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 - 조율
1.
요즘 저의 가장 큰 사치(?)라고 하면 찻집에 앉아 책을 읽는 것입니다
서너 시간씩 앉아 있다 보면 사람 사는 여러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제는 제 옆에 초딩으로 보이는 남매 2명이 앉고
맞은편에는 엄마와 영어 원어민 강사로 보이는 사람이 앉았습니다
누나는 그래도 몇 마디 하는데 동생은 입을 잘 열지 않더라구요
비싼 돈 주고 원어민 과외 시킬 건데
입을 굳게 다물고 딴 청만 피우는 아들을 보고
엄마가 앞에서는 말을 못해도 얼마나 속이 터질까 싶었습니다.
어제 일과 관계없이 때론 안타까운 것이
부모님들이 단어만 잘 외우면 말이 술술 나올 것으로 생각하시고
냅다 아이들을 쪼아 대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한국말도 그렇잖아요.
단어를 몰라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없으니깐 할 말이 없거나 조리 있게 말을 못하겠지요
영어만 잘 한다고 말이 술술 나오는 게 아닐 것 같아요
좋은 책도 많이 읽고 좋은 사람을 만나 대화도 나누고
여러 가지 경험도 해서 마음과 머릿속에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아요.
영어가 그릇이라면 생각은 그 속에 담는 물이겠지요.
좋은 컴퓨터만 있으면 뭐 하겠어요.
그 안에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야지요. ^^
2.
제가 고향이 부산이다보니 가끔 사람들이
‘야, 너 회 많이 먹었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의 대답은 늘 똑같아요.
‘야, 부산 산다고 회 많이 먹는 거 아니거덩. 회는 부산이나 서울이나 돈이 있어야 먹는 거거덩’
또 어떤 사람은 어떤 회가 맛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러면 저의 대답은 ‘잘 모른다’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잘 몰라요
많이 먹어 보질 않았으니 잘 모를 수밖에요
그래도 굳이 말을 하자면
제가 살면서 그동안 먹어본 회는 딱 2종류가 있어요
금방 바다에서 잡아 온 물고기에서 나온 회와
이 수족관, 저 수족관 옮겨 다니며 온갖 약 먹고 못 죽어서 그냥 살아 있는 물고기에서 나온 회지요
또 어떤 분은 회는 된장에 찍어 먹어야 된다, 아니다 간장에 찍어 먹어야 된다며
어느 장이 회 맛을 살려 주는 지 강조를 하세요
그 말씀도 맞겠지만 그냥 저의 경험은 장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장은 말 그대로 장이기 때문에 회의 맛을 오히려 가려버리죠
예를 들어 광어회 하면 좀 있어 보이고 멸치회 하면
‘에이, 멸치도 회가 있어?’라고 하실 거에요
그냥 제가 권하고 싶은 것은 약 먹고 겨우 숨이 붙어 있었던 광어를
어느 횟집에 가나 똑같은 장에 찍어 먹는 것 보다는
내일이 입춘이라는데, 봄 바닷가에서 금방 잡아온 멸치를 쌈에 싸 드셔 보시라는 거에요
멸치라고 우습게보고 그냥 꿀꺽 삼키지 말고 천천히 꼬옥꼬옥 씹어 보세요
그러면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마도...
‘아하 이게 회맛이구나’ 할 수도 있을지...
장맛에 기대지 말고 입 안이 거칠어도
천천히 회 맛을 느껴 보심이 어떨지...
3.
사람 사는 것도
회하고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광어냐 멸치냐가 두 번째 문제이듯
우리 집 아파트가 20평이냐 30평이냐는 나중 문제겠지요
된장이냐 간장이냐가 두 번째 문제이듯
내가 서울대 나왔냐 고등학교만 나왔냐는 나중 문제겠지요
회의 참맛이 그 살아 있는 싱싱함에서 오듯이
삶의 참맛도 살아 펄떡 거리는 심장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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