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책과영화

강동진, <일본근대사>

순돌이 아빠^.^ 2013. 8. 26. 22:34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1985



제1장 구미자본주의의 침입과 일본의 변화

19세기 중엽, 일본의 자연경제, 곧 농민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경지면적과 쌀의 수확량은 늘지 않았으며 신흥지주들의 토지소유 확장에 따라 다수의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 13

상품생산경제가 점차로 확대...공장제수공업이 서서히 발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은 면직물 공업에서 특히 두드러졌다...면직물의 매뉴팩처에는 8내지 10세의 소년노동이 많았는데 이들은 빈농과 소작인의 딸로서, 4, 5냥(兩)의 몸값에 팔려와, 가혹한 노동조건 아래서 노예와 같이 일하고 있었다. - 13

개국 전야의 일본에서 두드러진 사회․계급 관계는, 지배계급인 무사계급의 힘이 크게 약화된 반면, 종전에 천대받던 상민(常民, 즉 町人)의 힘이 커진 것과, 농민의 양극적 분해가 급속히 진행...같은 농민이라도 상층부에서 지주, 상인, 기업가 등이 생겨나고, 하층부에서는 토지 없는 많은 농민과 소작인이 생겨났다. 이 무렵에 빈발하였던 농민봉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 15

신층 지주들 가운데에는 농민에게 무거운 소작료를 강요하여 치부한 돈으로 고리대금업, 상업에까지 손을 뻗친 자도 있었다. 이들은 금전과 물품을 지방영주에게 진상하여 무사계급으로 신분을 바꾸어 성(姓, 일본에서는 무사계급만이 성을 가질 수 있었다)과 칼을 찰 자격을 인정받았다. - 15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특권적 대상인은 더 많은 치부를 원하여, 기업활동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상의 자유, 봉건적 할거의 폐지 등의 요구를 가지게 되었다. - 16

하급무사의 대다수는 막부나 대명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체제 개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한편 하급무사와 시민계급은 농민운동, 특히 빈농과 소작인의 봉기에 대하여는 철저히 반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주이면서 동시에 고리대급업자였기 때문이다. 1868년의 명치유신이 시민혁명으로서는 불철저하고 미완성으로 끝난 최대 요인도, 무사․시민 두 계급이 추진하던 막부 반대운동과 농민․도시빈민의 봉건제도 반대의 대중운동 사이의 연계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에 있었던 것이다. - 17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서 주목되는 것은 미국은 북부 태평양에서 주도적 세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아시아 접근 목적은 무역 외에, 19세기의 20년부터 발전시켜온 고래잡이를 위한 거점을 일본에 구하고 있었던 사정과 관련된다)1840년대에는 700척의 포경선이 있었다). 또 19세기의 4, 50년대에는 기선이 태평양을 횡단할 정도였으므로, 석탄 기지 확보도 미국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미국은 중국에서 우위를 점한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일본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당면 긴급과제였던 것이다. - 19

1850년대에 일본은 구미 열강의 압력 앞에 마침내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확립기에 있었던 발달한 세계자본주의 시장에 단숨에 편입되었다는 점...외래자본주의의 군사적 위협 앞에 종속적으로 편입되었다는점...구미 열강의 직접적인 점령 아래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 개국 후의 일본사회의 급속한 변화의 한 조건을 구성한다. - 19

구미 열강은 자유무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군사력을 통해서 쇄국정책의 포기와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였다. 이른바 포함정책砲艦政策을 강행한 것이다. - 21

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에 있어서 열강이 가장 중시한 것은 막대한 자원과 인구를 가진 중국이었다. - 21

19세기 중기에서 후기까지의 초기 민족해방운동에서 주목되는 특색은, 농민이 운동의 주력이 되어, 대규모의 농민반란 내지 농민전쟁의 형태를 취하였다는 사실이다. 구미자본주의의 침략이 후진지역의 재래산업을 파괴하고 그것을 식민지 본국을 위한 식민지적인 원료․식량의 공급지로 바꾸어놓은 결과, 농민이 가장 혹심한 착취를 당하였기 때문 - 22

1854년 3월에 미일화친조약을 체결...시모다, 하고다떼 두 항구의 개항과, 항해중인 미국인에게 석탄, 식량, 물 등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줄 것과 영사 주재, 최혜국대우 등을 규정 - 24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미국이 일찍부터 일본을 군사기지로 사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제4조의 “합중국의 해군 군수품은 관세 없이 가나가와, 하꼬다떼, 나가사끼에 양륙시킬 수 있다”는 규정이 그것 - 25

