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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국가가 없는 사회와 있는 사회

순돌이 아빠^.^ 2013. 3. 23. 09:34


대다수 인디언 사회들의 정치조직의 특징은 사회계층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권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중 일부의 사회, 예를 들어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오나족과 야간족에게는 추장제 자체가 없고 히바로족에게는 추장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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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인디언 추장들 중 대다수는 무위도식하는 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반대로 부족민들이 기대하는 관대함에 부응해야 하는 추장은 부족민들에게 줄 선물을 마련하고자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추장은 다른 집단과의 교역을 통해 재화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과 노동을 통해 재화를 마련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흥미롭게도 바로 지도자이다.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희랍인들은 도시가 건설되어 있지 않았거나 대체로 도시적인 취락양식이 침투해 있지 않던, 요컨대 아직도 부족집단이 함께 살고 있던 곳, 즉 일반적으로 촌락에서...살고 있었다. 이러한 촌락들은 성벽이 없었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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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정주체제는 희랍의 중세기 동안에 종족집단이 해체됨과 더불어 붕괴되고 마는데, 그것은 두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하나는 이웃한 일정수의 촌락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결합된...형태, 즉 개개의 공동체들이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지닌채 하나의 촌락을 구성하는 공동체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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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연합이 아니라 통일된 도시공동체...이 경우에 병합된 한 종족 혹은 지역의 모든 촌락의 주민들은 실제로 한 곳에 모여 살게 된 것이 아니라, 다만 당해지역의 권력이 가장 주요한 촌락-그것은 흔히 공동대피소의 역할을 하고 있던 성벽을 두른 구릉지, 즉 이른바 아크로폴리스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로 집중되었을 뿐이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민족집단도 자연히 이러한 움직임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그 주요촌락은 자치적 공동체, 즉 폴리스가 된 반면, 그와 동시에 나머지 촌락들은 정치적으로 폴리스에 예속되게 되었으므로 지위가 하락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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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pidum은 방위시설을 지칭하는 것에서 방위시설을 갖춘 공간을 지칭하는 말로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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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벽과 해자 안쪽만이 oppidum으로 불리웠으며, 그것의 한계는 바로 방벽과 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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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pidani는 방벽내의 시민, 곧 방벽 밖에 거주하는 자치체의 성원들인 농촌평민과는 대비되는 도시민을 의미했던’ 것이다. ...
고대이탈리아의 oppidum의 개념을 구성하는 3개의 요소를 밝혀낸 셈인데, 그것은 곧 축성, 방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한정된 공간, 그리고 자율성의 결여였다. pagus가 농촌자치체였다면, oppidum은 그 영토내에 자리잡은 성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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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urbs와 농촌, 그리고 시벽내의 사람과 농촌 평민 사이의 대비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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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게 방비된 urbs가 귀족의 독점적인 주거지가 되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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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최초의 urbs에 대해서 oppidum의 경우보다도 더 온당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즉 urbs는 처음부터 성벽과 해자를 그 한계로 하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추측컨대는 행정면에 있어서도 oppidum과 대조적으로 주변의 평야지대와 분리되어 있었다.


- 글출처 : 고려대학교대학원서양고대사연구실, <서양고전고대경제와 노예제> 가운데 E.Kornemann, '고대도시의 기원론'




촌락을 단위로 하는 씨족은 그들의 중요한 일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처리해 나가는 공동체였다. 씨족원들은 그들의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에 모여서 회의를 하곤 하였는데, 신라의 화백이 그 전통을 이어내려온 것임은 널리 인정되어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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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을 대표하는 씨족장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는 씨족회의에서 선거된 것이며, 잘못이 있으면 물러나야 했다.

