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책과영화

장광직, <상문명商文明>

순돌이 아빠^.^ 2014. 5. 2. 12:09





장광직, <상문명商文明>, 민음사, 1988

꽝즈 장 교수가 거대한 문명의 상징품일수록 위대한 예술품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과도한 인간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는데 큰 시사를 받을 것이다. 위대한 문명으로 간주되는 사회일수록 심한 계급분화와 착취가 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명의 정상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의미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꽝즈 장 교수의 충고는 깊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25

상商이란 상인商人이 자신들의 선조의 도읍을 말하는 데 사용했던 명칭이며, 상인 다음으로 중국의 정치 무대에 등장했던 저우인周人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읍에서 권력을 가지고 거주했던 왕조의 지배자들을 상인이라고 불렀다. - 29

서기전 1766년과 서기전 1122년 사이에 놓이는 상商시대 - 30

상 시대사의 자료-점을 치기 위해 상 나라의 지배층이 사용했던 글자가 새겨진 소의 어깨뼈와 거북껍데기 - 31

[은본기](殷本紀)에서는 상商의 권위의 상승과 하락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즉 상의 권위가 하락하였을 때는 여러 나라의 제후들이 예방을 하지 않았고 상의 권위가 다시 상승하였을 때는 제후들이 충성을 표하기 위하여 예방했다고 한다. - 41

[서경(書經)] <무일(無逸)>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후의 왕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일함을 누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안일함을 누렸기 때문에 그들은 씨뿌리고 거두어들이는 어려움을 알지 못하였고 서민들의 노고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지나친 쾌락만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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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본기(殷本紀)]에서의 저우紂에 관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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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물과 세금을 늘려서 녹대(鹿臺)를 금전으로 가득 채우고 거교(鉅橋)를 곡물로 가득 차게 하였다. 그는 개와 말, 진기한 물품을 계속 수집하여 궁실에 가득 채웠다. 그리고 사구(沙丘 : 離宮의 별칭)의 뜰과 대를 더욱 넓혀서 많은 야수와 새들을 구하여 그곳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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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구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로써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은 것이 숲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는 남자와 여자들이 나체로 서로 쫓으며 그 사이를 뛰어다니게 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 45

지우후九侯는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있어서 그녀를 저우紂에게 헌납했다. 지우후의 여자는 음란한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저우는 화가 나서 그녀를 죽이고 지우후를 고기젓으로 만들었다. 이에 어후는 저우의 비행에 크게 반발하여 강하게 간하였다. 그러자 저우는 어후를 고기포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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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는 계속해서 음란한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삐깐比干은 <신하된 자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간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는 저우에게 강력하게 간하였다. 저우는 화가 나서 <나는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가 있다고 들었다>고 말하고는 삐간을 해부하여 그의 심장을 보았다. - 45, 46


제1편
안양安陽을 통해 본 상商 사회

왕조시기의 샤오툰(小屯, 그리고 안양의 그 밖의 다른 지역) 유적은 보통 규모의 주거지로부터 고고학적으로 세 가지의 새로운 특징이 출현하는 왕도로 질적인 변모를 하였다. 그 세 가지 새로운 현상이란 상당한 규모의 건물 기초(궁궐 기초)와 문자가 새겨진 점뼈, <왕릉>이라는 명칭에 어울릴 만한 정도로 거대하고 부장품이 풍부한 묘이다. - 125

그러한 건물들이 때로는 규모가 방대하고 배치가 규칙적이며 일부 건축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순장인이 많았다는 측면에서 보아 이러한 건물들이 궁궐이나 종묘로 설명되었고 일반적으로 샤오툰 북부지구는 안양 중심부의 중앙으로 믿어진다. - 131, 134

중부집단은..21자리의 건물기초로 구성...이 지역에는 많은 사람과 동물, 마차가 순장되어 있었다...이러한 순장은 이 건물들의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가르쳐 주며 따라서 이 건물들은 잠정적으로나마 종묘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134, 137

남부집단은 17자리의 작은 건물기초로 구성...사람은 오른쪽에 동물은 왼쪽에 배치되었던 많은 순장묘들도 건물 기초에 딸려 있었는데 그러한 기초들은 특별한 제사의식용으로 별도로 설정된 구역이었던 것 같다. - 137