일본의 세계시장 편입이 구미자본주의의 상품판매시장, 원료․식료품의 구매시장이라는 종속적인 성격 - 27

개항 후 외국은행도 속속 일본에 들어와 지점을 개설...정부의 원조를 받은 각국의 유력 기선회사가 외국과 요꼬하마 사이의 항로에 취항 - 27

개항 후에 일어반 일본의 경제적 변화 중 또 하나의 문제는 재래산업의 대종인 면직물공업이 파괴되고 그것이 구미자본주의 시장에 종속적인 지위에서 재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도, 중국, 조선 등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 사실 - 28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사회의 ‘본원적 축적’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구미자본주의의 면제품을 비롯한 값싼 상품의 대량 유입으로 재래산업이 파괴되는 가운데 진행...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된 많은 과잉인구를 유출시켰다. 이 방대한 과잉인구의 존재가 상업, 고리대자본과 높은 소작료를 착취하는 기생지주제의 급속한 확대의 기반...명치유신 이후 생긴 기계제대공업도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의 저임금․장시간 노동 위에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29

영국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 아시아 여러 민족의 식민지화 반대의 대동단결을 막기 위해서도 미국과 함께 일본을 저들의 동맹자로 육성하는 길을 택할 필요가 있었던 것 - 39

명치유신 직전의 대일무역에서 차지하는 영국의 지위는 수입과 수출이 다 같이 80퍼센트 이상이어서 프랑스보다 훨신 우세하였다. 영국이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세력을 후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40


제2장 明治維新

토막파...1868년 1월3일 새벽, 무장봉기하여 교또의 왕궁을 포위하고 왕정복고 및 장군제 폐지와 천황제 정부 수립을 선언 - 41

유신정권은 명치천황의 이름으로 된 이른바 5개조서문이란 것을 발표했다. 그 제1조는 “널리 회의를 일으켜 만기공론으로 결정하자”라고 하고 있다. 얼핏 보면 민주적인 약속인 것같이 보이지만, 이 ‘공론’이란 민중의 것은 아니고 공경公卿, 영주, 무사계급의 것이었다. 같은날 유신정권은 또 전국에 오방계시란 포고문을 발표하여 민중의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동시에 소청(所請)과 농민의 도망, 기독교 신앙 등을 금지시켰다. - 43

(일본) 사쓰마, 죠슈, 도사 세 번에서 8천 명의 군대를 도꾜에 모아 유신정부의 직속 군대로 만들어놓고, 7월14일 쿠데타의 방식으로 폐번치현廢藩置顯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전국은 72개의 현, 3개의 부로 정리되고 부지사와 현령이 중앙에서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비로속 통일국가가 완성된 셈이다. - 47

폐번치현의 결과 지방분권적인 여러 번들이 없어지고 비로소 전국의 시장이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번 사이의 관세장벽의 철폐, 전국적 상업활동의 자유 등 시민계급이 원하던 것들이 실현된 셈이다. - 47

자본주의 발전에 알맞도록 현물지대의 금납, 농작물 선택의 자유, 경잦지의 자유로운 매매, 농민의 상업 겸업의 자유 등도 보장 - 48

‘토박’討幕에서 시작되어 ‘폐번치현’으로 일단락되는 것이 좁은 의미의 명치유신이다. 이렇게 하여 명치정부의 계급구조가 대체로 명확히 되는데, 구봉건세력과 특권적 대상인, 그리고 하급무사 출신의 관료로 구성되는 3두마차가 유신정부를 끌고 가게 되었던 것 - 49

때마침 반란을 일으키고 있던 몰락한 ‘불평 사족’들의 불만을 해외침략으로 전환시키시 위하여서도 열강의 침략전쟁에 편승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 52

1872년(명치 5)에는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어서 4년제 소학교에 남녀 아동을 취학시키는 것을 부모의 의무로 규정하였다. - 57

사상통제에도 나섰다.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하며, 근거도 없는 신무천황의 즉위년을 황기 1년이라 하여 황기제도를 실시하였다. 날조된 건국기념일을 기원절이라 정하고, 천황의 생일을 천장절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여 국민에게 축하하도록 강요했다. - 57

독재권을 장악한 오꾸보는 곧 제권帝權을 강화하기 위하여는 먼저 경찰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내무성을 창설하고 자기 자신이 내무경이 되었다.(1873.11). 이듬해 1월에는 도꾜 경시청을 창설하고, 전국적인 경찰망 확충에 노력하여 일본경찰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 59, 60


제3장 자유민권운동과 해외침략 개시

명치유신 찬양론자들은 토지의 봉건적 영주제를 사적 소유제로 변혁한 것이 명치유신의 역사적 역할이라고 말하지만, 토지의 사적 소유제 개념은 지주적 토지소유제와 농민적 토지소유제라는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 62

천황제국가 지배에 위력을 떨치게 되는 경찰을 위시하여 호적, 토목, 운수, 통신까지도 장악하였으며, 지방행정도 관할하여 내무경은 부지사府知事나 나 현령을 통하여 군장軍長, 구장區長, 호장戶長을 거쳐 각 가정의 호주까지도 통일적으로 지배하였다. - 63

봉건유제의 온존, 낮은 기술수준, 국산원료의 부족, 관세 주권의 결여, 영․미에 대한 정치․경제적 예속 등이 사적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 요인이 되고 있었다. 그러한 사정으로 명치정부의 자본주의 육성은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한 보호육성과 대외침략을 위한 군수산업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 65

