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지만 아무 것이나 한다고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십만 관객이 오갔다는 ‘앤디 워홀’이라는 사람의 작품 전시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작품 앞에서 정신이 깨어지고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술 아닌 것을 팝 아트니 뭐니 하면서 예술인양 전시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앤디 워홀이 그린 마를린 먼로
브루델의 활쏘는 헤라클레스
그에 비해 ‘부르델’의 조각 전시회는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특히 헤라클레스라는 작품 앞에서 느낀 감정은 아직도 잘 잊히지 않습니다. 인간 몸의 구석구석을 표현한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대단했습니다.
나이지만 나만이지는 않은
이 책을 제가 죄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말도 어렵고 사례로 들고 있는 작품들을 제가 본 적이 없으니 뭐라 할 말이 없는 거지요. 다만, 글쓴이가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는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보다 큰 사회적 역사적 전체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작가 자신의 삶은 일정하지도 정적이지도 않으며, 과거, 현재, 미래 사이를 오가며 싸우는 과정이다...역사적 현상은 특정한 역사적 과정에서, 구체적 과거와 구체적 미래를 연결하는 구체적 현재에서 존재하는 구체적 요소이다. 따라서 작가의 삶의 모든 것, 모든 개별적 경험, 사고, 그리고 그가 겪는 희로애락은 아무리 주관적이더라도 결국은 역사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문학에 있어서 현실의 진정한 반영은 이 운동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주관성의 깊은 내적 본질... - 54쪽
어느 분위기 좋은 모텔방에서 두 남녀가 성관계를 한다고 하죠. 아무도 모르고, 둘만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이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 체위, 남성의 사정 시기 등은 옆방에서 성관계를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대체로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의지로, 우리들만의 감정으로, 우리들만의 행위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과 비슷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나만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공중전화기에 송수화기가 왼쪽에 달려 있는 것은 오른손잡이가 번호를 쉽게 누르도록 만든 게 아닐까요? 왼손잡이가 많은 사회에서는 송수화기를 오른쪽에 놓지 않았을까요? 까닭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 까닭은 대부분은 사회와 관계 있지요.
어떤 이들은 사회와 동떨어진 나만의 생각, 나만의 감정을 찾으려고 합니다. 태어나서 누구와 접촉하지도 않고 자기 방에서만 산 사람은 그게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거의 모든 인간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회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초등학교에 가는 여학생들이 대체로 분홍색 가방을 매고, 남학생들이 대체로 파란색 가방을 매는 것은 그들이 좋아하는 색깔을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여자->분홍색, 남자->파란색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진 거지요.
그래서 인생을 잘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좋은 예술 작품을 만들려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잘 알아야 하는 거지요. 인생도 작품도 그 뿌리가 무엇에 있는지, 그들의 세계관은 어디에 맞닿아 있는지가 중요한 거지요. 아무 생각 없이 선택했다고 하는 그 순간도 이미 그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을 수 있는 거지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
올바른 이론과 올바른 미학(즉, 전형 창조)이 일치할 때도 많지만, 실제로 이들 방법과 결과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일치하는 것은 양자 모두 현실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 관한 올바른 미학적 이해야말로 리얼리즘의 선결조건이다. - 95쪽
예술가 하면 혼자 고독을 씹고 있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어느 순간 번득이는 영감으로 모든 것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괴상하고 특이하다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는 자신을 괴상하고 특이하게 보임으로써 예술가처럼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얼굴에 분칠한다고 백인이 되겠습니까? 속이 바뀌지 않았는데 겉만 꾸민다고 뭐가 되겠습니까? [한겨레]신문에 보니 제가 좋아하는 사진작가 최민 식의 작품과 글이 있었습니다.
사진가는 주제의식과 확고한 작가정신을 바탕으로 작업에 임해야 한다. 사진의 생명은 리얼리티에 있다. 따라서 그 현실 속에 진실이 있으며 진실 속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박진감이 있다. 아우구스트 잔더는 자기 시대에 함께 호흡하고 있는 독일 민중 전체를 사진에 담으려 하였다. 자기가 사는 시대를 역사적 영원성 속에서 투시한 것이다. - [한겨레], 2010년 4월28일, 34면
어디 사진 찍는 사람만 그렇겠습니까. 그림 그리는 사람, 음악 하는 사람, 학문하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겠지요. 예술이 시대를 인식하고, 사람들과 호흡하지 못한 채 가진 자들의 놀이감으로 전락하거나 작가 자신만의 취향에 그칠 때 이미 예술은 그 생명을 다한 것일 겁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코플라의 ‘반영도 아니며 추상화도 아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예술 작품은 인간이 ‘선과 악의 틈새기’에 세워져 있는 것임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혹은 적어도 느낄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인간이나 자기 자신을 파괴시켜 버린다. - 227쪽
선이니 악이니, 삶의 가치니 방향이니 하는 말들이 어느새 고리타분한 관념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러 작품이나 작가들 곧 심청전이나 홍길동전, 셰익스피어나 케테 콜비츠, 톨스토이, 윤동주, 일리야 레핀 등이 결국 찾고 싶어 했던 것도 인간과 세상이 어디로 나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답이지 않았을까요? 가장 오래되고 낡은 것 같은 질문이 우리 삶을 가장 새로운 곳으로 이끌 수도 있는 거지요.
예술의 의미
이틀 동안 저희 집에 머물던 친구가 부산으로 갔습니다. 봄은 봄인데 비가 오고 싸늘한 아침에 친구를 바래다주고 집에 돌아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틀었습니다. 1악장이 지나고 2악장이 지나고 3악장에 이르자 비가 그치더니 4악장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해가 나오고 세상이 밝아졌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오가며 혼란스러운 인생이나 세상도 가만히 보면 그 나름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머뭇거리고 우왕좌왕 하지만 말고 조금씩 세상의 흐름을 알아가고, 그 흐름을 읽으며 때로는 거슬러 걷다보면 새로운 삶을 맞게 될 거라는 이야기가 음악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아우구스트 잔더의 <석탄배달부>
예술은 인간을 한없이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희망을 품게도 하고 절망하게도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이 위대할 수도 있고 잘못 쓰이기 시작하면 인간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위험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예술가는 오랜 시간의 공부와 훈련과 노력을 통해 태어나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거지요.
예술이 예술을 흉내 낸 것들에게 밀려 풀 죽지 않고, 예술가가 예술가를 흉내 낸 이들에게 구박 받으며 어디 쳐 박히지 않고 예술이 예술로써의 제 생명을 찾고, 예술가가 제 뜻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 사는 세상은 좀 더 행복하고 즐거워질 겁니다.
서태지 - 교실이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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