부속건물...모두 반지하식이거나 지하식인 이와 같은 건물의 적어도 3가지 주요한 범주는 주거(움집)와 저장구덩이, 작업장으로 구분되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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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움집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은 대부분이 동물의 뼈와 모두 생필품인 질그릇 조각이었다>. 이러한 수많은 움집들이 샤오툰에서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지상식 건물 기초의 아래에 있었고 다른 일부는 기초의 옆과 사이에 지어졌으며 또 다른 일부는 그러한 건물 기초에 끼어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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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곡물과 정교한 제품, 점복 문서를 포함한 왕실의 재화의 거대한 일부분이 지상식 건물과 관련된 많은 지하 저장 구덩이에 저장되었던 내용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움집에 대한 산재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일부의 움집의 거주자들은 전문화된 생산활동에 종사했음이 분명하다. 꿔빠오쥔은 일찍이 1933년에 중부 집단의 북쪽지구의 지상식 건물 지역에 있는 주요한 제조업 지역을 관찰하였는데 수백개의 청동기 주조틀과 수십개의 도가니가 청동기를 주조하는 곳이었음을 알게 하는 지역이...발견되었고, 수십점의 가공된 돌·옥·조가비 제품 및 그리고 수천점의 돌칼을 통하여 돌과 옥의 작업장이었음을 알 수 있는 지역이 B-14의 북쪽 또는 그 근처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천 점의 뼈화살촉과 수백개의 뼈재료 조각이 뼈를 가공하는 곳이었음을 알게 하는 지역이 B-12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또 하나의 청동기 제조장이 진흙틀을 지니고 있는 10채 정도의 움집으로 인하여 밝혀졌는데 - 137~139

대형 묘의 축조 과정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우선 묘구덩이를 판 다음에 순장인의 배치를 위한 많은 작은 구덩이를 바닥에 팠던 것이다. M1001 하나의 묘에서 9개의 이러한 작은 구덩이가 있었는데 각 구덩이에 사람 1명과 도끼창 1개, 개 1마리가 묻혀 있었다. 바닥면에 드러났던 그 밖의 모든 묘에서는 각 묘마다 사람의 뼈와 무기가 발견된 이러한 구덩이들이 하나씩 있었을 뿐이다. - 156

M1001을 예로 들면 사람의 순장이 북쪽 경사로와 서쪽 경사로에서 각각 1명씩 발견되었고 남쪽 경사로에서는 머리가 없는 50명분의 뼈가 11열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러한 1명분의 뼈가 동쪽 경사로에서 발견되었다. 4개의 경사로에서 모두 사람의 두개골이 줄을 지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27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모두 73개였다. - 158

시뻬이깡西北岡에서의 1934~35 사이의 발굴에서 10자리의 대형 묘와 사용되지 않은 1개의 구덩이가 발견된 이외에도 1221개의 소형 묘들이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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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자리는 1인묘였고 57자리는 여러 사람의 합장묘였으며(각묘에 2명에서 11명까지) 72자리는 두개골이 몸체의 나머지 뼈와 분리된 채로 매장된 묘였고(각묘에 1명에서 10명까지) 209자리는 두개골만 매장된 묘였으며(각구덩이마다 3개에서 39개까지) 192자리는 몸체의 뼘나이 매장된 묘였고(각묘에 1명에서 10명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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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의 발굴자들은 많은 사람의 뼈가 해체되어 있거나 훼손되어 있었으며 묶여 있었다고 명확하게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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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장과 양빠오청의 해석-즉 일부의 소형 묘들이 왕의 매장의식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묘들은 갑골문에 풍부하게 기재되어 있는, 제사의식에서 인간을 제물로 사용하는 행사를 가르쳐 준다는-은 확실히 사실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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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의식에 사용된 인간 제물 중에는 모두 부장품을 동반하거나 가끔 동반하여 매장된 사람과 부장품이 없는 채로 목이 잘려서 매장된 두 부류가 있었던 것 같다. - 162~167

까오러우좡, 허우깡, 까오러우좡 촌락...상商의 유물에 관한 한 그것들은 문자가 새겨진 점뼈와 2개의 경사로(남쪽과 북쪽), 십자형 묘실, 순장인들을 지니고 있는 1자리의 거대한 규모의 묘를 포함하고 있다. 이 지역은 적어도 귀족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 168, 169

쉬에지아좡 북부지구...일부 구덩이에서는 일상 용품과 매장 구덩이가 없는 몇 명의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고 명기明器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묘에는 부장품이 약간 있었지만 순장인은 없었다. 이 지구는 비교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것 같다. - 169

쉬에지아좡 남부지구...청동기 주조장과 뼈제품 제작터 그리고 간단한 부장품이 있는 무덤들이 드러났다. 이곳은 확실히 작업장 지역이었다. - 169

갑골문에는 궁궐 지역 내부에서의 왕의 제사의식과 그 밖의 다른 활동들이 자주 기재되어 있는데...실室도 있었는데 태실(太室, 가장 중요한 내실)과 4방향에 있는 4실이 있었으며 직무장소였던 궁, 왕실의 침실로 쓰였을 듯한 침寢, 흙으로 만든 제단인 단壇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조상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던 여러 종宗이었다. - 177


