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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선교사. 민족파괴

순돌이 아빠^.^ 2012. 7. 19. 13:55

․ 선교사가 쇠붙이 도구나 낚시용 끈 등과는 달리 아무런 필요도 없는 옷을 인디언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어리석은 고정관념이다. 전자는 노동을 용이하게 해주어 큰 도움을 주었지만, 금방 때가 타는 옷은 재산이 아닌 순수한 위광재가 되었다.

․ 오리노코 강가의 집단들과 내륙 지방의 부족들 사이의 차이는 근소하다. 전자의 집단들의 외모는 (옷 때문에) 점점 거지를 닮아가고 있지만, 사회적․종교적 생활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선교사의 시도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아직 “야만적인” 야노마미족, 즉 오만한 이교도 전사와 대조되는 “문명화된” 야노마미족(이러한 상태는 무시무시한 붕괴를 의미한다)은 존재하지 않는다.




․ 잔인한 마헤코도테리족이 서너 자루의 총을 소유하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에는 사용하지 않고 사냥에만 사용한다는 약속을 받고 선교사들이 준 것이다. 그러나 전사들에게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 야노마미족은 기본적으로 농경, 수렵, 어로-사냥감은 풍부한 편이다-와 채취를 하면서 생계를 대단히 잘 꾸려 나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필요가 모두 충족될뿐더러 축제 동안 소비도리 잉여의 생산도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곳은 풍요로운 사회이다...반면 선교사들은 몇몇 집단에서 불필요한 의복에 대한 인위적 욕구를 창출해 내고 있다.

․ 복음주의적 접근은 두 가지 확실성을 전제한다. 첫째로, 차이-이교(異敎)-는 용납될 수 없고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한 나쁜 차이는 개선될 수 있고 게다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민족말살적 태도는 오히려 낙관주의적이다. 원래는 나빴던 타자가 이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 기독교가 대변하는 완전성으로까지 동화(同化)를 통해 높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삐에르 끌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