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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영 - [내면으로-라깡․융․밀턴 에릭슨을 거쳐서] - 1

순돌이 아빠^.^ 2012. 10. 7. 17:19


이종영, 울력, 2012



책을 덮으며 한 인간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책의 막바지에 이종영이 제시한 영혼의 개념이 엄밀하지 못하고 어딘가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모자란 부분은 다음 사람들이 채워 가면 되겠지요. 프로이트가 많은 것을 밝혔지만 알아내지 못한 것들을 다음 사람들이 조금씩 밝혀갔듯이.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호기심에 책을 잡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어려워’ ‘지루해’ 하시면서 책을 덮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저라고 어디 책 내용을 죄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래도 재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혁명과 해방에 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웬 영혼?’이라며 물음을 던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혁명이 무언지, 그것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에 대한 논의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라는 게 제 생각이구요.

인간의 마음이나 영혼에 대해서 시적인 표현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 마음이나 영혼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거구요.

영혼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으로도 좋은 얘기가 많은 책입니다.


머리말

이 연구를 행하는 나의 기본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연구는 오직 ‘내면의 과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내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경우, 그 설명은 반드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9쪽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의 설명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 자본가의 욕망이라는 진정한 뿌리로부터 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10

‘외화’란 인간의 의식이 외적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 객체화되는 것 - 10

‘자립화’...외화된 현실이 인간으로부터 독립성을 갖게 되는 상황, 다시 말해 자기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상황 - 11

‘소외’는 그처럼 자립화한 현실과 인간의 관계이다. 그 관계는 a)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것 같은 낯설음 b)대립 c)오리혀 지배 받음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 11

소외된 제도 또는 체제는 결코 내면을 이탈하지 않는다. 이른바 소외된 것들은 내면을 반영한다. 이는 자명하다. 그것들이 내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 한에서 말이다. 더욱이 소외된 것들은 집합적 이해관계에 의해 지탱되고 유지된다. 이때 집합적 이해관계란 집합적 욕망들이 결합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 12

소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소외를 만들어낸 내면이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소외에 맞서는 행위가 소외의 형태를 변화시키더라도 소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 이 사실은 소외가 우리의 내면을 적어도 그 한 측면에서 온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면의 과학’이다. 오직 ‘내면의 과학’만이 소외의 완전한 지양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 12

한번 성립한 타자와의 관계는 자립화해서 내 손을 벗어난다는 것, 그래서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관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진다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다시 말해 내가 그 관계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 것은, 나의 욕망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 14

관계가 정념을 촉발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념이 이미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내면이 관계 속에서 정념으로 현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적 현상들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내면→관계→내면의 현상형태’의 순서를 취해야 한다. - 15

라깡에게서 자아(moi)는 나르시스적 주체에 의해 경영되는 대상적 존재, 다시 말해 자기가 자신에 대해 갖는 허구적 이미지들의 합체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이상적 자아상인 그 이미지들을 향유하고 과시하며 보호․관리․경영한다. 결국 라깡에게서 자아는 여태껏 주체라고 오해된 거짓 주체이자 실제로는 자신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들일 뿐이다. - 19

융에게서 자아는 무의식에 대립하는 의식의 주체이다. 밀턴 에릭슨에게도 자아(ego)는 의식의 주체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자아란 무엇보다도 최면유도를 방해하는 장치이다. 최면은 자아를 해체함으로써만 가능하고, 자아의 해체와 더불어 비자아적 주체가 등장한다. - 20


라깡 - 최종적 주체성을 찾아서

라깡은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인간의 행동, 사고, 느낌 등이 모두 주체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대부분은 비(非)주체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내부에서 어떤 것이 진정으로 주체적인지 묻고 또 찾아다닌다. - 25

주체성은 내적인 것이어야 주체성일 수 있다. 외적인 것이라면 타자성이다. 또 주체성은 진정한 주체성이기 위해 최종적이어야 한다. 최종적이지 않은 것들은 다만 주체성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이다. 물론 언제나 의심들이 가능하다. 인간 내부에 행동의 궁극적 동인으로서 주체성이 과연 존재할까? 인간 내부에서 진정으로 주체적인 것은 단 하나뿐일까? - 26

무의식과 관계하는 꿈속의 이미지들의 놀이, 즉 시니피앙들의 놀이에서 생략되는 것은 ‘존재적 수준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존재의 결여’로부터 욕망이 성립한다. 욕망은 다른 아닌 그 ‘존재의 결여’에 대한 욕망이다. - 32

1)시니피앙들 사이의 환유적 대체
2)존재의 결여
3)욕망
1)로 인해 2)가 감춰진다. 그래서 3)은 2)를 쫓아다닌다. 이것이 핵심적 구조이다. - 32

S'/S는 또 다른 시니피앙 S'가 시니피앙 S를 은유적으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는 횡선을 넘어가는 것이다. 즉 S(+)s는 시니피에 s가 횡선을 뛰어넘어 시니피앙 S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횡선을 뛰어넘어 등장하는 시니피에 s로 인해, 라깡은 은유를 징후로 간주한다. 징후란 숨겨져 있는 무엇을 표면에 드러내주는 신호와 같은 것이므로 말이다. - 33

시니피앙의 주체란 언표된 것 속의 주체이고, 시니피에의 주체란 무의식의 주체이다. 이 둘은 대립된다기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장(場)에 속한다...시니피앙들이 계속 의미작용을 하더라도, 그 의미작용은 시니피에에 가닿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니피에는 또 다른 장에 위치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라깡은 말한다. “내가 있지 않은 곳에서 나는 사고하고, 내가 사고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있다”...여기서 사고는 무의식적 사고...‘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사고’를 대리시키고 있는 것 - 34