철도, 전신, 전화에도 정부는 큰 노력을 기울였다...운수와 통신 시설은 군사적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나라의 경제적 통일과 전국적인 시장확대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 65

1879년 3월 400명의 보병을 보내어 수리성을 점령하고 강제로 일본 영토에 편입시켜 오끼나와 현으로 하였다. - 70

일본상인들에 의한 양곡의 대량 수출의 결과 강화도조약 체결 후 3, 4년 동안에 조선의 곡가는 몇 배로 뛰어올라 식량난은 극심해졌다. 대다수의 농민과 도시주민, 가난한 유생의 생활은 무참히도 파괴되었다. 또한 금, 은 등 귀금속의 약탈과 해외유출의 급속한 증대도 조선경제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
백성들은 일본 침략자들의 연안 측량, 개항장 설치, 약탈무역에 반대하여 시위, 습격, 폭동으로 대응하였다.
이러한 민중의 애국적 반일투쟁에 대하여 민비 일파는 반일 투쟁에 궐기한 민중을 극형으로 탄압하는 태도로 대응하였다. - 73, 74

자유민권운동의 급속한 전개에 놀란 명치정부는 탄압 및 제동을 위한 조치들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 12월 교육령을 개정하여 문부성 부지사, 현령의 학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켰다. 앞서 9월에는 40여 종의 교과서에 대하여 부적당하다고 사용금지를 명령한 바 있었는데, 그중에는 후꾸자와, 가또, 나까무라, 쓰다 등 문명개화의 지도자들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의충효를 가르치는 것을 주로 할 것이고 양풍은 폐단을 가여온다는 것이었다. “국안國安을 방해하고 풍속을 흐리게 하는” 서적의 사용금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교과서가 교과서를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도 없게 되었고 교원의 정치결사 가입과 정치집회 참석도 금지되었다.
이듬해 5월에 나온 소학교교칙강령은 수신(修身)을 가장 중시하고 “존왕애국尊王愛國의 사기를 양성함을 요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소학교 교원 마음가짐’ ‘학교 교원 검정규칙’도 제정하여 교원의 사상과 교육방침을 엄하게 통제하였다. - 84

군대의 동요를 막기 위해 3월에는 헌병제도를 신설 - 85

1882년 1월 육해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유시인 이른바 군인칙유가 공포되어 천황과 그 대행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군대기강의 근간으로 삼았다. 군인칙유는 군인의 정치관여 금지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민권사상의 침투를 배제하는 동시에 군인을 천황권력의 충실한 역군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 86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 군인폭동은 개항 직후에 일어난 가장 규모가 큰 반침략․반봉건투쟁이었다. 임오군란은 단순한 군대의 한 집단이 일으킨 것이 아니고 일본침략자와 매국적인 봉건통치자의 학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군인 및 도시빈민들의 폭동이었다.
...
민비가 불러들인 청국 군대에 의하여 군인들의 봉기는 진압되고 말았다. - 92, 93

1882년 8월에는 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계엄령을 제정 - 116

1886년 3월과 4월에 제국대학령과 사범학교령, 소학교령, 중학교령이 차례로 제정 공포되어 교육에 대한 국가통제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대학의 임무도 ‘고상한 제학諸學’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국가의 수요에 응하는 학술기예’를 배우는 것으로 되어 도꾜 제국대학이 발족하였다. 소학교 교원 양성기관인 사범학교에서 군사교련이 정규 교과가 되었고, 모든 교육기관에서 도덕교육이 중시되어 천황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의 사상을 주입하였다. - 117

1881년에서 1886년 사이의 화폐유통의 안정, 기생지주적 토지소유 강화로 말미암은 값싼 노동력의 확보가 1880년대 후반기의 섬유공업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 124

1880년대 일본 노동자의 생활은 약간의 방적공업, 철도수송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실로 비참하였다. 특히 이 시기의 광산, 토목사업 등에는 거의 무임(無賃)으로 죄수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아, 저임금․장시간 노동이 일본 노동시장에 정착되고 있었다. 홋까이도 개척사업도 이러한 죄수들(명치유신 때 막부측 군대로부터 포로가 된 사람과 민권운동, 농민운동에서 체포 수감된 사람이 많았다)의 살인적인 강제 노동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1883년 국가가 경영할 때의 미이께 탄광에서 일반광부 22명, 죄수광부 24명이 희생되는 갱내 화재가 있었다. 이 사고는 아무런 노동보호시설도 하지 않은 데다가, 불 끄는 데에만 관심이 쏠린 경영자가 갱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불타 죽은 것이었다.
...
국영 다까시마 탄광을...불하받은 미쓰비시도 죄수노동 및 저임금노동을 기초라 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미쓰비시는 이 탄광에서 처음으로 ‘납옥 제도’라는 광부 모집방법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납옥두’라는 두목에게 광부 모집을 청부시켜, 저임금노동자를 인간 이하로 잔인하게 혹사하는 것이었다. 하루 18 내지 20시간의 노동을 강요하며 한달에 하루의 휴식도 주지 않을뿐더러, 조금이라도 일을 쉬는 사람은 감독으로부터 몽둥이로 얻어 맞고 고문을 당했다. 1884년의 콜레라 유행으로 3천 명의 광부 가운데 1,500명 이상이 병사하거나 살해되었다. 미쓰비시 재벌의 기초는 이같은 노동자의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 - 127

