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카르텔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사실 제국주의 내부의 갈등이 아니었다. 중국 내부로부터 분출되는 민족주의 운동의 도전이었다...1900년 의화단 봉기는 반외세와 반서양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었다...그 주력은 젊고 가난한 농민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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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국에 이르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의화단을 진압하고 청조를 굴복시키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재선을 위해 선거유세에 돌입해 있던 윌리엄 매킨리가 신속하게 군대 파병에 나섰다. 필리핀 마닐라에 미국이 건설한 군사기지에 주둔해 있던 2500명의 병력을 북경에 급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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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군대를 급파한 후 영국은 일본도 파병해 줄 것을 세 차례에 걸쳐 요청한다. 일본은 결국 가장 많은 병력인 2만 2천의 군대를 파견했다고 월터 라페버는 설명한다. 반노 마사타카에 따르면, 연합군의 총 병력은 약 2만이었고, 그중의 절반이 일본군이었다....1900년8월4일 드디어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우선 5개국 군대로 구성된 다국적군이 천진에서 북경으로 출격했다. 이들은 열흘 만인 8월14일 북경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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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부로부터의 민족주의 저항에 직면한 제국주의 열강들은 러시아까지도 포함하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그 진압에 나섰다. 영미일 삼각 콘도미니엄과 러시아 및 독일 사이에 갈등과 경쟁이 있었지만, 중국의 반식민지화 자체를 위협하는 중국의 저항에 대해 제국주의 열강은 제국주의 콘서트(imperialist concert)라 할 만한 공동의 무력 대응체제를 가동하였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개화파들은 프랑스혁명기에 나타났던 농민대중의 봉기와 항쟁을 평등사상에 의해 발단한 것으로 보아 사회적 대혼란의 징조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농민군의 봉기를 부정적 현상으로 이해하였고, 따라서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윤치호의 경우도 “동학당들이 양반들을 다룸에 있어 보여준 잔인성은 [프랑스]혁명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겪었던 유혈적 폭력사태를 연상시킨다”고 하는 데서 보듯이 역시 농민군과는 상이한 현실관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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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9월18일 농민군을 진압하겠다고 한국정부에 통고하였고, 21일 개화파정권은 이를 수락하였다. 농민군 토벌을 위한 일본과 개화파정권의 결탁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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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10월9일 일본공사관에서는 동학교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병을 파견한다는 통보를 보내고 아울러 이들의 지휘에 관군이 순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외무대신 김윤식은 행진각대장行陣各隊將과 연도沿途의 각 지방관에게 일본국 사관士官의 지휘에 순응하라고 시달하였다. 일본은 관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데 이어, 일본군대가 동학당을 소멸하기 위하여 파병하였다는 뜻을 포고하여 내외신민이 모두 일본병의 동학 소멸을 돕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책은 일본의 의도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관군의 힘을 믿지 못하여 외세를 빌리고자 하는 개화당정부의 의도와도 일치되는 것이었다.
- 한국역사연구회, <1894 농민전쟁연구 4-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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