무의식적 사고가 진정한 주체성을 구성한다면, 이 ‘비(非)나’가 진정한 주체이다. ‘의식적인 나’는 다만 시니피앙의 주체일 뿐이다. - 34

새로운 시니피앙을 계속 찾아다니는 것이 무의식적 사고다. - 35

라깡은 말한다...의식적인 나 자신을 장난감처럼 농락하는 나의 사고는 무의식적 사고다. “내가 사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무의식이 사고한다는 것을 나의 의식이 짐작도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곳”은 욕망의 장소이다. 욕망은 무의식적 사고를 움직인다. 욕망은 “내가 무엇인” 그것이다. 즉 나의 진정한 존재는 욕망이다. - 36

욕망은 결여된 존재를 표상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니피앙들을 반복적으로 뒤쫓는다. - 37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관계, 즉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이 되려는 관계이다. 아이에게서 어머니의 욕망은 남근으로 상징화된다. 물론 이때 남근은 남성의 성기가 아니라 어머니가 욕망하는 그 어떤 것이다. “욕망의 상상적 대상”은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라고 상상하는 것, 즉 남근이다. - 42

라깡은 말한다. “여기서 남근은 시니피앙을 지표(指標)로 갖는 욕망은, 소유하지 못할 수 있다는 위협 또는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접속됩니다” - 50, 51





라깡...인간의 근본적 욕망은 사랑에 대한 욕망, 더 나아가 완전한 사랑을 받으려는 욕망이라는 것 - 55

형식적 유상성에 따라 다른 영역에서 활용되는 외래적 개념들은 관점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적용될 수 있는 조작적 도구들로 전락하는 것 - 58

라깡은 이 논문에서 욕망을 ‘존재에의 결여의 환유’로 정식화한다...존재에의 결여를 메울 수 없어서, 존재에의 결여의 메움을 대리로 표상하는 다른 것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 - 59

라깡에게서 존재론적 욕망은 “비록 약간 가느다란 남근이라 할지라도 남근으로 존재하는 것,” 그래서 큰 타자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것이다...하지만 우리들의 존재를 떠받치는 존재론적 열망이 그저 남근으로 존재하려는 그것뿐인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들의 존재를 이끄는 것은 권력에의 욕망과 결합한 성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을 뛰어넘는 다른 것은 없는 것일까? - 62

거세는 욕망을 관통한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말이다.
1) 거세된 것을 뒤쫓게 또는 단지 바라보게 하면서.
2) 거세된 것에 접근할 때 흥분량을 높여서, 거세된 것을 욕망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 66
즉 거세는 욕망의 이중성을 규정한다. x를 향하면서도 x를 욕망하지 못하는 이중성이 그것이다. 욕망은 거세된 것 주위를 맴돌 뿐이며, 거세된 것 자체를 욕망하지는 못한다. 그것에 가까이 가면 불쾌해지기 때문이다. - 66

주체의 판타즘을 건드려 욕망을 촉발하고, 그래서 주체를 그 앞에 멈춰 세우는 것이다. 라깡은 그 대상을 ‘a'라고 부른다 - 73

대상 a들은 상징적 질서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상징적 질서로 인해 상실된 것이다. - 80

욕망의 대상인 대상a가 구조의 효과라는 사실은 욕망이 구조에 공액적(共軛的)이 되었음을 뜻한다. 즉 구조가 성립하면서 그 효과로서의 결여가 동시에 성립했다는 것이다. 결여 자체가 구조에 의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 82

무의식적 사고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무의식적 주체성이 이미 항상 존재한다는 것 - 89

라깡에 따를 때, 지식은 주체를 ‘비(非)규정’한다. 이 말은 지식을 통해서는 주체의 위치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식에 내재된 시니피앙들을 통해서는 주체에 가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깡은 주체를 “지식에서 빠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 97

라깡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무의식적 지식은 자신을 동기화하는 것을 빼놓고서는 모든 것을 안다.” 즉 성에 대해서만 모른다는 것이다. - 97

라깡은...무의식적 사고의 짜임새 내부로 전혀 파고들지 못했다. - 99

라깡은 [세미나] 14집에서 우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명제를 부정한다. 하지만 이 부정은 코기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으로서의 무의식적 코기토를 확립하기 위한 것 - 102

우리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선택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잃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읽는 것은 단지 ‘나’의 존재일 뿐이다. 즉 ‘비(非)-나’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선택하면, 우리는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생각한다”는 명제에 가닿는다. 하지만 이때 생각하는 것은 ‘비-나’이다. 즉 우리에게 남는 것은 ‘비-나’의 사고, 무의식적 사고다. - 105

‘상블랑(semblant)'은 ’...처럼 보인다‘는 뜻을 갖는 동사 ’상블레(sembler)'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인 척하는 것’ ‘ 거짓된 꾸밈’ ‘흉내’ 등의 뜻을 지닌다. - 116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에게 상블랑이 향유라는 것은 향유가 상블랑임을 충분히 말해준다”. 즉 남자가 남근의 상블랑을 향유한다는 것은 그 향유 자체가 상블랑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자들은 그 흉내를 향유인 줄 알고 살겠지만, 흉내 내는 것을 향유하는 것은 진정한 향유일 수 없고 단지 향유의 흉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118

과학적 노동의 유일한 지표는 실재이다. - 124

그는 6월26일의 세미나를 마쳐 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 그 자체는, 만남 속에서 존재에 가닿는 사랑이다” 즉 사랑은 만남 속에서 존재에 가닿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 자체가 존재 자체라는 것이다. 이때의 사랑은, 라깡이 그렇게 말하기를 자제하고 있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영혼이 영혼을 영혼하는” 사랑이다. -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