정부는 노동자의 반항이 두려워 1880년 공업방해죄를 만들어 노동쟁의를 중금고와 벌금형으로 다스렸다. - 127

빈번해진 노동자의 저항에 대처하기 위하여 자본가들은 블랙 리스트를 만들어 해고된 노동자가 1년내에 다른 공장에 취직하지 못하도록 협정을 체결하며 저임금 유지를 약조하였다. - 128, 129

공장법이 없고 노동안전시설도 없으며 노동시간도 하루 12시간이 일반적인 데다가 기업가, 감독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인 남자의 임금이 하루 10센인데 비하여 여성공, 소년공은 3, 4센에 불과하였다. 거기에 영양부족, 비위생적인 거처, 전염병과 직업병 등으로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매우 짧았다. - 129

학교에서 축제일에는 반드시 교직원, 학생, 지역 주민의 참석 아래 천황 사진에 대한 배례, 천황․황후에 대한 만세삼창, 교육칙어 봉독, 축가 합창 등을 의무화시켜 천황의 절대적 권위와 신격화가 교육의 기본정신으로 강조되었다...교육칙어 봉대식에서 기독교도 우찌무라 간조가 머리를 숙이지 않아 불경죄라고 비난받아 사직 - 130, 131


제5장 자본주의의 발전과 본격적 한국침략 개시

배외주의․침략주의의 분위기를 이용, 정부는 천황제권력에 대한 찬양과 군국주의 선동을 강화시켰다. 1893년 8월 문부대신 이노우에 고와시는 <기미가요>(일본의 국가), <기원절의 노래> <천장절의 노래>(천황생일 찬미가) 등을 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부르도록 제도화하였다. 이들 노래는, 천황은 태고부터 중단되지 않고 하나의 혈맥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고, 천황의 권위는 천황의 조상신으로부터 대대로 이어진 것이며, 천황지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니 일본 국민은 이에 복종하고 이를 찬송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젊은 세대에 대한 천황제숭배사상 주입 방법의 하나였다. - 138 139

일본의 침략책동은 조선의 자주권 침해와 아울러, 금괴(金塊)와 쌀 등의 약탈과 조선 근해 어장에 대한 침범 등 민중 생활의 파괴와 약탈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었다. 금은 일본 자본주의가 마쓰까따 마사요시의 화폐정리 이후 정화(正貨)로서의 금의 확보가 긴급한 과제가 되고 있던 상황에서, 또한 쌀은 일본의 1889년의 대흉작으로 쌀소동이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서, 그 확보는 일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 143

당시 일본 자본가들도 침략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1890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은 유약한 일본 자본주의로 하여금 해외시장 침략으로 내닫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섬유공업․조선공업․해운운수 부문의 자본가들은 특히 조선침략에 적극적이었다. 경제적 요인 이외에 일본의 정치적 요인도 문제가 되었다. 1890년에서 1894년까지의 초기 의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일본 지배층 내부의 대립 격화와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 악화 및 불민의 증대도 지배층의 침략기도를 북돋아주었다. - 146

청국정부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하자 대만 주민의 분노는 폭발하였다...일본군은 2개사단 병력을 투입하여 1895년 10월에는 최후의 저항거점인 대남성을 점령하는 등 중요 지점을 제압하였다...그후의 투쟁이 얼마나 완강히 계속되었는가는 1898년에서 1900년 사이에 피살된 ‘반도叛徒’의 수가 1만1,950명에 달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161

공주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한 후 184년 말부터 1895년 초까지 조선의 민중에 대한 일본침략군과 정부군의 학살행위는 실로 처참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지역은 전라도였고, 다음이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였다. 학살된 인명이 30만에서 40만에 달하였고, 농민군에 참가한 사람의 재산은 모조리 관리의 소유가 되었다. 가옥 파괴, 부녀자 강간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 161, 162

경제적으로는 압도적 우위에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러시아에 비하여 약했던 일본이 그 지위를 일거에 만회해보려고 책동한 것이 이른바 민비 시해사건이었다. - 162

청일전쟁의 비용은 2억3,260만9천 엔이었다. 이 액수는 보통 한 해 세입 총액의 2배 이상이었고, 그 대부분은 일본국민이 부담하는 군사공채와 증세로 조달된 것이다. 전쟁으로 획득한 거액의 배상금(3억 6,824만9천 엔)의 대부분도 국민의 생활향상에는 사용되지 않고 1897년3월의 금본위제 확립을 위한 준비금으로 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숙한 성립을 가져오는 데만 사용되었다. - 165

