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 자기, 육체를 껴안은 영성
우리가 과학을 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과학적 노동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여러 가지 차이 가운데 하나이다. - 137
야훼가 욕망하는 것은 ‘칭송’ 되는 것, 즉 사랑받는 것이다. 그가 정의로우려 하는 것은 칭송받기 위해서이다. 정의는 수단이고, 칭송 받는 것은 목적이다. 그래서 야훼는 칭송받는다는 목적을 달성 못할 경우 ‘분노발작’을 일으킨다. - 141
어쨌거나 융은 이성보다는 종교 편이다. 어떻든 간에 종교는 무의식의 심층에서 비롯된 것이고, 반면에 이성은 무의식의 심층으로부터 등을 돌린 의식적 과정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 - 148
융은 강령회의 경험을 통해 영혼의 실재를 확인한다. 이때 영혼이란 문자 그대로의 영혼이다. 즉 초월적인 비육체적 실체,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육체 속에 깃들고 우리가 죽으면 육체를 떠나가는 그러한 영적인 실체이다. - 163
융은 <정신과 삶>에서 정신을 “무의식이 아니라 보다 상급의 의식”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상급의 의식’에서 비롯되는 영적인 무의식은 질료에서 비롯되는 ‘하급의 의식’을 r자는 육체적 무의식과 구별될 수 있다. - 179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억압된 것이고 성적인 것이다. 하지만 융에게서 억압된 성적 무의식은 단지 전체 무의식의 아주 작은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융에게서의 무의식은 오히려 의식에 앞서서 주어진 것이다...인간은 이미 무의식의 체계적인 짜임새를 갖고서 태어난다는 것이다...이처럼 의식과는 무관하게, 의식에 앞서서 주어진 무의식은, 의식과는 무관하게 “인지하고, 생각하고, 감지하고, 원하고, 의도한다”. 즉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도 아니고, 의식에 대해 반응으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무의식은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고, 스스로를 조절한다. 그리하여 “무의식은 단지 ‘욕망’만 할 뿐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철회할 수도 있다” - 181
무의시은 의식의 주체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등장한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칸막이에 투과성이 있”는 신경증 환자가 그러하고, “무의식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는 정신병 환자가 그러하다. - 185
융은 1926년의 <정신과 삶>에서 자아와 의식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제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전히 형식적 방식으로 말을 하자면, 심리는 자아와 관계를 맺는 때부터 의식이라 불려진다. 이 관계가 없을 때는 사실은 무의식이 된다.” - 187
융은...“망각은 내용들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손쉽게 자아와의 접촉을 잃는지 보여준다.” 융은 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자아의 의식은 “인간 존재의 전체성을 포괄하지 않는다.” “자아는 그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융에 따를 때, “인간 존재의 전체성”을 대변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자기(selbst)'이다. - 188
프로이트에게서 자아심리학은 필연적이다. 무의식이 악마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무의식이 오히려 천사적인 융에게서 관건은 자아가 무의식을 얼마만큼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 188
집합무의식은 인류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이다. 융은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에서 집합무의식을 “정신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고...집합무의식이 보편적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구체적인 내용들을 갖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표상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갖는 일종의 형식적 ‘갖추어짐’이기 때문이다. 즉 형식적인 짜임새가 집합무의식으로 주어져 있고, 그것이 어떤 조건 속에서 특정한 사태들과 마주치면, 특정한 표상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 191, 192
원형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 마주칠 때 원천적인 형상들을 제시한다. - 199
융은 또 몇 쪽 뒤에서 “인간의 영적 소명”은 “무의식으로부터 강요”된 것이라고 한다. 즉 무의식이 인간에게 영적 소명을 구속적 방식으로 부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처럼 영적 소명을 부과하는 무의식을 ‘영적 무의식’이라고 칭할 수 있다. - 204
그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에서 “원형 고유의 삶의 관점”을 언급한다. 원형이 자신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 관점은 삶에 대한 관점인 것이다. 즉 원형은 삶에 대한 자기 고유의 관점을 갖는 주체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원형은 우리 내부의 또 다른 주체성, 자아와는 다른 주체성이다. - 214