2. 자연자원과 경제자원

3. 상 왕조와 통치기구

상商왕의 왕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닌 제도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것은 중앙 집중적인 경제의 중심부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합법적인 권력과 분명한 법률에 의존하는 거대한 국가 구조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것은 사실적이고 전설적인 혈연에 근거하면서 국가 구조와 연결되어 있는 광대한 혈족 조직의 핵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 209

취락을 상商시대에는 읍邑이라고 불렀는데 그 문자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위부분은 사각형의 울타리로, 밑 부분은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요소는 그 경계를 표시하는 성벽과 그곳의 거주인으로 형성된 상商 시대 취락의 두가지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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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읍은 점차적이고 자연적으로 성장한 것이기보다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결과에 의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변경지방에 새로운 농경지를 개척하기 위한 읍의 건설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 왕은 물리적으로 읍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 집단을 파견하곤 하였으며 백성들을 그곳에 이주시키곤 하였다. - 210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제후를 우한 큰 건물이 있는 상商의 소규모 읍에 대한 좋은 예는 1963년 후뻬이성에서 발굴된 판롱청 유적이다. 이곳에는 남북 290미터, 동서 260미터에 이르는 항토 기법으로 축조된 성벽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인, 4칸으로 된 하나의 대청이 있는 큰 궁궐터가 발견되었다. 회랑 밖의 사방에는 원래 처마가 지탱하는 나무기둥이 있었던 43개의 큰 기둥 구멍이 있다. 취락의 성벽 안과 밖에서는 조각된 목곽과 3명의 순장인이 있는 대형 묘 1자리를 포함한 많은 무덤이 발견되었다.

새로 건설된 그 읍의 거주자가 누구였을까 하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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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說文)]에는 <옛왕의 법칙에 따르면 (그것들은) 그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크기가 달랐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갑골문에는 많은 상商 왕실의 관료뿐 아니라 왕자와 왕비들이 도읍지역 밖에 각자의 성읍(城邑)을 소유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아마 이곳들로부터 약간의 개인적 재화를 획득하였을 것이다. [좌전(左傳)]의 두 구절에서 저우周시대에 왕이 친척이나 관료를 보내어 각자의 성읍을 건설하도록 할 때에 왕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다른 것과 함께 수여했음을 알 수 있다.

1 그 집단의 원래 명칭姓
2 토지(봉토封土)
3 족族 단위의 거주민
4 새로운 정치집단을 명명하는 새로운 명칭氏
5 그들의 새로운 정치적 지위와 읍의 정치적 지위에 합당한 제기(祭器)와 표장(標帳) - 213, 214

갑골문에 나타난...족이라는 문자는 위 부분이 깃발, 아래 부분이 화살의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군사 조직을 암시한다는 띵산의 해석이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고대 중국에서 군사 조직과 깃발의 관계는 잘 알려진 사실이고 갑골문에서 족은 군대 원정시의 전투 집단으로 나타난다. 그 규모는 평균 백명 정도였을 것인데 100호에서 1명씩 나온 100명의 성인 남자로 구성된 것 같다. 그러나 군사 행동만이 족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었고(다른 기능은 농경지를 경작하는 것임) 그 구성은 확실히 혈연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 216

쯔 성(子姓)은 비록 모든 그 구성원들이 왕이 될 수는 없었지만, 지배 집단이었다. 쯔 성 내에 왕족이 있었는데 여기서 왕을 선출하였고 자족子族 또는 다자족多子族의 구성원은 보통 왕에게 충성스러운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쯔 성의 몇몇 여성(아마도 왕족에서 나왔을 것이다)은 왕의 동성 배우자가 되었고 다른 성 출신의 여성도 왕과 족외혼을 할 수 있었다. 다른 성의 구성원들 또한 왕의 신하로서 통치권을 부여받았다. - 218

왕족은 확실히 왕조의 규칙에 따라 왕이 된 자와 의식에 의하여 인정받은 배우자가 그 핵심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왕족에 대해서는 통치집단인 쯔 성 내부의 특별한 집단으로 가정했고, 이 집단은 당시와 과거의 모든 왕들, 그들의 공식적인 배우자들, 왕위 계승자로 뽑힐 수 있는 남자 구성원과 왕의 공식적인 동성배우자로 뽑힐 수 있는 여자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 218

상商왕은 10개의 위패단위에 속해 있었고 그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왕족 내에서의 왕권은 결코 하나의 집단에서 계승하지 않았고 위패단위 사이에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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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은 통치계층 내부의 여러 분파 또는 부분 사이를 순환하면서 한 계층에만 한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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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나 혹은 그 이상의 계통들 사이에서 번갈아가면서 왕위를 교체 - 235

