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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Ⅱ -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순돌이 아빠^.^ 2014. 5. 10. 21:47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Ⅱ -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지식산업사, 1989




위진남조 귀족제의 전개와 그 성격 - 봉건제와 관련하여
박한제

통치자로서의 사(士)와 피치자로서의 서(庶)라는 신분제적 구별은 중국고래의 것이어서 ‘위진남북조시대’만의 고유의 특징은 물론 아니다. - 8

황제의 전제권력의 확립에 의한 거대한 관료제국가의 성립이 중국적 고대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진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체제에 별다른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 11

이런 면에서 필자는 봉건제시대를 권력과 권위의 분열의 시대인 동시에 강고한 신분제의 확립시대라는 두 가지 지주로서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당시의 귀족이야말로 이 시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존재이며 그들이 가진 사회적 권위와 정치권력[皇帝]으로부터 자립하여 그것을 능가하고 또 그것을 포섭함으로써 황제가 갖는 권위와 권력을 나누어 갖게 되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또한 그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는 신분제사회를 연상할 만큼 타계층과 격리되어 있다는 점 - 13

계층적 질서구조란 ①사회생활과 ②국가의 부담의무 및 특권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엄격한 차별 내지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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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사회적 우월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점을 설명할 때 흔히 귀족의 배타적 계층의식의 표현인, 즉 같은 계층이 아니면 동좌同坐나 상지相知를 거부하는 사례를 들게 된다. - 14

이러한 귀족의 사회적 우월의식은 당시 사회에 이른바 ‘신분적 내혼제身分的 內婚制’의 성립을 가져왔다. 이는 귀족들이 혼교混交에 의해 생길지도 모르는 자기붕괴를 미연에 막고 서로간의 혼인을 통해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사회적 우월성을 폐쇄적으로 독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관행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귀족들은 스스로의 족보를 편찬하여 성씨를 판별하고 가문의 청탁淸濁을 분류하였다. - 15

사회적 신분이 관료직을 획득함으로써 정치적 신분으로 전화하지 않으면 그 신분의 영속성은 유지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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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법제적 특권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다름 아닌 관직의 독점과 세습권을 반자동적으로 부여받는 것이다. 이 점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향품鄕品 상품上品을 받은 자 중에서 한문寒門출신을, 하품下品을 받은 자 중에서 세족勢族을 찾아볼 수 없다”라든지 “(물이) 평탄하게 흐르듯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가만히 앉아서 공경公卿까지 오른다” “공公의 집안에 공이 나오고 경卿의 집안에서 경이 나온다” 등의 속언俗諺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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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관직독점현상의 제도적 장치가 다름 아닌 구품관인법이었다. 구품관인법의 최대의 특징은 바로 향품과 기가관起家官의 관품과의 대응관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향품이란 주지하듯 지방 군국에 설치된 중정관이 그 관할구역내에서 인물에 대한 향리에서의 평판(향론)을 청취하여 1품에서 9품까지 등급을 매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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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父祖의 관위官位에 비례해서 자제에 향품이 주어지게 되는 현상이 일상화된 것 - 23~26

귀족의 두 번째 특권은 복제권復除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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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조의 경우 재위자는 물론 사인士人 또는 그 자손으로 인정되는 자, 특 관료로서가 아니라 계층으로서의 사인에 대한 복제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서진시대는 호적제도상 사적(士籍)과 서적(庶籍)의 구별이 있었고, 사적에 기재된 자는 역(役)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편 서진시대의 호적은 특히 황적으로 지칭되어 여기에 기재된 자 가운데 서민은 모두 요역의 의무를 졌다. 서진시대 ‘족문제’가 제정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9품관에 취입한 자는 퇴관 후에 본인의 요역면제(군역면제 포함)는 물론 일족(一族)에게도 면제의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 일족의 면제는 관품에 따라서 삼세(三世: 조부 및 그 자손)에서 구족(九族 ; 고조 및 그 자손)에 까지 차이가 컸다. - 28