침략전쟁으로 큰 이익을 올린 것은 미쓰이 물산, 오꾸라 조, 일본우선 등 대자본자들이었다. 은행에 불입된 자본금에 대한 이익금의 비율은 1894년에 50퍼센트였던 것이 1896년에는 63퍼센트로 늘어났다. 자본가의 대외진출 의욕도 적극적으로 되었다. 청일전쟁을 가리켜 일본 제국주의가 형성되는 시발점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 165

이같이 방대한 군비확장에는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과 사업공채만으로는 부족하여 대대적인 증세를 하게 되었다. 등록세와 영업세를 신설하여 상공업자에게 부과하였고, 담배전매제 실시 등으로 세입을 대폭 늘렸다. - 166

대만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대만을 일본공업을 위한 값싼 원료의 공급지, 일본상품의 판매시장, 유리한 자본투하지로 만드는 데 있었다. 대만의 착취를 선차적 목적으로 삼는 식민지 은행인 대만은행이 창립되고, 이 은행의 지원 밑에 일본인 자본가들은 대만에서 설탕, 차, 쌀, 담배 등의 생산에 종사 또는 투자하였다.
대만에서도 그후에 조선에서 실시한 것처럼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바 있다. 1898년에 임시토지조사국이라는 관청을 만들어놓고,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대만 농민의 토지가 약탈되어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에게 불하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만의 광물자원과 그 풍부했던 참대밭도 마두 약탈하여 대부분 미쓰비시 재벌에 헐값으로 불하되었다. - 169, 170

치안경찰법 제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른바 산업조합 창설에 관한 법들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노동자를 ‘유산자’로 만들기 위하여 저축을 장려한다는 것인데, 노동자의 투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림으로써 노자(勞資)협조의 사상을 심겠다는 것이다. - 185


제6장 일본 제국주의의 성립과 러일전쟁

청일전쟁 직후부터 불평등조약의 비호 아래 일본상사는 중국의 섬유공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6년에 이르러 일본 상사는 두 개의 방적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중국인 기업에도 투자하여 점차 이를 지배 내지 흡수해갔다.
...
조선과 대만에도 일본자본이 수출되었는데, 대만의 설탕, 조선의 경부선(1898)과 경인선(1899) 등의 철도부설이 그것이다. - 192

1900년에는 7,172개의 기업체 가운데 섬유공업이 4,156개로 5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공장노동자의 60퍼센트가 섬유공업 노동자였다. - 192

1900년의 공황을 경험한 일본의 대자본가들은 만주까지 시장을 확장하자고 주장 - 200

영국과 일본의 접근은 영․일 양국 자본가의 이익에도 맞는 것이었다. 1899년 영국이 군사목적에 사용할 1천만 파운드라는 거액의 차관을 일본에 제공하게 되는 것은 그 일례이다. 또한 영국은 일본이 아직 만들지 못하는 전함과 순양함을 일본에 팔았다. 청일전쟁 후 일본의 영국에 대한 군수물자의 계속적인 발주는 영국 공업에 활기를 띠게 하였는데, 이러한 경제적 유대는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였다. - 201

러시아에 대한 전쟁열 선동에 반대하여 평화를 요구하는 운동도 한편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일부 기독교도와 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청일전쟁 때에는 거의 없었던 반전운동이 러일전쟁을 앞둔 시기에 전개된 것은, 그 동안에 일본 자본주의가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노동계급이 크게 성장한 데다가, 그 모순도 첨예화되었기 때문이다. - 202

1902년 7월 구례 해군공창의 조선노동자 약 5천 명은 당국의 노동강화 조치에 반발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은 3일 후에 경찰과 헌병의 탄압으로 진압되었다.
...
이 해군공창 노동자 가운데 한 직공의 투서가 <平民新聞> 제14호에 실렸는데 이에 의하면 “시국이 절박하다고 하여 우리 직공 일동은, 단 3시간의 수면 밖에 주어지지 않은 채 2주간 혹사당하였는데, 그 때문에 가엾게도 6명의 직공은 공장에서 즉사하였습니다”는 것이었다. - 202

일본과 러시아의 군사적 대결이 긴박해진 배경에는 첨예화한 국제정세가 있었다. 즉 만주시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중국분할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획책하던 영국이 일본을 부추겨 러시아와 싸움을 시키려 하였고, 한편 독일은 뒤에서 러시아를 교사하여 일본과 싸우게 하려하고 있었다. - 204

영국은 군사행동만 일으키면 일본에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해왔으며 영국에서 건조한 2척의 최신식 군함을 일본으로 넘겨주었다. 미국도 친일적인 태프트 육군장관을 개전 한 달 전에 일본에 들르게 해 미국의 일본 후원을 표명한 바 있었다. 영․미 양국은 그전부터도 일본에 유리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 205

