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뼈에 살 붙어 있는 존재로써의 인간도 있겠고,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인간도 있을 테고, 누군가와 관계 맺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도 있을 테지요.
이 가운데 인간이 단지 뼈에 살 붙어 있는 존재가 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주 노동자가 가구 공장에서 사장한테 구박 받으며 시키는 일만 해야 할 때가 그렇고, 남성이 여성을 단지 제 쾌락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무작정 자지를 밀어 넣을 때가 그렇지요.
이때의 노동자나 여성은 이해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이해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말을 들으며 마음을 읽고, 검버섯 핀 몸통의 보며 나무의 세월을 느끼고, 어느새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을 통해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게 되는 거지요.
뼈에 붙어 있는 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속에서 누군가 마른 몸에 거친 근육 붙은 팔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의 일생을 시시콜콜 몰라도 가난한 살림에 몸을 많이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그도 아니라면 우리는 근육을 통해 그 속에 담겨 있는 힘을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는 근육을 통해 볼 수 있는 거지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그런데 로댕에게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삶이나 사회를 담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뼈에 살 붙은, 그래서 이해할 필요조차 없어지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맞춤은 두 몸뚱이의 만남이 아니라 설레임과 설레임의 만남이겠지요.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겁니다.
미술이 단지 전달 매체로써의 눈에 집착할 때 클림트가 아무리 색을 화려하게 쓰고, 로댕이 아무리 사람의 몸을 신기하리만치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한다고 해도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도 인간이 만든 것이듯 예술가도 인간 속에서 태어납니다. 저 멀찍이 떨어져서 본다는 것은 예술가도 학자도 모두 갖춰야 할 태도이지만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은 나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전체를 크게 보기 위한 것이지 인간, 인간의 삶, 인간의 세상으로부터 멀어지자는 말은 아니겠지요.
로댕의 <입맞춤>
신이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노리개로 전락하며 초라해 집니다. 인간에게서 멀어질수록 의미나 가치로부터도 멀어지게 되는 거지요.
예술이 또는 예술가가, 더군다나 뛰어난 기량을 가진 만큼 더욱더 기쁨과 슬픔을 가지고 다른 이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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