융은...“원형의 진정으로 고유한 본질은 의식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초월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 215
자기는 일종의 초월적 원천으로부터 부과된, 삶의 원천적 목표이다. 이러한 원천적 목표로서 자기는 삶을 멀리서부터 이끈다. - 221
단독적 개인성은 보편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집단적인 것인 일반성은 보편성과 대립한다. 우리는 보편성을 완전히 구현하면서도 철저하게 개인적-단독적일 수 있다. - 222
‘일반성’은 한 사회에서 지배적인 것, 즉 일반적인 것이고, 보편성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 222
악을 껴안지 못하는 선은 진정한 선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악과 대립하는 순수한 선이야말로 필연성으로서의 악을 용서하지 못하는 진정한 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상 선을 통해 악이 행해진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 228
밀턴 에릭슨 - 자아와 비(非)자아적 주체
에릭슨은 새로운 최면현상들을 생산하고 정리하면서 무의식이라는 과학적 인식대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중요한 것은 현대 최면에서의 무의식에의 접근과 정신분석에서의 무의식에의 접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양적인 차이면서 동시에 질적인 차이다. 물론 현대 최면에서의 무의식에의 접근이 프로이트적 기여에 입각하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현대 최면은 무의식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그 속에서 체류하는 반면, 정신분석은 오로지 외적 징후들을 통해 무의식 바깥에서 그 속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할 뿐이다. - 244
최면은 의식의 층위를 제거하고, 무의식의 층위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 이유는 1)무의식이 문제여서 무의식을 변화시키려는 것이거나, 2)의식이 문제여서 무의식의 조명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키려는 것일 것이다. - 254
에릭슨은 “환자가 환자인 것은 그들이 자신의 고유한 무의식과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 “무의식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의식이 지나치게 제한되어 자신의 내면적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 255
자아가 의식하는 내적 현실은 매우 제한된 것이다. 자아는 기껏해야 1)현재의 생각들 2)전(前)의식적 기억의 대상들 3)현재의 감정 상태들만을 의식할 따름이다. 반면, 자아가 의식하지 못하는 엄청난 크기의 내적 현실이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정신분석과 최면이 발견한 것이다. - 256
에릭슨은 최면 유도의 과정을 피최면자의 주의를 외적 현실로부터 내적 현실로 이동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 257
의식의 주체가 자아인 한에서, “의식적 관점들에 대한 자유”가 자아의 해제를 통해 획득된다는 것 - 258
에릭슨은 또 같은 논문에서 깊은 단계의 트랜스에서는 매우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이 “신경증적 행동의 각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보고한다...신경증을 일으키는 무의식적 작용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단지 표층만을 차지한다는 것 - 268
트랜스의 수준이 깊어질수록 외적 현실이 부재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는 단순한 의식의 철회를 넘어서서 육체적 지각이 점점 소멸되기 때문이다...육체적 지각이 소멸되는 것은 육체적 지각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 지각의 주체는 바로 자아이다. - 269
에릭슨적 ‘치유’의 핵심은 환자의 내면을 읽고, 환자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기치유 능력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혼이 자아를 치유하는 것. - 286
프로이트에게서 자아란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외적 현실에 맞서서 내적 현실을 경영하는 주체적 존재인 것 - 287
에릭슨은 “의식은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즉 문턱값 이하로 내려가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자아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반면, 무의식은 잊지 않는다. - 291
최면 상태에서 양파를 사과라고 암시하면, 사과처럼 생각하고 맛있게 먹는 것처럼 말이다. 암시받은 대로 A와 B 그리고 E가 부재한다고 생각했던 두 피최면자는 자신들의 관념대로 현실을 본다. 즉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정적 환각이다. - 296
상이한 원천을 갖고 그리하여 구조적 성격이 다른 두 현상을 동일한 명칭으로 불러주면 안 된다는 것은 개념적 노동의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전제이다. - 296, 297