1904년 2월8일과 9일 도고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함대는 러시아 함대가 정박하는 여순항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하였다...여순을 사수한 스테셀 휘하 러시아군의 완강한 항전으로 1905년 1월1일에 가서야 겨우 함락시킬 수가 있었다. 여순 포위 155일간의 전투에서 참전한 일본군 13만 중 사상자가 5만9천 명이나 되어 여순 요새는 말 그대로 시체로 뒤덮였다. - 206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정부는 당장 3월에 지조地租, 소득세, 간장, 설탕, 술, 면제품, 모직물 등에 대한 증세를 단행했다. 담배와 소금은 전매로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해인 1904년에 세금이 50퍼센트, 1905년에는 100퍼센트 인상된 셈이었다. 일본의 민중은 전쟁 2년간에 세금의 형태로 2억 1,300만 엔을 더 물었다. 전쟁기간중 지조도 토지가격의 3퍼센트였던 것이 17.5퍼센트로 인상되었다. - 208

많은 병사가 전쟁에 동원되고 수많은 전사자, 부상자가 생겨 한 집안의 기둥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은 대단하였다. 시인 오쓰까 나오꼬는 나라와 남편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냥 대답하지 않고 울고만 있겠다”고 시에 써서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선전에 항거하였다. - 208, 209

여성 가인(일본의 짧은 시를 쓰는 작가) 요사노 아끼꼬는 전선에 가 있는 아우에게 보낸 시에서 “너 죽어서는 안된다”고 썼다. - 209

전쟁 개시 직후 <평민신문>은 방대한 증세에 반대하여 국민에게 전쟁반대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1904년3월27일자). 또 <평민신문>은 [노국 사회민주당에게 보내는 글]이란 사설에서 “일․러 양국 정부는 그 제국적 야망 달성을 위하여 전쟁을 시작하였으나, 당신네들과 우리는 동지다. 제국의 적은 일본인이 아니고 실은 지금의 이른바 애국주의, 군국주의이다”고 지적하고 전쟁 반대를 호소하였다(1904년3월13일자). - 209

일본 제국주의는 러일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의 필리핀 강점을 승인하는 대가로 한국의 단독지배를 승인받았다.(1905.7.29). 이어 8월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영국의 인도지배를 승인하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받았다. 또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를 승인하는 대가로 프랑스로부터도 그들의 한국지배를 인정받았다. - 213



제7장 식민주의의 성립과 러일전쟁 후의 일본사회

일제는 마을마다 헌병을 주둔시키는 ‘소지역 완전장악식’ 지배방식을 채택 - 222, 223

러일전쟁의 결과 일제는 한국경제의 주요 부분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들은 철도망을 장악하고, 새 철도의 건설과 경영도 독점하였다. 우편과 전신사업은 물론, 광산과 토지, 대산림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국가와 미쓰이 재벌에 의하여 만들어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후에는 토지 약탈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금융과 산업, 해외무역의 대부분도 일제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1906년 농공은행을 만들고(그후 조선식산은행으로 된다), 1909년에는 한국의 모든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한국은행을 설립하였다(합방 후에 조선은행으로 개칭). 해외무역의 경우, 1905년에는 한국의 수입총액의 76퍼센트가 일본상품이었다. 이에 비해 구미 제국의 것은 7.7퍼센트, 중국의 것은 8.6퍼센트여서, 한국은 일본상품의 독점적 시장이 되고 있었다. - 223

전후 일본경제는 식민지 획득으로 인한 착취 강화와 시장확대로 2,3년 동안 활기를 띠었다. 그것은 우선 회사수와 자본의 증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05년에만도 총계 250억엔 이상의 자본을 가진 180개 이상의 각종 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06년에도 10억 엔 이상의 새 투자가 있었다. - 227

방적공업의 원료인 목화는 수입목화에 눌려 극도로 줄어들었으며, 콩도 만주로부터 대랑 수입되어 쇠퇴하였다. 종전에는 자가생산하던 간장과 된장도 공장제품에 밀리기 시작하였고, 등유도 미국의 ‘솔표 석유’와 영국의 ‘조개표 석유’로 바뀌게 되었다. 비료도 인분 이외에 화학비료와 콩깻묵의 사용이 늘어나게 되었다.
농초이 이와 같이 자본주의 경제 속에 휘말려들게 되자, 현금 없이는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고, 농촌의 자급자족적 부분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 231

일제는 합방 후...헌병경찰제도...전국 방방곡곡에 1만 6,214개소의 헌병․경찰기관에 2만3천 명의 헌병과 20만 명의 헌병보조원 및 첩보조직이 그물처럼 깔려 있어, 한국인의 일거일동을 감시하였다...초대 총독 데라우찌가 “조선사람에게는 굴복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협박 - 240


제8장 전반적 위기의 시작과 제1차 세계대전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목적은 한국을 그들의 식량․원료 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서 봉건적 토지소유와 착취관계를 법적으로 공공화하는 동시에 지주를 식민지통치의 사회적 기반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 245

