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남이섬으로 바람 쐬러 갔습니다. 슬프다는 말보다는 서럽다는 말이, 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애틋하다는 말이 더 깊게 느껴지듯 놀러 갔다는 말보다는 바람 쐬러 갔다는 말이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네요.
[겨울 연가] 촬영지로도 유명한 남이섬 앞에는 관광버스가 줄지어 있고,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온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배에는 여러 나라의 깃발도 걸려 있었구요.
남이섬에 배를 내려 사람이 한적한 길을 걸었습니다. 바람과 강 그리고 나무가 만드는 깊은 그늘이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한참을 걷다 함께 간 사람과 차를 한 잔 사 들고 마시고 있는데 건너편에 평화 그림 전시회가 있다는 현수막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평화랑’이라는 전시장이 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동화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기대와 달라서 그런 지 별 느낌 없이 쭈욱 지나다가 ‘팔레스타인’이라는 말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마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이 아니었으면 다른 그림과 같은 귀여운 그림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세 장의 그림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그림에는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아이들이 배를 타고 어디엔가 왔는데 육지에 있는 한 아이는 검은색 군함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요. 육지 가까운 곳에는 작은 배들이 군함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 위에 떠 있구요.
두 번째 그림에는 군함 때문에 만나지 못하던 아이들이 해마도 타고 헤엄도 치고 해서 바다 속에서 만나는 모습입니다. 금방까지 육지를 향해 있던 군함들은 이제 아이들이 타고 온 해를 향하고 있지요. 마치 ‘여기서 당장 꺼져!’라고 위협을 하듯이 말입니다.
세 번째 그림에는 혼자 해마를 타고 육지로 돌아오는 아이가 다시 세계 곳곳으로 떠나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지요. 군함도 다시 육지 쪽으로 향하고 있구요.
혹시 지난 2010년 5월31일 지중해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시나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몇 년째 꽁꽁 봉쇄한 채 식량도, 의약품도, 학용품도 제대로 들여오지 못하게 하자 수 십 개 나라의 사람들이 여러 척의 배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전해줄 물건을 싣고 가자지구로 향했지요.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 배를 공격해서 사람들을 죽였구요. 꼭 이 그림들처럼 말입니다.
그림을 보고 나오는데 마음 울컥 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바람이나 쐬자 싶어 간 남이섬이었는데, 이런 전시가 있다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남이섬에서 마음 울컥할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도 못했었지요.
조금은 혼란스럽고, 조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와 걷고 있는데 야외무대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옳거니 하면서 냅다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었지요.
그리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음악은 울컥하던 마음을 때렸고, 준비할 새도 없이 눈물이 주룩 흘렀습니다. 금방까지 팔레스타인과 전쟁과 아이들 생각하며 마음 무거웠는데, 보슬비 내리는 가을 남이섬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듣고 있자니 전시회와 연주회 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는 현실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저 그림 앞에 서 있어야 할 내가 이곳에 앉아 있는 것도 같고, 저 그림 속 아이들과 여기서 함께 음악을 들으면 좋겠다고도 싶었습니다. 아니면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떼 지어 잘 추는 춤을 저 무대 위에 올려 보고도 싶었구요.
평화...
인류 역사의 오랜 꿈이자 아직도 죄다 이루지 못한 꿈,
누군가에게는 우아한 장식처럼 쓰고 버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일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는 한가로이 꽃바람 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내 몸 던져 터뜨리는 치열한 투쟁일 수도 있는,
목숨 붙어 있는 그 모든 것들에게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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