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자식이 밥을 먹는지 아닌지, 어디 아픈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엄청 관심이 많고 온갖 정성을 쏟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어떤 것에 기뻐하거나 슬퍼하는지, 요즘은 무슨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의 물음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1.
부모가 자식을 낳는 이유는 세상의 풍요로움에 기여하기 위해서도, 삶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한 생명을 축복하기 위해서도 아닐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이유는 번식일 겁니다. 번식에 성공하면 부모가 기쁘고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거겠지요.
부모에게 번식의 결과물인 자식의 생존은 아주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그러니 자식이 무엇을 먹는지 아닌지, 어디 아픈 건 아닌지가 중요해지겠지요. 자식이 어디 손끝이라도 다칠라치면 화들짝 놀라던 부모가, 자식이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해지고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부모의 번식과 자식의 삶의 의미는 큰 관계가 없는 거니까요.
제가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 보면 우울증에 걸린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대학가서 취직까지 했지요. 하지만 정작 본인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부모야 자기 자식이 시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별 관심 없구요. 자식이 살아남아서 번식을 성공시켜 주는 게 중요하지, 자식이 무엇에 마음이 설레고 울적해지는 지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제가 겪거나 바라본 많은 부모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나쁘다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한 생명체로써의 부모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삶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는 데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섹스를 해서 정자와 난자를 결합시켰고, 그 결과로 자식이 생겼고, 그 자식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번식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2.
제가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가 또 있는데 <안녕하세요>입니다. <안녕하세요>에 나오는 사연 가운데 많은 경우가 가족이나 번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식이 셋 있습니다. 남편은 더 낳자고 하고, 아내는 그만 낳자고 합니다. 남편이 더 낳자고 하는 이유는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겁니다. 아내가 그만 낳자고 하는 이유는 자식을 출산하는 것도 힘들고 돌보는 것도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남편은 자식을 돌보지도 않고 집안일도 하지 않고, 한 달에 돈은 60만원 가져다주면서 자기는 맨날 이 모임 저 모임 다니면서 놀고 있는 상황이구요.
남편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번식인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 아빠하고 놀고 싶어 하거나 말거나, 아내가 자식을 낳고 키우느라 겪은 아픔과 힘겨움을 울면서 얘기 하거나 말거나입니다. 그냥 번식만 하면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진심이고, 삶의 중요한 의미일 수 있겠지요.
그러면 혹시 이 남자에게는 자식뿐만 아니라 아내 또한 번식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아내가 피임을 하자고 해도 피임하면 건강에 나쁘다는 이유를 들이대며 피임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섹스와 번식을 위한 도구로써 아내가 존재하는 거지요.
섹스와 번식을 위해 남자가 여자와 관계를 맺고 결혼을 한다는 것이 무조건 나쁘거나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기분이 어떻냐 와는 관계 없이, 많은 결혼의 목적이 섹스와 번식일 가능성이 높을 거니까요.
다만 섹스와 번식‘만’을 목표로 하니 그 인간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 또한 높겠지요. 왜냐하면 인간 관계라는 것이 섹스와 번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으니까요.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라는 노랫말이 있는 것 같아요. ‘너와 번식까지 생각했어’라는 의미로 들릴 때도 있구요.
3.
<미스 함무라비>에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아빠 성동일이 집에 돌아온 자식에게 ‘왔어~~~’라고 하며 반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식은 아빠가 반기거나 말거나 제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리구요. 같은 드라마에 부모의 재산을 놓고
법원에서 다투는 자식들이 나오는 장면도 있구요.
부모가 자식을 번식의 도구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만큼 자식 또한 부모를 생존과 번식의 도구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또한 좋다 나쁘다 하고 싶지는 않구요. 자식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모를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냥 그들 또한 자신의 생존과 번식이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겠지요.
부모가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는지 무관심한 자식을 나쁘거나 잘못 되었다고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그런 거니까요. 의식주 제공해주고 돈만 주면 그만인 거지요. 그 의식주를 제공하고 돈을 주기 위해 부모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도움을 주면 되는 거니까요. 저도 그렇게 살았구요.
자식에게는 부모가 번식을 위해서도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거에요. 번식을 하려면 가족을 벗어나 짝을 찾아야 하잖아요. 짝을 찾으려면 밥도 먹어야 하고 옷도 사 입어야 하고 스마트폰도 있어야하고 영화도 봐야겠지요. 짝을 찾는데 도움이 될 만한 학력이나 직업도 필요할 거구요. 그런 것들을 갖추는데 부모는 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비용을 지불하는 존재가 될 때가 많아요.
식당의 홀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얼마라도 벌려면 수도 없이 안녕하세요를 중얼거리고, 주문을 받아서 주방에 전달하고, 무거운 그릇을 요리조리 사고 나지 않게 나르고, 여기 저기 동시에 불러대는 손님한테 대답하느라 얼마나 혼을 빼놔야 하는지 몰라요.