상商 사회는 하나의 혈족적 기원(子姓)을 가진 세습적인 통치 계급에 의해 통치되었다. 왕권(왕족)과 적극적인 관계 있는 쯔(子)성의 구성원들은 제사의 목적을 위한...10개의 분파로 나누어져 있었다...이러한 제사의식적 간 조직은 또한 정치적 실체였고 그것은 결혼을 통한 연맹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다른 특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10개의 단위가 동등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즉 지아甲, 이乙, 띵丁과 같은 세 조직은 다른 조직보다 정치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인구도 더 많았으며 제사의식면에서도 두드러졌다. - 236, 237

왕족이나 왕이 아닌 지배계급의 구성원으로는 부婦와 자子, 신臣들이 있다. 그들 모두 도읍지역에서 특별한 임무가 있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그들 중 상당수는 경작지가 있는 성읍을 소유한 작위가 있었을 것 - 247

천멍지아는 점복기록에서 20개 이상의 관직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대신臣과 장군(무관), 기록보관인의 세 범주로 나누었다....가장 중요한 관직의 범주는 점치는 사람인 복인卜人과 정인貞人이다. - 250

왕의 배우자나 왕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왕실 관리들은 추수를 하여 소득을 얻을 수 있는 토지와 그들의 족인(族人)들이 거주할 성읍을 수여 받았던 듯하다. - 251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상(商)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휘하에 방대한 군사력을 소유했다. 점복기록에는 3천명, 5천명 혹은 1만3천명을 거느리고 출전하거나 한꺼번에 3만명을 포로로 획득한 군사활동에 관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그들의 사회 내에서 그처럼 많은 수의 전쟁 포로를 감금하고 희생의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주둔군이 필요했음에 틀림없다. 갑골문에는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의식을 위하여 300명의 치앙羌인을 제물로 바친 기록이 있으며, 고고학적인 발견에 의해서 샤오툰小屯에서 한 채의 건물 축조를 위하여 600명 이상이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음이 밝혀졌고, 시뻬이깡西北岡의 한 자리의 묘의 내부에는 164명이 순장되어 있었다. - 253

[시경詩經]에는 탕湯왕이 시아夏를 정벌하기 직전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는 연설을 행하여서 그들을 훈계하여 전장으로 끌어내었다는 기록이 있다.

너희들은 모두 나 한 사람을 도와 하늘이 [시아夏]에 내린 벌을 수행하라. 내 너희에게 크게 보답하리라......너희가 내 서언誓言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너의 처자까지 죽일 것이니 너희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 253

상(商)의 기본적인 사회 조직은 강력한 군사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장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상(商)의 기본적 사회단위인 족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군사단위로 간주되었다. 그들의 거주지이자 방어시설인 소규모의 성읍에서 족은 그들의 필수적인 활동인 군사적인 기능을 수행했고, 족의 수령은 군사적 지도자였다. 도읍에서는 이러한 족의 군사적인 양사이 더욱 확대되고 계층화되었을 뿐이다. 왕은 읍(나아가서는 왕국)의 군사적 지도자가 되었고, 물리적인 힘을 소유해야만 했다. 왕 아래에는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왕 자신이나 왕 배우자, 왕자들이 이끌었던 족 집단을 포함한 많은 족들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족은 사회정치적 단위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단위이기도 하였다. 평화시에는 여旅라고 불리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상비군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었는데, 여에는 보통 족 구성원의 일부만이 포함되었지만 빈번하게 일어났었을 유사시에는 족 구성원 가운데 상당수가 군사원정에 참여하기 위하여 동원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띵武丁시대의 점복기록에는 치양羌을 정벌할 때 1만명 병력의 여군旅軍에 왕의 배우자인 후하오 족에서 3천명이 추가된 군사원정에 관한 기록이 있다. 더 이상의 원조가 요구되면 상왕국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성姓의 족 구성원들이 통치하는 여러 성읍으로부터 병사와 부대를 충당했다. - 254

활, 화살, 도끼창戈, 방패, 소형의 칼, 날카롭게 깎은 돌이 한 조의 병기를 이루었던 것 같다. - 255

왕의 피지배자들은 [서경]에 언급되어 있는 백성들인데 그들은 확실이 주어진 의무의 부분을 이행하지 않았거나, 이행하지 않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왕의 처벌의 결과를 육체적으로 감수하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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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측에서는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에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와 함께 너의 처자를 죽일 것이니 너희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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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이러한 상호간의 이해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집단들 사이에서의 공정한 이해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왕의 징벌을 위해서는 왕조의 흥망과 같은 대변동을 기다려야만 했지만 피지배자에 대한 징벌은 즉각적이고 엄격했던 것이다. 상(商)시대의 문자를 근거로 하여 몇몇 저자들은 상시대의 다음과 같은 체형이 가해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다리의 절단, 코의 절단, 귀의 절단, 눈을 찌르는 형, 거세, 얼굴이나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형, 족쇄형 등이다. - 260