형법상의 특전이라 할 것이니 사서간의 적용법의 구별, 적용량의 차이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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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오(同伍)란 촌락을 중심으로 설정된 연좌조직으로 이오二伍에 겁략劫掠사건이 일어났을 때, 혹은 정부나 주(州)로부터 징발명령을 위반했을 때 그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우는 것을 그 주요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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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문제가, 사인 자신의 동오범에 의해 적형(謫刑)을 받지 않게 하는 대신 노객에게 죄를 주고, 노객이 없는 경우 수속輸贖하는 형식을 허가한 것은, 사서 구별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사인층을 국가지배조직의 말단인 오제의 대상에 실질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이념적으로 사인이 황제의 지배권력에서 일탈하는 것을 부정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 30, 31

조조와 군단장, 즉 조위의 황제와 귀족과의 관계...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일방적인 예속관계로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조조의 기병시, 그의 세력은 그 일족과 황건여중黃巾餘衆으로 구성되어 여러 군웅과 비교하여 안정된 것이었다고 볼 수 없으며, 명목뿐인 후한 헌제의 옹유 사실 자체도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하다면, 그 당시 상당히 큰 사회적 세력을 가졌던 호족들이 굳이 조조와 예속적 관계를 맺으면서까지 결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조조정권하에서는 귀족의 황제에 대한 예속성을 부정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관계는 자유민 사이의 사적 결합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런 관계야말로 봉건사회 특유의 인간관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위와 같은 사적 결합 자체가 누적되어 있던 조조정권하에서는 왕법王法 즉, 황제권력의 관철은 용이하지 않게 된다. - 33

남조귀족은 고귀한 지위를 독점하면서 자만심으로 가득 찬, 부패한 기생계층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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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집안에서는 헐렁하고 긴 소매의 옷을 입고, 높은 모자를 쓰고 굽이 높은 신을 신었으며 외출할 때는 으레 수레를 탔고 거동할 때는 여자종의 부축을 받았다. 이렇게 교만하고 부패하고 공허한 생활로 소일하는 귀족에게서 황제는 기대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 35, 36

귀족의 원류를 계보적으로 볼 때, 후한 유력관료에 대항한 영천·북해 지역 청류파 호족사대부에게서 찾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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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적 가치관과 향당질서원리가 합일된 ‘청(淸)’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둔 것이다. 외척과 환관의 공권(公權)의 사권화에 대한 유가적 교양을 가진 관료·지식인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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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후한 중기 이후, 향당사회에는 호족의 대토지소유제의 발달과정에서 일부 호족은 환관·외처 등 탁류와의 결합을 통한 ‘영주화’ 현상으로 구래의 향당공동체질서가 붕괴되고 소농민의 몰락, 계층심화라는 위기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탁류와의 대립에서 정치주류의 탈락, 혹은 유가적 신념으로 탁류의 사권화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이들 청류파는 탁류파에 의해 ‘당인(黨人)’으로 지목·탄압을 받게 되자 향당으로 돌아와 몰락 소농민을 기반으로 반정부적인 세론(향론)을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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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류파 지식인 가운데는 호족적 배경을 갖지 않은 인사(人士)도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호족출신이었다. 이들은 왜곡된 국가의 존재양태에 대한 정상적인 국가의식의 회복과 향당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스스로 재화(財貨)나 권력에 대한 자기 억제의 윤리를 실천함으로써 향촌에서 민중과의 정신적 결합을 도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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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곧 삼국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게 되고, 이들 대표적 사대부가로부터 위진귀족이 형성된 것...위진귀족을 생성시킨 모태는 후한말 청류세력 - 47~49