일제는 10월 혁명 직후부터 참모본부와 외무성이 중심이 되어 시베리아를 일본의 세력 범위에 넣기 위하여 간섭전쟁에 착수...1918년 2월과 3월에 영군과 미군은 유럽 러시아의 북방 항구 무르만스크에 해병대를 상륙시키고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케 하였다...5월 말경에 이르러서 일․영군과 체코군은 연합하여 블라디보스톡의 소비에트군을 항복시키고 반혁명정권을 수립하였다. - 278, 279


제9장 천황제체제의 재정비와 전반적 위기의 격화

혁명에 대한 위기감은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또모, 야스다 등 독점자본가들에게도 있었다. 이들은 사회운동 발전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로 보다 강력한 자본가단체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일본은행 총재 이노우에 준노스께의 주창으로 일본경제연맹회를 조직하였다...일본경제연맹회는 설립 후 일본정부에 대하여 기업의 합병, 산업 합리화, 긴축재정, 디플레이션 정책 등의 실시를 요구 - 311

1923년...9월1일 정도 간또대진재가 일어나 도꾜, 요꼬하마 일대를 휩쓸었다...일본공산당을 탄압한 바 있던 이들은 대진재의 혼란을 절호의 기회로 삼아 사회주의 운동과 재일 한국인노동자 탄압을 구상...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작 선동한 혼란을 이용하여 2만명에 가까운 한국인이 군대, 경찰, 우익단체, 재향군인회, 자경단원들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되었다. 또한 그와 거의 같은 수자의 한국인이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감되었다가 그중 상당수가 학살되었다. - 314, 315

치안유지법 제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잇다.

국체國體를 변혁하고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함.
전항前項의 미수죄도 이를 벌한다. - 323

가또 내각은 1925년...병력 삭감에 대한 보완의 의미와 함께 청년들에게 군국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하여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에게 군사교련을 정규과목으로 넣는 동시에 현역의 배속장교를 학원내에 상주시켰다. 이것은 정부가 국민을 ‘위로부터 군국주의에 통합’시키려는 목적으로 학교교육의 군국주의화를 강화하는 책동이었다. - 324

다나가 내각은 중국의 국민적 통일을 방해하기 위하여 제1차 동방회의를 소집하였다....이 회의는 ‘대지對支정책 강령’이라는 것을 채택하였다. 그 요지는 ①중국혁명의 파급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몽을 중국본토로부터 떼어내어 일본 세력 아래 둘 것 ②일본의 특수 권익을 옹호하고 생명선으로서의 만몽을 확보하기 위하여 만몽의 치안유지는 일본이 맡을 것의 두 가지였다...방적연합회 등 중국시장 침략에 혈안이 되고 있던 27개 자본가단체도 8월 대지對支상권옹호연맹을 만들어 일제의 중국혁명 방해책동을 지지하였다. - 339

제1차 대전 때부터 일본 독점자본은 한국으로부터 많은 이민노동자를 받아들여, 오끼나와 아미미 제도 출신 노동자 및 미해방부락민과 함께 일본 노동시장의 최저변에 넣음으로써 일본 노동시장의 저임금 구조를 유지해왔다. - 340


제10장 파시즘의 성립과 15년 전쟁의 개시

실권은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하는 괴로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일본은 일반의정서를 조작하여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하고 말았다(1931.9.15). 단 2개조만으로 된 이 의정서의 내용은 만주국은 일본이 가진 모든 권익을 인정할 것과 일본군의 무기한 주둔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미쓰이, 미쓰비시 두 재벌도 1932년 4월 재빠르게 만주 중앙은행 설립에 2천만 엔의 융자를 결정하는 등 만주의 식민지화에 적극 참가하였다. - 365, 368, 369



제11장 전면전쟁 개시와 일본 제국주의의 붕괴

1938년...국가총동원법이란 자본, 물자, 노동력, 금융, 생산 물가 등을 비롯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수행을 위하여 국가통제 아래 둔다는 것이었다. 즉, 신문, 잡지, 기타 출판물의 언론 통제, 노동쟁의 금지, 교육․학문의 통제 등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가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 399

국가총동원법이 성립하자, 이 최대한의 이윤을 노리고 재벌은 앞을 다투어 군수산업에 대규모 투자를 시작하였다. 미쓰이 재벌은 시바우라 전기, 대일본 셀룰로이드, 동양고압, 도요다 자동차, 일만 알미늄, 일본제강, 미쓰이 광산 등 모든 방면에 진출하여 많은 공장을 신설 확장하였다. 미쓰비시 재벌도 기존의 군수공장인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비시 전기, 미쓰비시 광업을 확장하고, 스미또모 재벌도 스미또모 금속, 스미또모 화학, 스미또모 알미늄, 스미또모 광업 등을 확장하여 거대한 이윤을 얻었다. 또한 대재벌은 거대한 자금을 가지고 신흥재벌의 군수부분도 지배하였다. 미쓰이는 나까지마 항공기를, 미쓰비시는 일본질소를, 야스다는 아사노 시멘트 등을 지배하였다. 이리하여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통제는 이들 재벌 독점자본의 최대한의 이윤을 위해 기여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의 국가자본주의는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다. - 402