편의점이든 식당이든 1만원을 벌려고 해도 온갖 일을 해야 하는데, 부모는 말만 잘 하면 돈을 줘요. 의식주를 해결해 줌으로써 내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짝짓기를 위한 평판이나 외모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도 주니 얼마나 좋아요. 번식을 위한 짝을 찾는데 부모에 비견할 만큼 손쉽고 크게 이용할 수 있는 도구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에요.
그러니 부모는 점점 돈만 주면 되는 존재가 되어가는 거지요. 그 돈으로 자식은 짝짓기와 번식 기회를 찾구요. 물론 그렇게 자식이 짝짓기와 번식을 하는 것이 부모에게도 도움이 되니까 부모도 그렇게 헌신할 수 있는 거겠지요.
4.
생존과 번식을 위해 가족이라는 관계를 맺고 산다는 것이 나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여름에 햇살이 뜨겁다고 태양에게 ‘넌 나빠!’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겨울이 춥다고 눈에게 ‘넌 싸가지가 없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좋다 나쁘다 할 것 없이 그냥 그런 거니까요.
그리고 또 그냥 그런 것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다양한 감정이나 마음의 기능을 갖고 있다는 걸 거에요. 공감이라는 것도 있을 거구요. 그게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할 거 없이 그냥 그렇다는 거에요.
<안녕하세요>에 나왔던 사연이에요. 아빠는 평생 돈 벌어서 자기 술 먹고 노는데 다 쓰고, 엄마가 마트에서 일해서 가족들 건사하며 살아온 거에요. 게다가 아빠는 술에 취해서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그 뒤치다꺼리도 엄마가 한 거지요. 이제 그 자식은 자라서 결혼도 하고 따로 살고 있어요. 그러면서 평생 고생하며 살아온 엄마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울어요.
이제 엄마는 자신의 생존이나 번식과는 별 관계가 없어요. 이미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짝도 찾았으니까요. 그런데 혼자 힘겨운 삶을 감당하며 사는 것을 생각 하니 마음이 아픈 거에요. 엄마가 나에게 돈을 줄 것도 아니고, 짝을 찾아 줄 것도 아니지만 엄마가 힘들고 괴로울 것 같아 아파 우는 거에요.
<미스 함무라비>에는 박차오름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엄마는 아빠한테 맞으며 살았어요. 그리고 그 아빠는 엄마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하구요. 지금 엄마는 정신병원에 있어요. 자식인지 아닌지 알아보지도 못하구요.
박차오름이 엄마를 돌보며 살아요. 그런 엄마를 보면 마음이 아파요. 눈물이 흐르구요. 직장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으려는 것도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엄마가 나의 생존과 번식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영향을 끼칠 수도 없어요. 오히려 많이 아픈 엄마를 돌봐야한다는 생각에 연애나 결혼을 멀리하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연애나 결혼보다는 엄마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점점 잊혀진다는 게 더 슬픈 일이구요.
박차오름의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면서 살아왔어요. 그리고 지금은 몇몇 ‘이모’들과 함께 살아요. 남자한테 사기당하고, 두들겨 맞고 하면서 오갈 데 없어진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 거지요. 혈육이거나 피붙이라서 이모인 것이 아니에요. 그 이모 가운데 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해요.
가족이란 게 별 거 있나. 외로운 사람들끼리 함께 어울려 살면 그게 가족이지.
5.
세상 어딘가에는 공감은 거의 없고 생존과 번식만 있는 가족이 있을 거에요. 생존과 번식과는 관계없지만 가족이라고 부르며 사는 사람들도 있을 거구요.
아마 세상 많은 가족들은 생존과 번식에 공감을 더하며 살아가겠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그냥 그렇다는 거에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할 것도 없고 그냥 그렇다는 거에요.
다만...
인간으로
가족을 이루며 살아 왔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싶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행복이나 기쁨
위로와 평안이 더 많기를 바란다면
내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밥을 먹는
그 사람이 기뻐하는 것에 내가 기뻐하고
그 사람이 슬퍼하는 것에 내가 슬퍼한다면
누군가를 위한 도구도
무언가를 위한 수단도 아닌
나 자신이 그러하듯 그 사람 또한
그 자체로 온전히 살아 있는 한 인간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대한다면
나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산다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이
좀 더 소중하고 따뜻한 그 무언가로 다가올 것 같아요
분노 외면 울부짖음 외로움 힘겨움 등이 가득한 가족이기보다
반가움 즐거움 뿌듯함 만족감 기다림 등이 많은 가족이 되겠지요.
'성.여성.가족 > 성.여성.가족-여러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 인간의 마음을 파괴하고 분노케 하고 (0) | 2018.07.26 |
---|---|
사랑 또는 연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빠져드는 (0) | 2018.07.26 |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한 생각의 변화 (0) | 2018.07.16 |
[스크랩] 교황 고국 아르헨티나 `낙태 합법` 법률안 하원 통과 (0) | 2018.06.16 |
종교나 권위, 의무나 책임을 내세워 여성을 굴복시키려는 남성 (0) | 2018.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