- 이기백. 이기동 <한국사 강좌1 - 고대편> 가운데




가락국이 성립되기 전 김해 지역에 존재한 9촌에는 국(國)의 칭호도 없고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으며, 또 사로국이 세워지기 전 경주의 6촌에는 군주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일(放逸)하였다고 한다. 이는 9촌이나 6촌의 군주가 없는 사회, 아직까지 정치적 지배자가 출현하지 않은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읍락사회는 정치적으로 평등한 관계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읍락 내부의 사회관계가 평등했으므로, 읍락 전체와 관련되는 중요한 일들은 읍락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의논을 거쳐 정하였다. 김해 지역의 경우 구지봉(龜旨峯)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을 때 촌간으로 표현된 읍락 우두머리들이 중서(衆庶) 2~3백 명을 거느리고 모여서 일을 논의하여 처리하였다든가, 경주 지역의 경우 각 부部의 조상들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논의하였다는 기록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가락의 9촌간들이 수로를 옹립한 것과 사로의 6촌장들이 혁거세를 옹립한 것도 공동체적 의사 결정에 따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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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락사회에서는 나라 이름도 없고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그러나 국이 형성되면서 나라 이름이 생기고 군신의 칭호가 생겼다. 이는 정치적 구심력이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라 국의 수장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 노중국, <백제사회사상사> 가운데

 

 


 

 

방사성탄소 측정에 의해 서기전 6000년대 말기와 3000년대 초기 사이로 확고히 추정되는 (중국) 양사오仰韶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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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과 족族의 구성원들이 거주하였던 농경 부락은 분명히 기본적인 사회단위였으며 부락보다 규모가 큰 정치 집단이 존재하였던 증거나 전쟁이나 사회계급분화가 발생하였던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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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화의 관점에서 고대 중국문명의 형성 과정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단계를 거쳤다.

1 부락사회 단계
양사오 문화와 칭리엔강문화, 개개의 부락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사회단위였다

2 부락 상호간의 통합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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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속체의 본질...사회 내부에서 빈부의 차이 발생, 내외부에서의 폭력행위의 증거, 전문화된 수공업(질그릇과 같은), 아마도 상류층에게만 기여했을 종교전문가의 존재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다소 영속성을 띤 부락 상호간의 연맹체가 결속되어 전임 통치자에 의해 통치되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산-시陜西, 허난河南, 산똥의 롱산山東龍山 문화들을 이 단계로 분류하는데 동부 해안의 따원커우大汶口문화도 이 발전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3 국가사회 단계...고고학적으로는 얼리터우와 그 동시대 문명과 상문명, 저우문명으로 일컬어진다. 이 단계에서 주거지는 복잡하고 영구적인 조직망(보통 여러 단계로 계층화된)을 형성한다. 이러한 조직망의 전임 통치권은 특정의 성姓이나 족族이 독점하게 되어 통치자들은 비교적 영속적인 통제수단과 행정기구에 의해 보조를 받았는데, 이러한 행정기구에는 내외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억압할 수 있는 기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 장광직, <상문명商文明> 가운데




전승에 의하면 기원전 500년경까지의 로마는 왕정체제하에 있었다. 왕정의 실체를 왕과 원로원 및 쿠리아회를 중심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왕은 초기 로마 국가의 통일과 권력 그리고 권위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왕위는 종신직이었으나 세습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선출되었다. 또한 왕은 스스로 신의 후손임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왕은 그리스 폴리스들의 왕들과 달랐을 뿐 아니라 왕권은 사실상 귀족들에 의해 제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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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은 전쟁에서 군대를 효율적으로 지휘할 필요성 때문에 군사적 분야에서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나, 내정면에서 왕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씨족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통제하는 권한을 존중하였다고 생각된다. - 255, 256

원로원 의원들은 소집된 가부장들이라 불렸다. 초기 원로원은 씨족장들의 모임이었을 것...적어도 왕정 초기에 원로원 의원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동료 중에서 왕을 선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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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아(curia)는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씨족들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되는 단위로서 총 30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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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B.C. 578~535)는 군사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종래 로마군대는 1개의 쿠리아가 각각 10명의 기병과 100명의 보병을 제공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의 부족에서 100명의 기병과 1,000명의 보병이 소집될 수 있었다. 결국 군대조직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혈연적 단위이던 쿠리아와 부족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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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혈연적인 세 부족제를 폐지하고 시민들을 20개의 거주단위(tribus)에 등록시켰다. 그리하여 4개의 도시 트리부스와 16개의 농촌 트리부스는 또한 센서스(census)의 단위가 되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트리부스별로 시민을 등록하고 군대소집과 징세를 위해 시민들의 재산과 연령 등을 면밀히 평가하는 센서스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제 로마는 예전에 씨족들에 기초한 사회로부터 공동체와 군대의 구성원들인 시민들에 기초를 두는 사회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 글출처 : 김진경 외, <서양 고대사 강의> 가운데, '로마 공화정의 발달과 몰락'에서




