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자료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팔레스타인 - 두번째

순돌이 아빠^.^ 2011. 9. 23. 12:14


3. 오슬로 협정과 평화

이스라엘이 건국 초기에 부딪친 난관은 주로 인접 아랍국가들의 도전이었다. - 235쪽

이 문장은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왜곡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상황을 말하자면 '이스라엘 건국 초기부터 인접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위협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아랍민족의 바다 위에 뜬 유태인의 섬 이스라엘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지원 덕분이었다. - 238쪽

이스라엘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미국 덕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아랍민족의 바다 위에 뜬 유태인의 섬 이스라엘’이란 부분은 잘 생각해 봐야할 부분입니다.

아랍민족의 바다 위에 뜬 유태인의 섬이라고 하니 마치 이스라엘은 적대적인 아랍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고, 위협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아랍 세계가 이스라엘을 위협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를 위협하고 공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요르단, 이집트, 모로코 등 많은 아랍국가들과 지배자들이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원했습니다. 아랍권과 이스라엘을 적대적인 관계로 단순 파악하는 것은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덧붙일 것은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국가로 생각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아랍인들을 추방했지만, 모두 쫓겨나지 않고 일부 남았습니다. 아랍인의 2세, 3세, 4세가 태어났고 최근 통계로 보면 이스라엘 인구의 20%가량은 아랍인입니다.


이스라엘 인구 (2008년9월현재)

분류

인구(명)

비율

유대인

5,542,400

75.50%

아랍인

1,476,500

20.10%

기타

318,600

4.40%

합계

7,337,500

100.00%

출처 : PASSIA http://www.passia.org


따라서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지배하는, 그리고 유대인과 아랍인이 함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입니다. 아랍의 바다에 뜬 유대인의 섬이 아닌 거지요.

이 평화협정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심각한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 242쪽

오슬로 협정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를 국제분쟁이라고 보고 해결 방안으로 양측의 양보와 타협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일본의 조선 지배도 국제분쟁이라고 보고 해결 방안이 양보와 타협일까요?

양측의 의견이나 입장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국제분쟁이라고 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팔레스타인인 지배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점령과 지배를 문제의 중심으로 보면 해결 방안은 양측의 양보와 타협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점령과 지배 중단인 거지요.

강도가 집에 들어 우리 집 방 2개를 빼앗았고 제가 우리 집을 되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강도는 이미 내가 들어앉았으니 못 주겠다고 하고 저는 우리 집이니 돌려달라고 계속 요구합니다. 여기서 옆집 사람이 해결 방안으로 서로 방 1개씩을 양보하고, 각자 1개씩을 갖자고 한다면 그게 올바른 해결 방안일까요?

게다가 무력충돌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해방기구보다 더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이 더 큰 힘을 얻게 되자 이제는 대화상대조차 잃어버릴 지경에 빠졌다. 해방기구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 242, 243쪽

이스라엘은 일단 군사력 행사를 절제함으로써 아랍세계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는데 성공했다. - 245쪽

유시민은 이스라엘이 왜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는지 배경을 설명합니다. 1987년에 시작된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항쟁)가 해를 이어가며 계속되고,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대신해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이 힘을 얻자 이스라엘이 어쩔 수 없이 평화협상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PLO가 팔레스타인을 대표했던 것은 맞지만 PLO만이 팔레스타인 조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티파다 당시 PLO는 점령지 밖 외국에서 주로 활동을 하고 있었고, 점령지 안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투쟁을 벌였습니다. 여기에 PLO에 참여한 세력들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인티파다 과정에서 비종교적인 조직들과 PLO가 활발히 움직이자 이스라엘은 이슬람 세력을 지원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 갈등과 투쟁을 불러 일으켜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오슬로 협정에 참여한 것은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성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 이스라엘은 이슬람 세력의 성장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시민의 설명은 실제 상황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입니다.



왼쪽부터 이스라엘 총리 라빈, 미국 대통령 클린턴, PLO 의장 아라파트



이스라엘이 평화협정에 참여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①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 : 총과 탱크로 인티파다를 진압하기는 했지만 이전의 방식대로 점령 정책을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만들도록 하고, 자치정부가 테러방지와 질서유지 등의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을 억압케 만든 것입니다. 직접 지배에 한계가 있으니 아라파트(당시 PLO 의장)를 비롯한 대리인을 함께 쓰는 방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② 이스라엘의 고립 : 여러 차례 아랍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고, 주변 국가들을 공격․점령하면서 이스라엘은 중동/아랍 지역에서 왕따 신세가 되었습니다. 많은 아랍의 지배자들은 이스라엘과 협력을 하고 싶어도 아랍 민중들에게 배신자로 낙인 찍힐까봐 섣불리 나설 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인티파다가 벌어지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모습이 방송을 타고 전 세계로 퍼지면서 중동/아랍권의 반이스라엘 감정이 크게 강화된 상태였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스라엘로써는 중동/아랍권 자본의 이스라엘 유입이 필요했습니다. 특히 석유를 팔아 막대한 돈을 거둬들인 아랍 독재 국가들이 가진 돈을 끌어 올 필요가 있었습니다. 투자를 하는 쪽에서는 침략자 이스라엘에게 투자를 한다는 비난을 피할 방법이 필요 했구요.