데비드 카이틀리의 글

상(商)의 종교는 상(商)왕국의 기원과 그 합법성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상(商)시대에는 최고의 신인 제(帝)가 풍성한 수확과 전쟁에서의 신성한 도움을 부여하며, 왕의 조상들이 제와 중재를 할 수 있고 왕은 자신의 조상들과 교류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므로 상(商)의 조상숭배는 상(商)왕의 정치적 지배에 대한 강력한 심리적·이념적 토대를 제공하여 주었다. 점복을 통하여 결정을 내리는 왕의 능력과 기도나 제사를 통한 그의 영향 및 조상의 영혼의 의지는 왕 개인에게 정치권력이 집중화되는 현상을 정당화시켰다. 왕은 일반 평민들에게 미치는 조상의 축복이나 저주를 호소하거나 없앨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즉 중개자였기 때문에 모든 권력이 그러한 신권정치로부터 나왔다.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제사의식을 거행함으로써, 그리고 점복을 행함으로써 왕이 풍성한 수확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고 믿어졌다. -262

이러한 표장과 도구가 단순히 명령에 따라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제각기 과거의 권위 있는 왕조의 체제와 결합되었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지금에 그것들을 소유한다는 것은 옛 왕조의 권위의 이전을 의미하였으며 따라서 지금의 통치자의 합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265

상(商)왕의 상징들...
1 상당히 정교한 일부의 청동제기들. 청동제기는 상층 계급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행하기 위해 사용되는 귀중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모든 청동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높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청동제기의 크기나 무게, 형태, 장식, 명문에 따라 등급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가장 큰 청동기인 사각형의 네발솥에서 나타난 두 호랑이의 벌려진 입 사이에 위치한 사람의 얼굴은 간혹 왕의 배우자를 새긴 것이며, 그것은 최고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 267

2 기(旗)는 고대를 통하여 중요한 권위의 상징이었음이 분명한 것 - 268

3 전투용 도끼는 저우 우왕이 그의 군대에게 연설을 할 때 왼손에 들고 있었던 것으로 특히 그것이 지니고 있는 처벌이라는 명백한 의미에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상(商)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필수적인 상징물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268

4 전체적인 동물 양식의 장식 미술...그 상징적인 미술은 그것의 기초가 되는 종교적인 개념과 결합하여서 통치의 권위를 부여받은 상(商)사회의 지배계급에 대한 상징적인 분위기를 마련하여 주는 데에 하나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 268

상(商)왕국은 상(商)왕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에 있었던 이와 같은 읍들의 조직망으로 간단히 특징지워질 수 있다. 여기서 <직접 통제>라는 말은 상(商)왕이 읍을 통치하는 제후에게 읍의 유지 기반이 되는 토지와 그 읍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할 책임이 있었음과 왕은 이에 대한 댓가로 제후에게 봉사를 받거나 곡물을 징수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조직망은 방대했고-똥쭤삔은 천개에 가까운 읍의 이름을 갑골문에서 찾아냈다고 말한다.-그것에 대한 통치는 위계조직을 가지고 행하여졌으며 - 271, 271

여기서 말하는 지배지역이란 개념상으로는 상(商)왕이 직접적으로 경제적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영토의 단위를 의미한다.
...
우리는 왕이 이 지역에서의 모든 생산물과 모든 노동력의 일부를 취할 권리를 부여받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한 권리 부여는 방계 혈족인 소종(小宗)의 대종(大宗) 즉 직계 혈통의 우두머리로서의 왕의 신분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왕의 군사력과 왕이 왕국의 모든 구석에까지 임명하여 먼곳으로부터 가까운 지역에까지 분포되어 있는 성읍들을 왕 대신 다스리게 했던 제후들을 통하여 확실하게 보장되었을 것 - 278

상(商)시대의 어떠한 시기에 있어서도 토지가 사적으로 소유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반대로 상(商)의 점복에는 이방 국가에 의해 침입을 받았던 북서부 변경지방에 있는 경작지가 <나의 땅> 또는 <우리 땅>이라는 뜻인 <아전我田>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아我라는 문자는 점복기록에는 의심할 것 없이 국가나 왕 측에서 스스로를 칭하는 것이었는데, 그 형태(旗가 있는 무기)는 그 본질이 군사적 통제에 있음을 암시한다. - 286, 287

새로운 토지는 왕의 명령으로 농경을 위하여 벌목되고 개간되었다. -287

다음의 점복이 좋은 예이다.

