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것들/스치는생각

가을, 소중한 것들

순돌이 아빠^.^ 2010. 9. 30. 14:17

 

1.
추석이라고 오랜만에 부산에 갔다가 친구 한 놈을 만났습니다. 어릴 적 한 동네 살며 야구 한다고 유리창 깰 때부터 알고 지내던 놈이니 서로의 이름을 부른지도 꽤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놈은 5살 먹은 아이를 데리고 왔고, 저는 이번에 나온 책을 들고 갔습니다. 찻집에 앉아 얘기를 하는데 아이가 하도 지겨워해서 놀이터로 갔습니다. 놀이터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의자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길 했습니다.

 

그 놈은 흔히 말하는 대기업에 다니는데, 제가 거기는 언제 보통 퇴직을 하냐니깐 좋든 싫든 40대 말이나 50쯤 되면 다들 나간다고 합니다. 우리 나이를 두고 계산해 보면 이제 10년 정도 남은 셈이지요.

 

우습네요. 남의 밭 무 뽑아 먹던 얘기하면서 웃던 놈이 빠른 세월 앞에 얼마 남지 않은 퇴직을 얘기하니 말입니다.

 

가을바람 쐬며 오랜 친구와 그렇게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2.
엄마가 자~안뜩 싸준 반찬을 낑낑거리며 들고 기차를 타러 구포역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지하철을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데, 엘리베이터를 5~6미터 앞두고 보니 그 안에 사람이 가득합니다. 1층과 2층만 왔다 갔다 하는 놈이라 별 걱정 없이 다음번에 타면 되겠다 싶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무거운 짐을 들고 천천히 걸어가서 그 놈 앞에 섰는데도 여전히 그 놈은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놈은 이마에 ‘만원’이라는 빨간 글자를 새겼습니다. ‘만원’ 불이 들어오고 조금 지나니 마지막에 탔을 법한, 문 앞에 서 있는 한 명이 내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놈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이제는 그 놈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 놈은 한 사람이 내려도 여전히 이마에 ‘만원’ 불을 켠 채 꼼짝하질 않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놈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이번에도 누군가 내릴 거라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 놈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내가 방구 안 뀌었어’하는 식으로 먼 곳만 바라보고 아무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1층과 2층을 갔다가 다시 와도 남을 시간이 흘렀지만 그 놈은 ‘나도 모르겠다. 배 째라’하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저를 포함한 몇몇 사람이 어색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자 그 놈이 저 안에, 그러니깐 맨 처음 그 놈 속으로 들어갔을 법한 한 할아버지가 ‘이러면 아무도 못 가잖아. 내가 내릴 게요’ 하면서 사람들을 비집고 나옵니다. 그 놈에게서 나온 할아버지는 ‘허허. 계단이 어디 있지? 걸어가면 되겠네’하면서 가벼운 웃음과 함께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내리고서야 그 놈은 ‘에이구, 인간이란 것들 정말 독한 것들이야’하면서 몸을 움직였습니다. 온갖 잘난 체 하던 인간들이 자기가 내려 잠깐만 기다리면 다시 그 놈이 올 건데, 내가 내려 기다리느니 차라리 모두 함께 가지 말자고 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찌푸린 인상도 없이 계단을 향해 걸어가시던 할아버지, 삶이란 때론 내가 조금 불편하면 여럿이 좋아질 수 있다는 걸 제가 보여 주셨습니다.

 

3.


아침에 설거지를 하고 보니 씽크대 밑으로 물이 샙니다. 씽크대의 큰 주둥이와 관 사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 거죠.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떻게 할까 싶었습니다. 한 번 새던 물이 저 알아서 그만 샐 리도 없고 해서 아파트 관리실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관리실에서 오신 분이 잠깐 보시더니 주둥이와 관 사이의 이음새 부분을 손으로 돌려 조이십니다. 그러니깐 정말 신기하게도 물이 안 새더라구요.

 

순간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누구한테 부탁할 것도,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이음새만 손으로 돌렸으면 물새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건데 그것 하나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겁니다.  이러니저러니 말도 많고, 뭘 아느니 마느니 하면서 떠들더니 그 작은 것 하나 알지 못했던 거지요. 바보 멍청이가 따로 없습니다.

 

집에 놀러 왔던 한 친구가 저보고 게으르고 무능력하다고 놀렸습니다. 청소하고 밥 해 먹고 옷 챙겨 입고 집 관리 하고 돈 벌고 가족들 챙기고 등등 흔히 말하는 ‘생활 능력’이 아주 떨어지는 거지요. 물론 저 나름대로는 한다고 했다는 변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

 

친구가 놀려서가 아니라 생활과 삶의 과정에 대해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이 대강 밥 비벼 먹고 내팽개치는 것 마냥 생활이란 것을 허투루만 하다가는 제 마음도 그렇게 흐트러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출출한 배 위에 달린 눈은 냉장고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 생일 선물로 받은 바흐의 요한 수난곡 CD로 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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