해결 방법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대한 점령과 학대를 중단한다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주도하고 아라파트와 PLO가 끌려가고 노르웨이 등이 손을 보태서 탄생한 것이 오슬로 협정입니다. 평화협상과 오슬로 협정은 전시용 이미지였을 뿐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거나 오히려 더 나쁜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③ 미국과 이라크 침공 : 1991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유엔을 동원해 끔찍한 경제봉쇄를 가했습니다. 중동/아랍권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미국은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고, 결국 이스라엘의 팔을 뒤틀어 협상에 나서도록 만들었습니다. 

그에게는 땅을 내주고 평화를 얻어 보려는 라빈 수상과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 243쪽

흔히 오슬로 협정을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협정 내용을 잘 모르거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말만 듣고 하는 말입니다.

오슬로 협정 내용도 그렇고, 이후에 벌어진 실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1%도 순순히 내놓지 않았습니다. 자치정부가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자치정부는 지하수 하나, 검문소 하나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한 정부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철수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식이었지만 자치정부는 테러리스트(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들을 반드시 제압해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땅과 ‘평화라는 이미지’ 둘 다를, 아라파트는 권력과 돈과 노벨평화상을 얻은 협정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평화에 대한 기대와 물거품, 변하지 않는 점령을 얻은 협정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아라파트가 찾은 돌파구가 땅과 점령 모두를 유지하려는 라빈(당시 이스라엘 총리)에게 굴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난날의 잘잘못은 덮어둔 채 지금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다. - 245쪽

오슬로 협정의 체결과 협상 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 과격 세력의 반대를 예상한다면 이런 협상은 어쩔 수 없이 비밀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라파트와 PLO는 오랜 세월 점령지 밖 외국을 떠돌고 있었고 유시민의 설명처럼 아라파트와 PLO는 점점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점령지 주민과 팔레스타인 난민 모두의 요구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협상을 비밀리에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만약 비밀에 붙이지 않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의견을 모아서 협상을 진행했다면 오슬로 협정과 같은 항복 문서에 서명할 수가 없었겠지요.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은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과 팔레스타인의 회교 원리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상대방과 함께 사는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 244쪽

이슬람을 뜻하는 말로 회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회교는 중국에 있던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사람들)들, 회회인들이 믿는 종교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회교보다는 이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낫겠지요.

팔레스타인 평화에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이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인 것도 맞고 이들은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유시민이 말하는 팔레스타인 회교 원리주의 세력이 하마스와 같은 조직을 가리키는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하마스식 저항이냐 파타식 협상이냐

위의 말은 (인터넷) <한겨레>가 2011년 9월20일 실은 한 기사의 제목입니다. ( 원문보기 ) 많은 언론이나 학자들이 하마스는 비타협, 무장투쟁 등의 말로 설명하고 파타는 타협, 협상 등의 말로 설명하고는 합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대항해 오랜 세월 투쟁해 왔던 것은 맞습니다. 마흐무드 압바스(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나 파타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에 협조(타협보다는 협조에 더 가깝습니다)하는 것에 비하면 팔레스타인 해방을 좀 더 강하게 주장해 왔습니다.

그렇다고 하마스가 협상을 하지 않거나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라파트, 압바스, 파타가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하마스는 자신의 요구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만들려고 했던 거지요.

그러자 미국과 이스라엘, 유럽 국가들, 언론들과 정치학자들과 중동문제 전문가들이 하마스를 과격세력, 무장세력, 이슬람 근본(원리)주의세력, 테러단체 등으로 부르며 공격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하마스가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닥치는 대로 싸움박질에 나선 것도 아니고 휴전을 하기로 하면 휴전 기간을 지켰습니다. 다만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것이 하마스가 그런 공격과 비난을 받는 까닭입니다.

혹시 유시민도 ‘온건파 파타와 강경파 하마스’라는, 흔하면서도 왜곡된 이미지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여러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 책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거꾸로 읽어볼 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