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자료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팔레스타인 - 첫번째

순돌이 아빠^.^ 2011. 9. 23. 12:37

저는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처음 읽은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책이 2010년에 발행한 3판 20쇄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봤나 봅니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을 기존의 고정 관념과는 다른 시선으로 보자는 책입니다.





오늘은 ‘거부하는 팔레스타인-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중심의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어 긍정적이기도 하고, 반대로 몇몇 부분은 글쓴이가 극복하려고 했던 시각을 극복하지 못했거나 상황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그에 대한 저의 의견을 말합니다. 

1. 과격과 테러

‘검은 9월단’이라는 가장 과격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 - 224쪽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죽은 팔레스타인 장례식에서 보복을 다짐하는 팔레스타인 과격파 전사들 - 245쪽

유시민의 글에서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용어의 사용입니다. 팔레스타인인이나 팔레스타인인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자주 쓰는 말이 ‘과격’입니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한 이스라엘에게도 별다른 수식어는 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추방과 학살에 앞장섰던 벤 구리온 같은 인물은 그냥 벤 구리온이고 별다른 수식어가 없습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조직들과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과격, 과격파라는 말이 쉽게 붙습니다.

이스라엘은 잘못된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우리 안의‘ 그들입니다. 그에 비해 과격한 그들은 잘못된 행동을 한 ’우리 밖의‘ 그들입니다. 앞의 것이 함께 살아야 할 대상이라면 뒤의 것은 무찌르거나 해결해야 할 대상인 거지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반(反)시온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 228쪽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와 더불어 영국 정부에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여 테러를 가했고, 영국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다.  - 229쪽

‘폭동’과 ‘테러’라는 말에는 혼란이나 분노, 맹목성, 무차별과 같은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1920, 1930년대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식민 지배하고 있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의 행동을 폭동이나 테러로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영국과 프랑스에게 패배하면서 영국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식민 통치 중단과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은 폭격과 살인, 체포와 추방 등으로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을 억압했습니다.

같은 시기,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실현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유대민족국가란 유대인도 함께 사는 국가가 아니라 유대인만으로 구성한 국가를 의미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유대민족국가의 건설이란 곧 아랍인들의 추방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대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시온주의자들의 목표와 행동이 침략과 점령일 뿐이라며 영국과 시온주의자에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1920~1930년대 영국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억압했는지, 팔레스타인인들이 왜 총을 들고 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폭동’이나 ‘테러’로 표현하는 것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보다는 오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누군가 일제 식민지시절 조선인들의 투쟁을 폭동이나 테러로 표현한다면 저나 다른 독자들도 화를 내거나 어이없어 하겠지요.

지지부진한 PLO의 활동에 분개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소규모 테러조직은 만들어 이스라엘 대한 기습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그 보복으로 난민촌으로 공격했다. - 235쪽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와 이스라엘 정부가 수없이 교환한 테러와 보복공격 - 225쪽

지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벌인 자살테러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 난민촌 습격, 학살과 파괴를 수없이 목격하였다. - 237쪽

증오가 증오를 일으키고, 테러와 보복학살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 되는 수난의 땅 팔레스타인 - 238, 239쪽

PLO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뜻하는 것으로, PLO는 팔레스타인의 여러 조직들이 연합한 단체입니다.

유시민의 글에서는 계속해서 ①팔레스타인인들이 테러를 저지르고 ②이스라엘이 보복을 했다고 합니다.

역사의 순서와 사고의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이해와 설명입니다. 역사의 순서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추방했고, 이에 대해 팔레스타인인들이 빼앗긴 땅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에 맞서 싸웠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행동은 ‘테러’이고 이스라엘의 행동은 ‘보복’이라고 설명합니다. 흔히 보수적인 언론에서 ‘팔레스타인인의 테러-이스라엘의 보복’, ‘팔레스타인인의 테러-이스라엘의 군사작전’과 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설명합니다.

‘테러와 보복’이라고 부를 만한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①이스라엘의 점령, 학살, 추방, 군사공격에 맞서는 ②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투쟁, 방어였습니다.

‘테러와 보복’이라는 인식의 틀은 역사의 순서를 뒤집을 뿐만 아니라 이 역사가 어떤 역사인지, 그 뿌리와 흐름을 잘못 이해했거나 왜곡한 것입니다.

2. 유엔과 건국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국제연합은 그 결정을 집행할 힘이 없었고 영국군은 1948년 5월15일을 기해 철수하겠다고 발을 뺐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투쟁은 불가피해졌다. - 230쪽

양측은 영국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넓은 지역을 확보하려고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랍 게릴라의 기습과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의 잔혹한 보복공격으로 팔레스타인은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 230쪽

먼저 이야기할 것은 국제연합(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키는 ‘결정’을 내릴만한 권한이 있냐는 겁니다. 1945년에 탄생한 유엔이 어떤 권한과 힘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와 아랍국가, 국제관리지역으로 나눌 수 있냐는 겁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이 요구했던 것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독립된 하나의 국가였지 양 민족으로 쪼개진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을 지원하고 있던 미국이 다른 국가들을 협박해서 분할안에 찬성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유시민의 글에서 유엔의 결정에 대한 평가가 없는 것은 일단 놔두더라도 유엔 분할안 결정과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한 설명에 문제가 있습니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투쟁이 불가피했다는 부분입니다.

1920~1930년대 아랍인들은 영국에 대항해 강력한 투쟁을 벌였지만 무력에서 우위에 있었던 영국은 아랍인들을 살해, 감금, 추방했습니다. 그 결과로 1947년 말,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아랍인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이 이미 아랍인들의 주요 조직을 파괴하고 많은 활동가들을 죽이고 가두거나 외국으로 추방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유대인들은 유대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돈과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만들고 군대를 길렀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 분할안이 결정되자 ‘유엔의 결정’이라는 명분을 얻은 유대인들은 본격적으로 아랍인 살인과 추방에 나섰습니다.

두 민족 사이의 불가피한 유혈충돌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일방적인 공격, 학살, 추방이 시작된 것입니다. 불가피한 유혈충돌이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계획한 것을 이제 실행한 것입니다. 

아랍 해방군은 전투경험이 부족한데다 장교들이 부패한 탓으로 사기가 떨어졌고,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 합동작전을 펼 수 없었다. - 230쪽

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아랍 연합군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데는 유시민의 설명처럼 이스라엘의 앞선 군사력과 아랍 연합군의 무능력이라는 요인이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단지 아랍 연합군이 무능력해서 패배한 것만은 아닙니다. 당시 아랍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던 국가는 요르단이었습니다. 요르단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이미 시온주의자들과 협상을 벌여 요르단이 이스라엘 국가 건설을 용인하는 대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를 요르단이 차지하는 것을 이스라엘이 용인하도록 협의를 하였습니다.

1차 중동전쟁에 요르단이 참전한 것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사전에 협의한 대로 예루살렘을 포함해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도 요르단은 1차 중동전쟁으로 예루살렘과 서안지구를 차지했습니다.

이집트의 참전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대결보다는 협력을 원했습니다. 참전도 아랍권에서 요르단이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라크 왕과 요르단 왕은 형제였습니다. 여기저기 눈치 보느라 이라크도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라크 정부는 군인들에게 이스라엘과 전투는 벌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1차 중동전쟁을 이스라엘의 유능과 아랍 연합군의 무능만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무력과 미국 및 소련의 지원, 아랍 국가들의 의도와 무능 등을 함께 설명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