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시체를 절 안에서 화장하는 일은 엘리트나 평민이 모두 똑같이 행하던 관행이다...평민의 장례에는 불교와 샤머니즘 관념이 뒤섞여 있었다. 부모의 죽음은 집을 파괴할지 모르는 적대적 힘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부모를 집에서 외부 건물로 옮겨 죽음을 맞이하게 하였다...죽은 이가 언제나 땅에 묻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때로는 뼈를 수도의 거리나 트인 들판에 흩어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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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관점에서 불 때 묘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므로, 묏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하였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관습을 개혁하여 죽음에 대한 유교적 개념을 사람들 마음속에 구현하도록 법적 기준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가 1395년에 불교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온 화장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길거리나 공터에 시체를 버리는 것도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관습을 금지하기 위하여 1410년에 매치원을 한양에 세워 위반자들을 찾아 처벌하고 거리를 깨끗이 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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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관습이 수도의 거리와 골목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존속하였는지를 목격한 관리들은 지방 상황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시골의 부자들은 경쟁적으로 부모 장례식 전날 밤에 손님을 많이 초대하여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렀다. 관을 임시로 친 천막으로 옮기고 ‘시체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시끄러운 음악을 연주하였다. 남녀가 밤새도록 춤을 추었으며, 특히 ‘유밀과’ 같은 사치스러운 음식들로 그릇과 접시들을 채웠고 술을 많이 소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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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에 재물을 쓰지 않고 술과 노래가 없으면 이웃들은 ‘초라한 장례식’이라고 헐뜯었다. 장례에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장례를 몇 년 동안 미루기도 했다. 북부지방의 보고에 따르면 함경도와 평안도의 장례 관습은 훨씬 더 비문명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지역의 상류층조차 관을 사용하는 관습을 몰라서 시체를 관에 넣는 대신 넓은 들판이나 바위 절벽에 고작 돌 몇 개로 간신히 덮어놓아 시체가 바깥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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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를 배포하여 교화하거나 엄격하게 경고하고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으로도 끈질기게 유지되어온 지방의 전통을 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가운데
한국인들이 옳다고, 정답이라고 여기는 장례 방법은
따지고 보면 누군가가 이것이 옳다고, 정답이라고 한 방법.
무슨 과일을 쓰고
어떻게 절을 하고
불을 붙일지 말지
조용히 할지 시끄럽게 할 지 등을
누군가가 만들어서
여러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것.
사회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듯이
세상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장례를 치르는 방법도 여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