왕이 중인衆人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경작지를 <집단적으로 경작>하라 그러면 훌륭한 수확이 있을 것이다! - 289, 290

이러한 관행은 어느 정도 크기의 농업 생산단위와 규율, 왕이나 그의 정부에 의한 감독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갑골문에 기록되어 있는 소신(小臣)들 중에는 집단적 농업에 종사한 노동집단을 감독하는 임무와 관련된 직책도 있었을 것이다. - 290

이러한 집단적 농업 작업조의 주된 구성원은 누구였는가? 위의 구절에 따르면 중인(衆人)이다.
...
장정랑의 다음과 같은 해석은 아마도 중(衆)에 관한 가장 적절한 요약일 것이다.

<중인(衆人)>은 농부였고 전쟁에서의 전사였다. 그들은 귀족과 반대로 보통 아주 낮은 신분을 차지했다. 그들은 토지에 대한 권리도 없었으며 확실히 농업집단과 열결되어 통치자에 의한 통제를 받았고 군인으로 징집되었으며, 공물을 납부했고, 부역을 이행했다. 그들이 군인이었을 때 생포되면 노예로 되었고, 그들이 징집을 거절했다면 그들과 그들의 가족 역시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생명과 재산은 왕과 귀족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본질적으로는 왕과 귀족의 도구요 소유물이었다. - 291

아마도 중인(衆人)은 상(商)왕국 내부의 여러 다른 성(姓)들 중에서 특히 낮은 각족의 비천한 구성원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농업 노동에 직접 참여하였고(갑골문에 많은 예가 나타남), 훈계를 들었으며 불복종했을 때에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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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衆人)은 상(商)의 농업·노동의 토대였고 전체적으로 낮은 하나의 경제적 계급을 이루었다.  - 291

이러한 낮은 노동 계급이 전쟁포로에 의한 새로운 구성원을 보충받았다는 신뢰할 만한 근거도 있따. 하나의 명문을 읽어보자

묻습니다 : 왕이 치양(多羌)에게 새로운 경지를 개간하도록 명령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
상(商)의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나라인 치양황(羌方)의 인민인 치양(羌)은 빈번하게 상(商)의 전쟁 포로의 원천이 되었고
...많은 치양(多羌)은 또한 갑골문에 왕의 사냥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어서 그들이 중인(衆人)과 함께 농업 생산에 합류한 것은, 비록 이용 가능한 자료 중에 이러한 기록이 드물다고 하더라도, 이례적인 경우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 291~295

상(商)의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나라인 치양황(羌方)의 인민인 치양(羌)은 빈번하게 상(商)의 전쟁 포로의 원천이 되었고 이러한 포로들은 소와 양, 염소와 같은 방식으로 제물로 사용하여 상(商)의 조상의 제사의식을 거행할 때 빈번한 희생물이 되었는데 점복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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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날에 점을 쳐서 묻습니다. 오는 을미날에 쭈이에게 여우 제사를 거행하고 치양羌인 15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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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쳐서 묻습니다 : 쭈X(祖X)에게 [제사를 거행하고] 치양羌인 400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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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허우쉬엔은 제물로 간주된 치양羌인의 숫자가 제시된 점복기록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희생되었다고 생각되는, 적어도 7,426명의 치양羌인을 가려내었다. - 293, 294




위에서 설명된 자원의 유동과 산업상의 전문화의 본질은 원자재, 곡물과 그 밖의 식품들 그리고 공산품을 아주 먼 지역에까지 운반하기 위한 효과적인 운송 조직망을 전체 조건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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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의 족인 전문적인 교역 집단이었고 보패가 교환의 화폐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교역자들이 상(商)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에는 의문이 없으며 사실 상(商)나라 사람들은 그런 솜씨좋은 교역자였으므로 많은 그들의 후손들은 교역이 종사하였는데 오늘날 장사꾼의 의미인 상인(商人)은 상(商)의 인민을 칭하는 말과 같다. - 307, 308

