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어린 아이를 둔 젊은 아빠이던 형사가 참 고맙다. 그 형사는 내가 피해 상황을 이야기하기 편하게 해주려고 여경을 불러 함께 있게 해줬다. 또 내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두서없었을 텐데 차분히 들어줬다.
무엇보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울면, 자신도 마음 아파하며 담배를 연거푸 피워대기도 했다. 나보다 더 힘든 표정과 말투로 ‘나도 자식을 낳아 키우는 아빠다. 너희 아빠는 아빠도 아니다’라고 말해줬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경찰에 신고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신고한 내가 잘못한 게 아니구나’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용기를 내 부끄러워하지 않고 피해 사실을 낱낱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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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이야기해도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고, 또 떠올라서 밥을 새웠는데, 그날만큼 속 시원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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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친한 언니 둘이 왜 여름 방학 동안 가출을 했냐고 해서 그동안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처음으로 친구라고 생각하게 된 이해심 깊은 언니들. 그 언니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예전하고 달리 꺽꺽거리는 울음이 줄었고, 무용담처럼 말하고 있었다.
왜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나와 친한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언니들을 보며 힘이 났다. 집에서 그 사람에게 당하며 살 때는 그렇게 평생 살다 죽겠구나 했고, 내가 당한 일을 평생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나와 보니 내가 잘못한 게 아닐 뿐 아니라 이런 삶을 살아낸 것만으로도 격려와 칭찬을 받을 일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내 삶에 관해 말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치유를 위한 첫걸음, 첫 호흡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이제부터 그 사람한테 당한 일들을 확실하게 씻어버리고 진짜 멋지게 살아야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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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를 당한 기억으로 힘들고 아파하는 친구가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가만히 곁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겠다. 친구가 울면 같이 울어줘도 좋겠지만,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아 어렵다면 그냥 예쁜 손수건 한 장 들고 옆에 조용히 앉아 있어보자. 힘든 시간을 보내는 친구 곁에서 당신이 언제나 거기 있는 나무 같은 친구가 돼주기를 바란다.
- 은수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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