(중국) 허난성 얼리터우 유적지에서 얻은 방사성탄소측정연대와 하상주단대공정의 결과를 토대로 이 문화가 기원전 19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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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후기 롱산龍山문화가 얼리터우문화로 발전했을 때 취락형태와 물질문화에서 다음의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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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역 정치구조가 다수의 상쟁하는 소규모 정치체가 병존하던 양식에서 하나의 거대 중심지가 광범위한 지역의 소규모 중심지와 촌락들을 지배하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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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허난롱산河南龍山문화에 최소한 6개 유형이 존재할 정도로 다양하던 도기의 유형이 얼리터우문화에서는 얼리터우와 동샤펑 두 종류로 분류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균일해졌다. 이는 정치적 일체화와 관련된 수공업 생산의 전문화와 표준화를 암시한다.


(5) 신석기시대에 높은 사회신분을 상징하던 옥기나 백도(白陶)같은 섬세한 도기 이외에 주로 무기나 예기로 사용된 청동기가 최초로 신분 상징이 되었다. 대체로 얼리터우 지역에 기반을 둔 청동기 생산은 군사나 제사에서의 이용 같이 국가의 사무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것 같다.


(6) 사치품의 장거리 교역이 새로운 수준으로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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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장 중요한 변화로, 얼리터우 유적지 자체가 고도로 계층 분화된 도시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러한 발전은 무덤에 반영된 뚜렷한 빈부격차와 거대한 종묘/궁전구의 건설, 청동기나 골기, 질그릇 제조를 포함한 다양한 전문화된 수공업에 조상하던 인구의 집중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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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터우 시기에 최초로 전체 사회체계에 걸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 경제적으로 통합되고 정치적으로 집권화된 새로운 사회, 즉 국가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 연구에서의 국가는 전문적 통치 계급과 평민 계급의 최소한 두 층으로 이루어진 사회로 정의할 수 있다. 통치 계급은 집권화된 의사결정 과정을 장악했는데 전문화된 조직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이러한 결정을 실행했다. 나아가 국가 수준의 사회조직은 보통 3등급이나 그 이상 수준의 행정 구조를 암시하는 4등급 혹은 그 이상으로 계급 분화된 지역 취락을 발전시킨다.


- Li Liu, Xingcan Chen : <중국 고대국가의 형성> 가운데

 



