람은 미국에서 온 백인인데 영어로 ‘헬프미'라고 하고, 한 사람은 우간다에서 온 흑인으로 표정은 도와 달라는 표정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싶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누구에게 먼저 도움을 주려고 할까요? 다른 조건이 같다면 아마 한국인에게 제일 먼저 손을 뻗을 가능성이 크고, 그 다음은 미국에서 온 백인, 세 번째가 우간다에서 온 흑인일 가능성이 크겠지요. 자기의 의식과 존재를 반영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개구리가 소시랑게에 닁큼 달려 간 것에 감동을 받았던 겁니다. 자기 존재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다른 존재를 위해 행동하려는 의지를 보여줬으니깐요.
 
 
□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소시랑게 우는 것이 가엾기도 가엾어
개구리 뿌꾸국 물어보았네.
“소시랑게야, 너 왜 우니?”
소시랑게 울다 말고 대답하였네.
“발이 다쳐 아파서 운다.”
 
난생 처음 보는 소시랑게를 만나 그저 우는 모습을 보았을 뿐인데도 개구리는 그냥 가여운 것도 아니고 가엾기도 가엾다고 느낍니다. 어려움을 가진 한 존재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존재와 만나는 순간입니다. 물건을 사고 팔다 만난 것도 아니고, 한쪽은 두들겨 패고 다른 쪽은 두들겨 맞으며 만난 것도 아닙니다. 어떤 거래나 댓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히 서로의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순간입니다.
 
개구리는 바쁜 길 잊어버리고
소시랑게 다친 발 고쳐 주었네.
 
우리 참 바쁘게 살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서로 만나 나누는 첫 인사가 ‘요즘 바쁘시죠?’입니다. 친구나 동료에게 말 한 번 붙여볼까 싶다가도 혹시 바쁜데 내가 괜히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 들기 십상입니다.
 
며칠 전에 이라크인 타라(Tara)씨가 한국에 와서 이라크의 상황과 반점령 운동을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기 전날 술을 한 잔 사시겠다고 해서 술집에 앉아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있으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를 말씀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진보신당을 방문해서 얘기하는 자리에서 진보신당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장소를 들락날락 거리며 바쁘고 피곤해 보였다는 겁니다. 누군가의 자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는 게 그렇게 멀리서 온 사람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일만큼의 여유도 갖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개구리가 대단하다는 겁니다. 자기도 먹을 것 구하러 가는 길이면서 남들 아픈 것까지 챙기고 나서는 거지요.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자신들도 힘들면서 이랜드 노동자들 해외 원정 투쟁 간다고 돈 봉투를 건넸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두들 자신에게 갇혀 사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는 거죠. 내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함께 할 마음도 갖고 있다는 겁니다.
 
 
□ 우리가 만나는 이유
 
다음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착한 일 하느라고 길이 늦은 개구리,
형네 집에 왔을 때는 날이 저물고,
쌀 대신에 벼 한 말 얻어서 지고
형네 집을 나왔을 땐 저문 날이 어두워,
 
어둔 길을 가다 개구리가 넘어지자 이번에는 개똥벌레가 날아와 불을 밝힙니다. 개구리가 짐이 무거워 걱정하고 있으니깐 하늘소가 날아와 짐을 받아 듭니다. 길 한 복판에 쇠똥이 쌓여 개구리가 길을 가지 못하니깐 쇠똥구리가 나타나 막혔던 길을 엽니다. 얻어 온 벼를 찧을 수가 없어 걱정을 하고 있으니깐 방아깨비가 나타나 벼 한 말을 다 찧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쌀은 있으나 장작이 없어 밥을 짓지 못하고 있으니깐 소시랑게 기어와 거품으로 밥을 짓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을 받아 준 개똥벌레,
짐을 져다 준 하늘소,
길을 치워 준 쇠똥구리,
방아 찧어 준 방아깨비,
밥을 지어 준 소시랑게,
모두모두 둘러앉아
한솥밥을 먹었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개구리가 소시랑게며 방아깨비에게 도움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려움에 처한 개구리에게 도움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개구리가 다른 생각 없이 ‘닁큼’ 다른 이들에게 도움 주었듯이 그들도 개구리에게 ‘닁큼’ 손을 내밀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리고 각자를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존재들이지만 개똥벌레는 불을 밝히고, 하늘소는 짐을 지는 등 서로의 노동을 모아 결국 함께 밥을 먹게 됩니다. [개구리네 한솥밥]에 나오는 제일 마지막 그림이 바로 이들이 함께 밥을 먹고 난 뒤에 둥글게 어울려 춤을 추는 모습니다. 비록 생긴 것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지만 각자의 모습에 맞게 노동을 해서 따순 밥을 나누고 어울려 춤을 추는 거지요.
 
우리 바라는 세상이 이런 거 아닐까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여성과 남성이,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서로의 생김새나 처한 처지가 지금은 비록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 주고 받으며 어울려 힘쓰다 보면 언젠가 함께 밥 먹고 웃으며 춤을 출 수 있는 해방 세상, 대동 세상이 오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