호한체제胡漢體制의 전개와 그 구조
- 통일체제 지향과 관련하여
박한제

영가의 상란 이후 호족 정권하에 잔류한 한인사족들의 행동을 가장 제약한 것은 다름아닌 전통적 중국인의 화이관념華夷觀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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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호족정권하에서 화이관념을 내세워 호족군주의 부름을 거절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란기에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 중 무엇이 가장 기본적인 것인가가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오히려 은의恩義를 입은 제왕에의 충절忠節이나 화이관념을 부차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여러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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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어느 세력에 귀부歸附하는 것이 보신保身이나 보가保家를 기할 수 있는가가 그드에게 현실적으로 부딪힌 최대의 과제였다. - 79, 80

한인사족에게는 화이관념은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화이관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보가·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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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륵이 부르자 숨었던 북평 양유는 선비족 단권이 허심虛心으로 그를 끌자 그의 우인 성반에게 공자孔子가 필힐의 부름에 스스로를 표주박에 비유했던 고사와, 이윤이 “어떤 임금을 섬기든 임금이며 어떤 백성을 다스린들 내 백성이라” 한 말을 들어 기꺼이 참여의 변을 늘어놓았고, 성반 역시 그의 참여를 이윤과 공자의 뒤를 잇는 일로 동조하고 있다. 이후 양유는 단씨段氏의 5주(五主)와 모용황하에서 요직을 지내다가 생애를 마친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 한인사족의 화이관의 적나라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 82

북위국가가 오호제국가와 현저히 다른 점은 건국 당초부터 오호제국가의 중추인 동시에 한계였던 부족제도의 탈피였고, 이것이 바로 북위초에 행해진 ‘부락해산’ 조처였다고 보는 견해가 종래 강하였다. 즉 북위 건국자인 태조 도무제 탁발규에 의해서 탁발부에 따르는 여러 부족에 대해서 단행한 소위 ‘부락해산’은 부락민을 경사京師 지역에 분토정거分土定居하고 부락민에 대한 족장의 지배권을 박탈하며 동시에 부락민을 편호화編戶化한다는 것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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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散’이라는 말은 부락제도를 어느 정도 온존시키면서 국가의 통제하에 정비한 조처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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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제조처는 이제가지 독립적 세력을 보지하고 있던 부족 세력을 부족의 하부단위인 씨족 혹은 읍락 등 작은 규모로 분단해서, 이렇게 분단된 집단을 한정된 지역[八國]내에 분사分徙시켜 집주集注토록 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국가권력의 침투가 보다 용이하게 되도록 만든 조처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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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遷徙된 부족을 태조는 8국(八國 ; 八部)으로 나누고, 각각에 팔부대부八部大夫 일인을 임명하고 그 아래 대사大師·소사小師 등의 관을 설치하고 있다. 이것은 부락민에 의한 부락장 선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락의 독립성을 가급적으로 제약하려는 조처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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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종래 군장대인君長大人을 통해서 이른바 간접적인 지배를 받고 있던 부인은 이후 제권帝權에 직속하게 되었다. 이 점은 국가차원에서 본다면 부족연합사회에서 통일국가로의 한걸음 발전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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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족을 보다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분토정거分土定居, 즉 목지牧地의 범위를 정해서 천사遷徙 즉 정해진 지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금지하는 형태인 것이다. - 83~85

계구수전計口受田...문자 그대로 인구 수에 따라 전토田土를 지급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대체로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첫째, ‘계구’란 호구조사의 시행을 말하는 것이다. 요나 몽고가 정복지의 물적 재화를 장악할 때는 쓰는 방법이 다름 아닌 호구조사였다. - 97

공종恭宗이 감국監國으로 있던 444년에 반포된 이른바 공종과전恭宗課田의 특징은...기내지민畿內之民이면 누구나 국유지의 개간을 강제하고, 각 개인마다 일정한 경작면적(22무畝)을 규정하여 그 경작지에는 이름을 써 붙이고 인두人頭별로 경작지를 할당하여 생산을 독려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 98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기 전에는 서방에는 요장의 후진後秦(384~417), 걸복국인의 서진西秦(385~414), 여광의 후량(後凉;386~403), 독발오고의 남량(南涼;397~414), 저거몽손의 북량(北涼;397~439), 이숭의 서량(西涼; 404~414), 혁련발발의 하(夏 ; 407~431) 등이 있었다. 이중 후진은 후량을, 서진은 남량을, 동진은 후진을, 북량은 서량을, 하는 서진을, 토욕혼은 하를, 북위는 북량을 멸망시킴으로써 오호십육국시대는 종언을 고하게 된다. - 109