청동기 명문에 나타난 개별적 도상기호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그 분포가 정치적 경계와 일치하지 않았음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도상기호 쥐는 치산에서 산똥으로 그리고 허난에서 후난으로 펼쳐진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알려진 청동기에서 나타난다. 고대 중국의 혈족의 분할과정이 하나의 나라 안에 한해서 진행된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나라의 경계선은 유동적이었고 나라와 나라와의 관계는 지속적인 것이 거의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상(商)왕국이 국경에 인접해 있는 토지의 일부나 소국 전체까지 집어삼킴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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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국가들은 경제가 달랐고 사회의 발전도 차이가 있었다. 농업국가들의 인구가 증가하여 새로운 경지가 필요할 때 그들은 경작되지 않은 땅을 찾아서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인접한 사냥터와 목초지를 농경지로 바꿀 수 있었다. 이러한 고대의 용어로 기전寄田이 있는데...기전은 다른 나라의 새로운 땅을 경작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상(商)의 인민들이 새로운 경지를 개간하고 오랫동안 그것들을 경작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연히 경작지를 양도하는 데는 신경쓰지 않게 되고 따라서 새롭게 개간된 경지는 상(商)왕의 토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 323, 324
제2편 안양 이외의 상시대의 역사

5 정저우鄭州

얼리깡二里岡 단계가 안양의 왕조시기보다 이르다는 것은 일반적 견해 - 334

얼리깡의 상문화 유적을 특징짓는 흙을 다져서 쌓은 성벽은 각면의 길이가 1690~1870미터 이며 둘레가 거의 7킬로미터인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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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저우 얼리깡의 성벽은 건축기법상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대규모의 공공사업으로서, 그리고 방위용 건축물로서 그 내부의 복잡한 사회상을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성터 내부의 북동부에는 큰 기둥구멍이 길게 열을 이루고 있는 항토기법의 대형의 건물기초로 특징지워지는 얼리깡 단계의 거주지역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궁궐 규모의 주거지의 유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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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깡 단계의 정저우가 사회 내의 계층분화가 뚜렷하였고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였을 상시대의 성읍이었다는 진술 - 338, 339

얼리깡 단계의 도시의 유적에서는 계층분화와 전문적 분업이 고도로 발전된 사회의 양상뿐만 아니라 사회의 계급, 직업에서의 차이가 공간상으로 나타나는 주거모형까지도 보게 되었다. 그 중심부에 있는 성터는 성읍의 지배자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관리들이 거주하였던 곳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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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의 북쪽 교외에서는 부장품과 구조에 있어서 상당히 공을 들여 꾸며진 묘들이 그 주인이었을 귀족들의 거주구역과 함께 발견되었다. 그 묘에는 이층대와 요갱, 순장된 사람의 뼈, 개의 뼈, 청동제기 등이 있었다. 반면에 일반민들의 거주지와 쓰레기구덩이에서 발견된 그들의 묘들은 남쪽 교외에서 널리 확인되었다. - 356, 357

뤄따먀오(洛達廟) 단계에서 얼리깡 단계로의 변화에는 기본적인 문화의 연속성은 있었지만 거기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격동적인 사건이 따랐다. 허난河南북부지역은 이 새로운 단계에서 새로운 지배자-상나라의 지배층-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361


6 안양과 정저우 밖의 상 고고학

타이시촌臺西村 유적...건물 주위와 입구 근처, 바닥 아래 그리고 기둥 기초 아래에서 제사에 대한 희생물이었거나 순장되었을 것이 분명한 동물과 사람들의 뼈(목이 잘린 성인과 어린 소녀들을 포함하여)들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샤오툰에서 발견된 궁궐 건물들과 이것들과 관련된 묘에 비할 만한 것이며 따라서 귀족의 거주지로 불리어졌다. -368

치우완에 있는 주거·매장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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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역의 남쪽에 위치한 약 75평방미터의 지역 안에서 22명분의 사람의 뼈와 2명 분의 사람의 두개골, 12마리분의 개뼈가 발견되었다. 4개의 큰 바위들이 매장지역 중앙에 세워져 있는데 사람과 개를 그 주위에 매장하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대부분  손이 뒤로 묶인 채로 엎드려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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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장지역은 사람과 개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 장소였던 사社의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 394


7 상문명에 관한 일반적 문제

방사성탄소 측정에 의해 서기전 6000년대 말기와 3000년대 초기 사이로 확고히 추정되는 양사오仰韶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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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姓과 족族의 구성원들이 거주하였던 농경 부락은 분명히 기본적인 사회단위였으며 부락보다 규모가 큰 정치 집단이 존재하였던 증거나 전쟁이나 사회계급분화가 발생하였던 증거는 없다. - 425

