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것들/스치는생각

신문지 한 장

순돌이 아빠^.^ 2016. 12. 20. 16:14

  



1.

오랜 전 부산에 살던 때였습니다. 한번은 집회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뭐 물론 정부 정책에 반대한다는 뭐 그런 거였겠지요 ^^

 

눈이라고는 보기 힘든 부산에서 살던 우리가, 추운 겨울날 어느 대학의 체육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불이고 깔 것이고 뭐고 없이 그저 체육관의 벽이 찬바람을 가려준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었지요. 먼 곳에서 와 낮에 한판 집회를 했던 우리들은 피곤한 몸을 그냥 바닥에 눕혔습니다. 웅크리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웅크리게 되고, 서로 가까이 가라고 하지 않아도 서로의 몸을 맞대고 잠을 청하게 되더라구요. 겨울 호숫가의 오리들처럼

 

잠깐 누워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 나가서 신문지를 한 다발 구해 왔습니다. 깨어 있던 저와 몇몇 사람이 그 신문지 바닥에 누워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위에 덮어줬습니다. 사람은 많고 신문지는 적어서 2장을 덮어줄 수도 없어서 오직 1장씩만 몸 위에 얹어 주었지요. 누구하나 왜 1장 밖에 안 주느냐고 불평하는 사람 없이 모두들 잘못 힘을 주면 찢어질 신문지를 조심스레 몸에 감쌌습니다.

 

신문지를 다 덮어주고 저도 자리에 누워 몸을 웅크렸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누군가가 제 몸 위에 신문지 한 장을 덮어줬습니다.

 

참 따뜻하더라구요. 그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서울의 한 겨울, 커다란 체육관 바닥에 그냥 누워 있는데 그 신문지 한 장이 그렇게 따뜻할 줄은.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신문지를 덮어 줬을 때 잠결에도 신문지를 몸에 감싸던 사람들의 마음을 알겠더라구요.

    



 

 

2.

마음이 답답하고 바람을 쐬고 싶은 날이면 제가 잘하던 일이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로 가서 아무 차나 타는 겁니다. 그리고 시골 어디에 내려 길을 걷는 거였지요. 걷고 걷다 해가 저문다 싶으면 손을 흔들어 지나는 차를 잡아 타고 여관이나 민박집이 있을만한 곳으로 데려다달라고 해서 자기도 했습니다.

 

그날도 걸었습니다. 무작정 아무 때나 그야 말로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거지요. 그런데 마침 그날은 제가 너무 늦게 해가 진다는 것을 떠올렸나 봅니다. 지나가는 차는 없고, 산 속이고, 밤이 되었습니다. 겨울이라 날은 춥고 살짝 난감하더라구요.

 

어느 날 갑자기 무작정 그런 상황에 놔두면 누구나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여행을 다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 방법은 생기는 법이지요.

 

주변이라고 둘러봐야 불빛은 보이지 않더라구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길을 가 봐야 무슨 답이 있을까도 싶구요.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머리를 돌리고 있는데, 저 앞에 무언가 희미한 빛 같은 게 보이더라구요. 가까이 가 보니 달빛에 비닐하우스가 살짝 비치고 있었습니다.

 

이거다 됐다!’ 싶더라구요. 일단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정말 따뜻하더라구요. 겨울 바람이 불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습니다. 추운 날에도 비닐하우스에서 농작물을 키울 수 있게 되는 이유를 알 것 같더라구요. 온 몸으로 하는 농업 체험이라고 할까요? ^^

 

일단 찬바람을 피했으니 그 다음은 잠을 자야겠지요. 어떻게든 새벽에 해가 뜰 때까지 버텨야 길을 찾든 지나는 차를 찾든 할 테니까요. 더 걷자니 배도 고프고 피곤해서 못 하겠더라구요.

 

누웠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몸을 기댔다고 할까요. 아무튼 흙더미에 몸을 맡겼습니다. 비닐하우스를 찾은 것이 첫 번째 행운이었다면, 그 다음은 마침 제 가방에 신문이 있었던 게 두 번째 행운이었지요.

 

조심스레 다리를 덮고 몸도 덮고 얼굴에 뒤집어썼습니다. 비닐하우스가 찬바람을 막아주고 신문지가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3.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이래저래 마음이 답답하고 그래서 어딘가로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바로 순창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그 동네에 방을 빌려 주는 곳이 있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마침 시골에 있는 자기 집이 비어 있다네요. 그 얘길 듣고 집으로 들어가서 간단하게 속옷과 책만 챙겨서 터미널로 갔습니다. 어딘가로 가야겠다 결정을 하고 전화를 하고 짐을 싸 나오기까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지요.

 

서울에서 3시간 30분을 달려 순창으로 왔습니다.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고, 물가를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친구네는 시골에 있으니 이것저것 불편하기도 하고 애들이 친구가 없어서 너무 심심해하기도 해서 읍내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네요. 그리고 지금은 아는 사람이 비워둔 집이 있어서 이사 전까지 읍내서 지내고 있다고 하구요. 읍내에 있으니 애들이 친구가 있어서 너무 좋아한다며, 어쨌거나 시골집서 지낼 만큼 푹 쉬다가 가라네요.

 

가게에 들러 참치캔이랑 양배추랑 상추를 사들고 지금 있는 친구네 시골집으로 왔습니다. 일단 가볍게 방을 걸레로 닦고, 쌀을 씻어 밥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뭘 할까 생각해 보니 친구가 옛날 시골집이라 많이 춥다는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심지어 습기가 많이 차서 겨울에도 화장실 바깥쪽 창문을 열어 둬야 한다고 하니...

 

방에 있는 창문에 손을 대어보니 역시 바깥에서 찬 기운이 많이 들어오더라구요. 어떻게 할까 싶었습니다. 하루 몇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가서 뽁뽁이를 사올까도 싶었지만 그건 좀 귀찮고...어쨌거나 창문을 막아야 찬 기운이 덜 들어올텐데 싶더라구요.





 

주변을 둘러보니 저기 구석에 신문이 굴러다니는 게 보입니다. ‘그래 바로 저거야!’ 싶었습니다. 또 마침 둘러보니 유리 테이프가 있네요. 가위는 찾아보니 못 찾겠고 손톱깍기가 있어서 그걸 들고 나름 방한 공사를 했습니다. 방의 창문 유리와 화장실 가는 문의 유리에도 신문지를 붙였습니다.

 

겨울에 뽁뽁이든 뭐든 붙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한 겹을 붙이느냐 아니냐가 큰 차이를 만듭니다. 창문 가까이 손을 대어 보면 공기의 느낌이 다르다니까요.

 

 

4.

사들고 온 봉지 커피를 타서 마당에 앉았습니다.

푸르고 누른 생명들 위로 비치는 햇살이 따뜻합니다.

 

하나의 햇살이 제게 온기를 안겨 주고

한 장의 신문지가 제게서 추위를 가려줍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 잠시 쉬러 찾아갈 곳이 있고

마음이 슬플 때 아픈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