자아가 해제됨에 따라 시각적 지각도 상실된다. 자아가 없으면, 육체적 눈이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놀랍게도 자아가 시각적 지각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보려고 하는 것을 육체적 눈이 본다는 것, 자아가 보려고 하지 않으면 육체적 눈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자아는 시각적 지각의 주체라는 것 - 297
자아의 해제를 입증하는 또 다른 한 현상은 탈인격화이다. 탈인격화란 최면 상태에서 피최면자가 자신의 이름 등을 망각함으로써,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 310
내 이름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무척이나 당혹스런 일이다. 더욱이 이름은 사회관계의 결절점(結節點)이다...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깡그리 날려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최면 상태에서 이름을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의 정체성의 근간으로 집착하고 있는 이름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진정한 나 자신은 사호가 내게 부여한 그 이름과는 무관하게 존재할 수도 있다. 심층적인 내면으로서. - 311
트랜스 사이의 연속성은 과거의 트랜스와 현재의 트랜스 사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트랜스와 다른 사람의 트랜스 사이에도 존재한다. 즉 트랜스 상태의 나는 트랜스 상태의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 - 313
자아가 해제되었다는 것은 타자들에 대한 자아의 방어가 해제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가 해제되면, 타자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넓어진다. - 318
에릭슨에 따르면, 후최면 암시를 받은 피최면자는 “그 행위를 자발적인 것, 즉 스스로 결정한 것인 줄 알고 행한다”. 이 말은 스피노자가 <윤리학>에서 말한 ‘자유의 착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한다고 믿는 착각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피최면자는 최면사가 결정해준 행위를 자신이 결정한 줄 알고 행한다는 것이다. - 320
에릭슨은 최면사가 피최면자의 내면을 지배할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즉 1)암시의 한계와 2)부적절한 암시의 불가능성이 그것이다. - 321
지속적인 치료 결과를 갖는 것은 “과거 경험을 재결합, 재조직하는 내적 과정”이다. 이 과정은 ‘내적’이다. 즉 환자가 스스로 주도해서 자신의 “경험을 재결합, 재조직”한다는 것이다. - 321
에릭슨은 말한다. “최면은 사람들을 바꾸지 않는다. 사람들이 과거에 겪은 경험들을 바꿀 수 없듯이 말이다. 최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해주고, 더 적절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게 해준다” - 322
놀라운 것은 피실험자들이 깨어있을 때보다 최면 상태에서 더 건강한 판단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에릭슨은 이를 “트랜스 자체가 일종의 보호받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적 환경과의 접촉이 차단된 깊은 ‘평화의 상태’인 트랜스 상태에서는 보다 정확한 판단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실험자들은 각성 상태에서는 행할 수 있는 가벼운 일탈 행위도 트랜스 상태에서는 거부한다. - 323
결국 피실험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주거나 고통을 가하거나 피해를 입히거나 범죄를 행하라는 부적절한 암시들을 단호히 거부하고 또 분노한다. 어떤 피실험자는 최면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 323
피최면자는 최면사의 암시가 적절한 한에서 그 암시를 수용한다는 것 - 324
최면과학은 인식론적으로 객관주의적 유물론이 아니라 주관적 구성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 325
의식은 자아에 상관적이다. 하지만 자아의 지각과 선택이 완전히 의식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거의 자동적이고, 따라서 오히려 무의식적이다. 더욱이 자아의 나르시스적 욕망은 무의식을 깊이 각인한다. 우리가 의식의 매개 없이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도록 말이다. - 332
트랜스 상태에서 비자아적 주체는 1)무의식적 관념들과 2)감정적 콤플렉스들을 관통해서 3)과거의 경험들을 바라본다. 이것이 바로 퇴행이다. - 335
트랜스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의 고유한 특징 하나는 문자주의다. 피최면자는 최면사의 질문이나 지시에 대해 그야말로 ‘문자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당신의 이름을 알아도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영어식 질문에 피최면자는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또는 “잠시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일어나는 대신 “네”라고 대답한다. - 346
우리는 일상적 대화 속에서 상대의 언어들을 항상 우리의 언어로 바꿔서 듣는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존중은 그의 언어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최면자의 문자주의는 타자에 대한 철저한 존중에 입각한 것이 아닐까? -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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