롱산龍山문화...서기전 약3000년부터 3000년대 말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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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의 허난 롱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흙으로 만든 남자의 성기는 남성 조상 숭배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이며 어깨뼈 점술행사는 그 당시의 종교적 신앙과 정치구조를 암시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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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뻬이河北 남부 한딴 지엔꺼우촌에 있는 롱산문화 유적에서 건물기초 1자리와 마른 우물 2곳을 발견하였다. <건물기초 내에서 타격을 받은 표시와 머리가죽이 벗겨진 흔적이 있는 4개의 사람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이 희생자들이 살해된 후에 머리가죽이 벗겨졌음을 분명히 가리켜 주는 것이다...우물은 먼저 폐기된 뒤에 여기에 남자, 여자, 노인, 어린이를 모두 포함한 사람유골이 5층으로 매장되었는데 그 중에 일부는 목이 잘리운 채로 또 다른 일부는 몸부림치는 자세로 묻혀 있었다. 따라서 사망자 가운데 일부는 살해되었거나 산채로 매장되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매장 양상은 부락 사이의 전쟁이 치열하였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허난롱산 문화 시기에 중국 북부 사회가 <대내적인 형법제도와 대외적인 군사력>([商君書]에 기술되어 있는 후앙띠黃帝시대 사회의 성격)의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 426, 427

따원커우大汶口 사회의 구성원 사이에 빈부의 차이가 나타났으며(개인묘의 부장품의 수량과 성격에 따라서), 전문적인 질그릇 제조업이 발생하였고(물레로 마감하는 질그릇), 혼인생활은 아마도 일부일처제였을 것(남녀 쌍쌍의 합장묘)이라는 점들이다. - 428

신석기시대의 그들의 선조로부터 상나라 사람들을 구별지어 주는 것...질그릇 제조업의 새로운 발전...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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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질그릇의 새로운 발전이란 유약을 바른 흰색 질그릇을 말하는데 그것은 역시 상류게층 사람들만이 사용하도록 제작되었던 물품으로서 희소하고 진귀한 품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나라 사람들의 기원을 찾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왕조의 지배계층의 기원을 찾는 것이 될 수 있다. - 429


맺음말 : 고대 세계에 있어서의 상 왕국

사회진화의 관점에서 고대 중국문명의 형성 과정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단계를 거쳤다.

1 부락사회 단계
양사오 문화와 칭리엔강문화, 개개의 부락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사회단위였다

2 부락 상호간의 통합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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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속체의 본질...사회 내부에서 빈부의 차이 발생, 내외부에서의 폭력행위의 증거, 전문화된 수공업(질그릇과 같은), 아마도 상류층에게만 기여했을 종교전문가의 존재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다소 영속성을 띤 부락 상호간의 연맹체가 결속되어 전임 통치자에 의해 통치되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산-시陜西, 허난河南, 산똥의 롱산山東龍山 문화들을 이 단계로 분류하는데 동부 해안의 따원커우大汶口문화도 이 발전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3 국가사회 단계...고고학적으로는 얼리터우와 그 동시대 문명과 상문명, 저우문명으로 일컬어진다. 이 단계에서 주거지는 복잡하고 영구적인 조직망(보통 여러 단계로 계층화된)을 형성한다. 이러한 조직망의 전임 통치권은 특정의 성姓이나 족族이 독점하게 되어 통치자들은 비교적 영속적인 통제수단과 행정기구에 의해 보조를 받았는데, 이러한 행정기구에는 내외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억압할 수 있는 기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 454, 455

샌더스와 프라이스에 따르면 추방사회의 주요한 특징은 그 정치적 서열이 혈연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반면에 국가 단계는 기본적으로 합법적인 권력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이러한 구분은 플레너리에 의해 다음과 같이 더욱 명확하고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국가는 전문화된 통치계급이 있는 아주 강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집권화된 형태인데, 대체적으로 단순한 사회를 특징짓는 혈연적인 결속과는 동떨어진 형태이다. 또한 국가는 혈연이나 인척관계보다는 보통 직종의 전문성에 따른 거주 형태를 지닌 내부적으로 고도로 계층화되고 극도로 다양화된 것이다. 국가는 무력의 독점을 유지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진정한 법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어떠한 죄라도 거의 국가에 대한 범죄로 간주되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에 징벌은 단순한 사회에서와 같이 가해자측이나 그의 혈족에 책임이 부여되기보다는 규정된 절차에 따라서 국가가 처리하는 것이다. 개개의 인민은 폭력을 버려야 하는 반면에 국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고 군사를 징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금을 거두고 공물을 강요할 수 있다. - 457

문명은 그것이 산출되는 사회 내부에 풍부한 부의 잉여가 있을 때에만 가능
...
잉여는 인간이 만든 부의 일부
...
사회의 부를 그 사회의 소수의 집단이 손아귀에 집중시켜 - 460

고대 이집트에 관한 어떠한 지식이 없이도 투탄카멘(Tutankhamen)왕의 묘를 바라보고 우리는 효과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지역적으로 분화된 경제체계를 갖추었고 국가 사이의 또는 정치체제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던 극도로 계층이 분화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고 예측할 수 있다. 그 묘가 위대한 예술품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과도한 인간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임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 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