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예술과 함께

스며드는 위로와 따뜻한 용기

순돌이 아빠^.^ 2017. 2. 14. 10:38


1.

어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세월을 두고 쌓아온 것들이 가끔은 가라앉기도 하고 가끔은 떠오르기도 하는데, 어제는 그것들이 제 마음에 크게 펼쳐진 것 같습니다.

 

그냥 무작정 전철을 타고 아무 역에나 내렸습니다. 처음 보는 역이었고, 처음 보는 동네였습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동네가 나왔습니다. 전철을 타고 그리 멀리 간 게 아니어서 제 걸음으로 몇 십 분 걸으니 아는 동네를 만난 거지요.

 

저기 버스 터미널이 보입니다. 어딘가로 갈까 해서 버스 시간표를 보니 대부분 버스의 막차가 지난 시각이었습니다.

 

일단 배가 고프니 뭘 먹자 싶은데 마침 제가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혼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제 뭘 할까 생각했습니다.

 

마침 지하에 큰 책방이 있습니다. 책을 구경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냥 별 달리 갈 데도 없고 해서 갔습니다. 책방에 책만 파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문구류도 팔더라구요. 제가 좋아하는 예쁜 형광펜을 몇 개 골라 사고 나니 기분이 살포시 좋아졌습니다. 그러잖아도 필통 안에 많이 것들이 들어 있어서 겨우 잠글 수 있는데, 이렇게 여러 개의 형광펜을 더 샀으니 필통을 더 큰 것으로 바꿔야겠습니다.

 

 

밤이 되니 졸리기도 하고 날은 춥고 많이 걸어 피곤하기도 하고 해서 집으로 왔습니다. 텔레만의 오보에 곡을 틀어 놓고 자리에 누웠다가 껐습니다. 그냥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자고 싶어서요.

 

 

 

2.

새벽 4시쯤 되니 우리집 멍멍이 순돌이가 저를 깨웁니다. 순돌이도 제가 그 시간쯤 되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나 봅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더 누워 있고 싶어서 순돌에게 좀 만 더~~’ 했더니 순돌이도 그냥 옆에 누워 다시 잠을 잡니다. 6시가 넘으니 도저히 몸이 근질근질 해서 안 되겠던지 순돌이가 열심히 저를 건드리고 핥습니다. 할 수 없이 순돌이를 데리고 마루로 나왔습니다.

    


 

 

매일 아침 처음 하는 일이 음악을 트는 일입니다. 오늘은 기분도 그렇고 해서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을 틀었습니다. 이 곡을 튼 이유는 제목이 비창(悲愴)’이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요.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싶다가도 굳이 꼭 이렇게까지 살아야 되나...’ 싶은.

 

누구의 잘못이다 싶으면 그 사람에게 욕이라도 퍼붓겠지만 딱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 보다는 인간이란 존재로 태어나 살다보니 겪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싶어 욕을 할 때도 없는 그런 순간이 있지요. 떠오르는 사람과 떠오르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라고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겠냐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이 있어요. 화가 나서 폭발하기보다 마음이 무겁고 울적한 거지요. 정말 별 일 아닌데 내가 괜히 과민해서 그러나 싶기도 하고.





3.

오늘은 왠지 차이코프스키의 곡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에밀 길렐스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비창을 틀었습니다.


고통은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고도 하고, 고통을 통해 그동안 느끼지 못하던 세상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하지만...어쩌면 그것은 그 고통을 직접 겪고 있지 않은 사람의 말일지도 모릅니다.

 

고통 속에서는 이것이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될지 아닐지와 같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니까요. 다른 세상을 느끼기 위해 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다른 세상을 느끼지 않고 싶은 것이 고통 속 인간의 마음이지 싶어요.

 

사후에 평가하고 설명하는 고통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순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고통이 있겠지요


   


1악장을 듣고 있으니 어느새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습니다. 신기하지요? 전철을 타고 길을 걷고 형광펜을 사도 풀리지 않던 마음이 베토벤의 피아노 곡을 들으니 조금씩 풀려 갑니다.

 

2악장을 들으니 인간에게 기쁨이 순수하지 않듯이 인간에게 고통 또한 순수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가 탔다거나 뭐 그렇다는 게 아니라 기쁨 속에도 슬픔의 순간이 묻어 있고, 고통 속에도 따뜻한 설레임의 순간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싶습니다. 고통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인간의 삶을 바라봤을 때 그렇다 싶습니다.

 

3악장을 들으며 조금씩 용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새로움을 느낀다고 할까요. 다다단 다다단 소리가 날 때 이 하는 순간이 마치 계단이 되는 듯 딛고 나아가라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며칠 전에 백건우가 연주하는 이 곡을 들었는데 에밀 길렐스가 연주를 하니 또 다른 느낌입니다. 뭐랄까...조금 더 생동감 있다고 할까요...그렇다고 백건우의 연주가 생동감이 없다는 게 아니라...두 사람을 비교하고 싶은 게 아니라 두 사람 연주가 모두 좋아서 오른손 왼손에 쥐고 싶은 마음입니다.

 

 

 

4.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을 들으며 마음이 조금씩 풀리기는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겨울을 지나는데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고 할까요. 입춘이 왔는데 아직 눈이 쌓여 있다고 할까요.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14달빛을 틀었습니다.

 

   





1악장을 듣는데 조금씩 마음이 길을 찾습니다. 겨울눈이 녹아 여기저기로 흐르다 시내로 강으로 길을 찾아간다고 할까요. 이대로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닥터 지바고>에 나왔던 눈 녹는 봄의 풍경이 펼쳐질지도 모르겠습니다.

 

2악장입니다. 봄의 물길은 흐르고 새싹이 돋고 바람에 나뭇잎이 할랑입니다. 빛이 비쳐 새싹이 돋기도 할테고, 새싹이 고개를 들기에 빛을 받을 수도 있는 거겠지요. 제 마음도 고개를 들고 빛을 향했으면 좋겠습니다. 제 다리 사이에 순돌이가 몸을 꼬고 꾸벅꾸벅 좁니다.

 

3악장이 시작되니 눈이 밝아지는 느낌입니다. 마음이 온전히 밝아지고 행복해지지는 않았지만...피곤할 때 포도당 사탕을 먹은 느낌이랄까요. 눈이 밝아지면서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몇 번 들었던 곡을 다시 듣는 게 좋은 점은 어느 정도 곡의 흐름을 알고 있어서 피아노 소리와 함께 흥얼거릴 수 있다는 겁니다. 단단단단단단단단 하면서 곡을 따라 가다 보면 어디론가 가고 있는 저를 느낍니다. 산사람이 나무의 길을 따라 가고 새싹이 햇살의 길을 따라가듯 말입니다. 음악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짐을 느낍니다.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은 밝아짐을 느낍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피아노를 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고 못 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 스스로 이런 음악의 길을 따라 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늘 즐겁고 편안한 사람에게는 위로나 용기 같은 게 별로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같이 수시로 흔들리며 문득 문득 고통을 느끼는 인간에게는 스며들 듯 다가오는 위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겨울눈이 녹아

봄의 강물을 이루듯

 

가만히 스며드는 위로가 쌓여

제 삶에 따뜻한 용기로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