정당은 물론 모든 민간단체가 해산당하고 사회생활의 전영역이 상의하달의 그물로 뒤덮였다. 특히 전국적으로 인조(隣組, 10호 정도를 한 단위로 함)라는 지방 말단조직을 만들어 그 위에 농촌에서는 부락회, 도시에서는 정내회를 두고 백성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였다. 식민지 한국에서도 애국반을 말단조직으로 하고 그 위에 정회를 두었다. 이러한 조직을 이용하여 반공연습, 군대의 전송, 전사자의 유골 마중, 식량배급, 어용적 행사에의 동원, 군수줄자 수집과 회수 등에 국민을 동원하였다.
이와 함께 전국의 7만 개 공장과 기업소에서 조직되고 있던 산업보국회를 총망라하는 대일본산업보회(회원 450만명)도 만들어졌다. 이것은 노동자를 강제적으로 군수생산에 동원시키는 조직이었다. 부인단체도 없애버리고 애국부인회와 국방부인회에 강제 가입시켰으며(이것마저 대일본부인회로 통합), 농민단체도 다 없애고 농업보국회 하나로 묶어 쌀의 공출 등에 이용하였다. 젊은 남녀는 대일본연합청년단에 가입시켰고, 지식인도 대일본문학보국회, 대일본언론보국회 등 각 분야별로 편성된 각종 보국회에 가입시켜 전쟁협력에 강제 도원하였다. - 410

1939년 7월의 국민징용령의 공포와 관련하여 9월 이후부터 한국인의 집단연행이 실시되어 최저 6개월, 실제는 2년 계약의 ‘모집’ 형식으로 많은 한국인이 일본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들은 1939년에서 1941년까지는 주로 홋까이도 등의 탄광지대에 배치되었다. 1942년 3월 이후부터는 ‘관청 알선’에 의한 보다 강제력이 강한 한국인 연행제도가 실시되어, 해마다 많은 한국인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 413

징병 강화로 말미암아 심각해진 노동력 부족현상으로 군수생산 부문에 우선하여 충당키 위해 강제징용제도가 실시되었다. 남자는 이발사, 차장, 사무원 등 17종의 직종에 취업할 수 없게 되고 여성이 이를 대신하였다(1943년 8월부터 실시). 군수생산과 직접 관련이 없는 업종은 강제로 폐업 내지 전업시키고 그 종업원은 강제징용되었다. 패전 직전의 징용자수는 616만에 달하였다.(표15참조) 징용공에 대한 노무관리는 나치 독일식을 도입하여 식사, 수면, 통근, 최저 여가 이외의 전시간을 경영주가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다. 징용공 이외에 남녀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도 공장과 농촌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을 강요당하였다. 25세 미만의 미혼여성도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근로봉사에 강제동원되었다. - 426

일본정부는 1942년 11월27일의 내각회의에서 ‘화인華人노무자 내지이입內地移入에 관한 건’을 결정하고 약 4만명의 중국인을 일본의 홋까이도 탄광 등에 강제연행하였다. - 429

천황제 파시즘의 한국인 강제연행의 상징적인 사건은 나가노 현 마쓰시로의 대본영 지하호 굴착사업이었다. 이것은 1944년 11월부터 패전하는 1945년 8월까지 2억 엔의 예산으로 연 300만의 노동력을 투하한 연장 1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호로서 약 7천 명의 한국인이 강제연행되어, 하루 14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강요당하였다. 노동재해, 영양실조, 감독의 구타 등으로 사상자가 속출한 데다가, 1945년 4월에는 중요한 공사에 종사하던 한국인 46명이 기밀 누설방지라는 이유로 집단학살되기까지 하였다. - 431

만주사변 이후 겪은 중국민중의 희생도 말로 다할 수 없이 컸다. 인명 피해만 해도 1천만 이상이라고 한다. 전투원의 피해 이외에 평화적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과 처형도 많았다. 특히 만주에서 일본군의 이시이 부대가 감행한, 산 인간(중국인, 한국인)을 생체 실험의 명목 아래 수없이 죽인 사건은 유명하다.
그밖의 동남아시아 여러 민족의 희생도 컸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버마에서만도 강제노동, 영양실조, 탄압 등으로 800여 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일본민중의 피해도 막대했다. 군대에 끌려간 사람이 720만에 전사자가 155만에 달하였고, 그밖에 부상자․행방불명이 30만, 포로로 억류당했다가 죽은 사람이 30만이나 된다. 공습과 식민지에서 희생된 비전투원 100만을 합치면, 태평양전쟁의 희생자는 400만을 넘는다고 한다. - 443, 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