이처럼 나이나 성별에 따라 별개의 집단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 촌락 내부에 개개의 가족구성과는 별도로 가족보다 우월한 조직이 있었으며 이것인 죽은 후에도 촌락구성원을 규제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유아나 청소년을 제외한 성인의 경우는 극히 소수의 예외 이외에는 부장품 등에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 주목된다. 생전에는 촌락구성원으로서 동등한 신분계층에 속하여 특별히 권력을 독점하는 사람도 없으며 장로라 해도 기본적으로는 촌락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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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의 정치는 각 씨족의 장로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물론 이들 장로는 각 씨족성원의 의사를 대표하는 자로서 결코 특권적인 지배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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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시대가 내려가 청련강 문화의 유적을 보면 빈부의 차이가 성인의 묘에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예를들면 비현 대돈자에서는 부장품이 많은 경우는 50~60개나 되는데 비하여 적은 경우는 아무것도 없든가 1~2개인 것도 발견되었다. 더욱이 50~60개의 부장품이 발견된 묘는 모두 남자의 묘인데 부장품 가운데 돌도끼나 돌자귀 등은 남자 묘에 많고, 실을 뽑는 실틀 등은 여자 묘에서 많이 발견된다. 또한 돌징은 여자에게, 허리에 차는 거북껍질은 남자에 한정되는 등 남자와 여자에게 명확한 구별과 분업이 나타난다. 사회적으로 남자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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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권력의 형성은 씨족제도 및 결혼제도의 변화, 사회적 분업의 발생, 사유제의 성립·발전, 계급과 신분의 변화 등 전반적인 사회구조의 변화와 병행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의 연구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B.C.3000년경에 모계씨쪽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전환과 함께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 다시 부분적으로 일부다처제로 발전하고 이와 병행하여 부계가족 중심의 사유제발전과 계급분화라는 도식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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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후기에는 대가족제내에서 족장의 권한이 한층 강화되어 족장 개인이 막강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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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가족 내부에서 족인으로서 평등성이 무너지고 권력을 장악한 자와 그 권력에 복종하는 자의 계급분화가 명확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가족 집단 사이에도 왕과 결합하여 상위에 오른 집단과 그 지배하에 들어간 집단의 분화가 보다 명확해져서 왕을 정점으로 하는 집단간의 서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상왕실의 지배력은 왕으로부터 대족장에게, 대족장으로부터 소족장에게 종적으로 침투하고, 횡적으로는 족장으로부터 족인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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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는 선비족 탁발부가 세웠던 국가...새외의 여러 부족을 제압하여 탁발부를 중심으로 한 부족 연합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국가라고는 해도 당시는 부족의 자립성에 근거한 느슨한 결합이었기 때문에 정세에 따라 결집과 이산을 반복하였다.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점차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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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발규시대에 이르러 선비족에게는 획기적인 정책이 단행된다. 즉 부족제를 해체했던 것이다. 보통 부락해산이라고 하는 개혁조치를 통하여 해체된 부족은 일정한 토지에 정착을 명령받고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들은 둔전을 경작하면서 농업생산을 발전시켰다. 또한 종래 부락을 통솔하고 있던 군장君長·대인大人의 통솔권을 박탈하여 그들도 일반 부족민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백성으로 편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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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차원으로 보자면 부족연합에서 통일제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종래 군장·대인을 통하여 간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던 부족민들은 이후 황제권에 직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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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 후의 부족민을 장악하는 기관으로 8국(國:8부部라고도 함)을 설치하고 각각 8부 대부(大夫) 1명씩을 임명하였다. 8국은 말하자면 옛 부족민을 위한 특별 행정기관이고 농경의 장려, 군수품의 징발 등을 시행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이것은 한족의 군현과 대응한다. 이와 동시에 구 ‘군장·대인’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하여 2천여명에게 작위를 주고 있다.


- 이근명, <중국역사 상권> 가운데 '제1부 제1장 원시사회 - 구.신석기 시대' 가운데




몽고족은 <당서唐書>에 ‘몽올실위(蒙兀室韋)’라고 항 실위족의 일부로 처음 언급되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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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위족에 대한 기록에 당시 그들은 몇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대군장’이 없이 각각의 집단은 단지 ‘바가투르(baghatur)’ 즉 용사라는 칭호를 갖는 수령등릐 지배를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는 데에서, 정치적으로도 아직 초부조적인 군주권의 출현을 보지 못한 미분화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249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걸쳐 이주한 몽고족은 풍부한 목장지대가 있는 새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경제적으로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 “정북(征北)을 가면 몽고리국蒙古里國에 이르게 되는데, 그 나라에는 관할하는 군장이 없을 뿐 아니라 농사도 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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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비사>에 의하면 당시 가장 기본적인 친족집단은 ‘아일(ayil)'이라고 불리운 개별 유목가호였고, 아이들에 의해 구성되는 동일한 조상을 갖는다고 믿는 ’오복(oboq)' 즉 씨족이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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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성의 가장 큰 단위는 ‘울루스(ulus)' 혹은 ’이르겐(irgetn)'이라 불리운 부족(연합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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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한의 천호제는 달랐다. 그가 임명한 천호장들의 배경을 분석해 보면,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막우’ 출신이거나 아니면 혼인·입양으로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또한 그는 95개의 천호를 모두 셋으로 나누어 3개의 만호로 편성하고, 주수만호장에 무할리, 우수만호장에 보오르추, 중군만호장에 나야아를 각각 임명하는데, 이 세 명은 모두 그가 가장 신뢰하던 막우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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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볼 때 1206년 천호제와 친위대를 골간으로 하여 ‘대몽고제국’의 기본구조는 고대 유목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천호제는 기본 부족구조의 해체·재편 위에서 세워진 것이고, 친위대는 그에게 그러한 조치가 유발할지도 모를 반발을 억압할 수 있는 군사력을 부여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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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권력기반은 재편된 부족구조와 탈부족적인 군사력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 김호동, '몽고제국의 형성과 전개',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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