북위의 대외정책의 귀결점이 대남방(南朝)정책에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통일이었다. 동시에 북위가 그토록 국력을 남방정책에 쏟았던 것은 남조의 물산(物産; 南貨)의 획득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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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백布帛은 북위가 필요로 했던 남화임을 알 수 있다. 실제 북방 유목민들은 가죽으로 옷을 해입는다고는 하나 흉노 이래 포백은 그들이 중원왕조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물품의 하나였다. 포백이 북위의 반사품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남조와의 전쟁에서 약탈한 품목에서도 포백류에 속하는 주능견포紬綾絹布가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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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인뿐만 아니라 북제·북주시대인들도 남화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였음은 남조로 간 빙사聘使들이 그곳의 물건 구입에 정신을 온통 쏟고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러한 남화의 획득을 북위인들은...전쟁을 통한 서북의 약탈로서 꾀하기도 하였다. - 112


균전제均田制와 균전체제
김유철

균전제均田制는 A.D. 485년 북위(北魏)왕조에서 시작되어 8세기 중엽 양세법(兩稅法)의 반포와 함께 붕괴된, 국가에 의한 토지관리제도로서, 규정상 국가권력에 의해 농민 개인에게 경지(耕地)가 균등하게 분배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환수(還收)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 133

이는 균전제가 기본적으로 토지균분사상에 입각해 소농민을 생산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현실로서 소농민의 생산에 방해하는 현상, 즉 대토지소유가 발달되어 있다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태화 9년 10월 효문제가 균전령을 반포하면서 내렸다고 여겨지는 조詔...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강자富强者가 산택(山澤)을 겸병하고 빈약자貧弱者가 토지를 확보하지 못하여 토지는 이利를 잃고 있는데 백성은 여유있는 재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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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세가 균전제를 주청奏請한 이유도 “백성은 기근으로 흩어지고 호구豪口는 점탈占奪하는 바가 많다”고 한 것에서 보듯 당시 토지소유의 불균형과 이에 따른 소농민의 몰락이 주요한 사회문제 - 145

국유황지國有荒地의 개간을 장려하려는 권농정책을 효문제기에는 더욱 강조되어 공상잡기工商雜伎들까지 농사를 짓도록 하고, 농민들에게는 더 많은 채과采果를 심도록 독려하기도 하며 농가에서 소를 빌려주는 것을 의무화하고 권농정책을 지방관의 최우선 과제로 독찰하였다. 태화 원년에는 관리들에게 요역을 줄여서라도 지리地利를 다함에 힘쓰고, 농민들이 농상에 게으름을 피우면 처벌하도록 지시하기도 - 153

균전제가 시작된 것은 토지소유권을 확립함으로써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광대하게 방기된 황지를 개간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킴으로써 국가권력의 기반을 확보하려는 국가권력의 의지에서 출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유토지의 법적 보장과 국유지의 분배방법으로 균전제가 정착하게 되는데, 노동력 즉 인정人丁을 기본 단위로 설정함으로써 전체적인 지배체제의 원칙이 형성되어, 수전대상자의 선정과정에서 신분질서가 정립되고 수전의 반대급부로 부과의 원칙이 확립되어 정丁을 지배의 단위로 하는 균전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균전체제는 정을 대상으로 국가권력의 직접적인 장악을 원리로 하는 것으로, 한대 이래 지속되어 온 제민지배이념의 연속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203, 204


당唐 전기의 지배층 - 구귀족과 관료기반의 확대
유원적

당조의 관료제는 수대의 잇따른 정치개혁책의 정신을 계승하여 중앙집권책을 강화하고 이를 율령격식으로 법제화하여 보다 치밀한 관료제를 실현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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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를 관료제의 일면에서 고찰하는 데 중시할 것은 엄밀한 문서행정의 획기적인 발달이다. 진정한 의미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는 모든 통치기구가 횡적·종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동일한 법령·행정이 동시에 전국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운용되는 체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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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國政에 필요한 호구·정수丁數·과액課額·재손災損 등의 모든 통계가 중앙에 집결되어 예를 들면, 식량의 경우 석(石)·두(斗)·승(升)·합(合)·작(勺) 등으로 전국적 통계를 표기 - 227, 228

북조 이래 수많은 역성혁명(易姓革命) 속에서도 근저에서 흔들리지 않는 지배집단은 북위-서위-북주-수-당이거나, 북위-동위-북제-수-당으로 이어지는 관료귀족으로서 이의 계통을 거치지 않은 가계(家系)는 당초唐初 지배층의 중핵에 들 수 없었다. - 230


고대유목국가의 구조
김호동

이러한 유목지는 어느 일 개인의 사유물이라기보다는 유목집단 전체의 공유물이었고, ‘공유’라고 해도 엄밀히 말하자면 ‘한시적限時的인 독점적 사용권’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선적인 사용권을 갖고 있는 집단이 이용하지 않는 시기에 다른 집단이 양해를 얻고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바로 소유권 침해행위로 간주되지는 않는 것이다. 유목민은 이처럼 자신들의 우선적 사용권을 갖는 일정한 목지 안에서 비교적 안정된 행로를 따라 이동생활을 하였다. - 260

고대유목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은 ‘부족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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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순수한 자유의사에 의해 기초하고 원칙적으로 그로부터의 탈퇴를 제지할 수 없는, 마치 현대의 국가연합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국가건설을 주도한 집단의 무력적 우위를 전제로 이루어진 결합이므로 어느 특정집단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가조직내에 포함되기도 하고, 또한 마음대로 그 조직으로부터 이탈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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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국가를 구성하는 씨족 혹은 부족의 자유는 정치·경제적인 독립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각각의 당해 집단의 수령의 지위는 유목군주의 지지가 아니라 그 집단의 구성원의 지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앙 정부의 임명과 지지에 의해 그 지위가 보장되는 정주국가의 관리나 지방장관과는 달리 그 권력의 기반이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 집단은 국가경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생존과 존립이 가능하였다는 점에서 그 경제적 기반 역시 내재적이었다.
때문에 유목부족의 수령과 부족원들은 정치·경제적 이해가 유목국가의 그것과 일치할 때에는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굳이 감내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국가경제에서 이탈한다고 해서 곧 그 집단이 경제적 자멸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유목국가에 속하지 않았을 때보다는 포함되었을 때 혹은 그 국가가 추진하는 사업이 부족들에게 가시적인 이익을 보장할 때 비로소 부족연합체는 유지될 수 있었다.
유목수령의 지위가 부족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부족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유목군주의 의지를 그들에게 무조건 요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목군주 역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목수령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마음대로 관철시킬 수는 없었다. - 268~270

이들이 국가라는 조직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데에서 오는 속박감을 감수하고서도 현상에 만족할 수 있을 만한 보상이 지불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보상의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형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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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군주는 어떠한 방법으로 ‘헐벗고 배고픈 유목민’을 만족시켜 주었는가. 초원에서는 생산되지 않으나 유목민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물자는 정주지역으로부터 입수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교역과 약탈 그리고 공납 등의 경로를 통해 충족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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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파견과 전쟁의 주도는 기본적으로 그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고, 그 결과 획득된 물자의 재분배과정 역시 그가 장악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성이 강한 유목부족들을 제국체제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 자신의 주도하에 획득된 물자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로부터 요청되는 이러한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내는 사람이야 말로 ‘현명’하고 ‘용맹’한 군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 277, 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