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빨간머리 앤> 시즌2:8화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요. 앤과 친구들이 모여서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청혼을 했고, 나는 어떻게 청혼을 받고 싶고 뭐 그런 얘기를 해요. 진지하고 꿈에 부풀어서요. 곧 있을 프리시와 필립스의 결혼을 앞두고 들떠 있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 결혼...어딘가 뭔가 조금씩 엇나가는 면이 있어요. 겉으로는 뭔가 근사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만...첫번째 이유는 남자인 필립스의 성적 지향과 관련이 있어요.
두번째는 프리시와 필립스가 생각하는 결혼의 방향이 다르다는 거에요. 필립스가 있는 방에 들어가서 프리시가 말해요.
프리시 : 대학 공부와 집안일을 다 잘하도록 할게요. 잘 챙겨드릴 거에요.
i promise to find a way to balance college and marriage. you won't be neglected.
필립스 : 우리가 결혼한 후엔 아내로서 헌신하길 바라. 네가 학교에 얽매이면 사교계로 진출하기 어려요. 그게 아내의 임무야.
after we married, i'm gotta need your full devotion as my wife. we can't socila-climb if you're locked away at school. it's a wife's duty.
프리시는 결혼 후에 학교와 결혼 생활의 균형을 찾도록 노력할 거고, 니가 실망하지 않도록 잘 할 거라고 해요. 근데 필립스는 아내가 학교에 매이게 되면 사회적으로 신분 상승할 기회를 놓칠 거라고 해요. 그래서 아내로서의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대요. 아내의 의무 같은 것을 내세우면서요.
프리시의 아버지한테 결혼 승낙을 받을 때와는 많이 달라요. 그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 같이 하더니만...
꿈도 열정도 모두 버리고 오직 자신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해서 결혼하는 건가 싶어요. KBS <안녕하세요>에 한번씩 나왔던 사람의 모습인 것도 같구요.
교사인 필립스에 비해 학생인 앤과 콜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앤 : 우리가 어른이 돼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 서로 청혼하자.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예술가가 되고, 나도 신나는 뭔가가 될게.
it the time comes and we haven't found our romatical kidered spirits, i propose that we propose to each other. you'll be and artist, in all the ways of your choosing, and i'll be...i'll be something that thrills me, too.
콜 : 동등한 결합
a union of equals.
앤 : 함께하는 개인. 진정한 삶을 사는 자유로운 영혼
individuals together. free spirits living our true lives.
그런 대화를 나누며 둘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지요. 그들은 각자 원하는 무언가가 되자고 해요.
이어지는 콜과 앤의 말이 정말 멋져요. 위도 아래도, 명령하는 사람도 따르는 사람도 없는 동등한 결합에 대해 얘기해요.
함께 하기는 하는데 각자 개인이에요. 가족이든 부부든 민족이든 국가든 어떤 무리에 포함되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잊고 지시와 규칙에 순종하는 그런 부속품이 아닌 거지요.
각자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무리지어 있는 것이고, 무리 지어 있으면서 개인으로 살아 있는 거지요.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국민이 지배자를 위해서,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며 산다면 그곳에는 자유로운 영혼도 진정한 삶도 없겠지요.
그러고보니 이런 생각이 드네요. 인간은 과연 동등한 걸까요?
인간이 동등한지 아닌지는 얘기가 좀 길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할 것 같아요. 음...달리 생각해서 인간과 인간에게 위-아래, 높고-낮음, 귀함-천함 등등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일상의 눈으로 보면 "여러분"은 나이가 몇 살이든 태어나기 약 9개월 전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다 깊숙이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은 40억 년 훨씬 전부터 계승된 생명의 놀라운 기원을 갖고 초기 지구의 가공할 혼란 상태로부터 시작되었다.
...
생명은 분자적이면서 동시에 천문학적인 현상이다. -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호, 1999
인간은 영적인 존재는 아닐 거에요. 영혼이란 것이 저 높은 어느 별나라에 있다가 태어나면서 우리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죽으면 다시 저 별나라로 가는 것도 아닐 거에요. 인간이란 게 지은 죄에 따라 윤회하는 존재도 아닐 거구요.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물질적이고 우주적인 현상이지 않을까 싶어요. 분자, 유전자, 세포...그런 것들과 관련된 존재인 거지요.
양반의 씨가 따로 있고, 노비의 씨가 따로 있을까요? 따져보면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고, 세포의 형성과 발달이지 않을까요? 양반의 피가 따로 있고, 노비의 피가 따로 있나요? 따져보면 혈액 속에 백혈구가 있고 적혈구가 있고 등등이겠지요.
생명체로써는 신분을 타고 나지 않을 거에요. 한 생명체가 태어나보니 사회적으로 어느 신분에 속한 존재가 되는 거겠지요.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微物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 10억의 10억 배의 또 10억 배의 그리고 또 거기에 10배나 되는 수의 원자들이 결합한 하나의 유기체가 원자 자체의 진화를 꿰뚫어 생각할 줄 알게 됐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부르주아와 노동자 등등 사이에 위-아래, 높고-낮음, 귀함-천함이 있다는 생각조차 물질과 분자들의 결합과 관련있을 수도 있어요. 우리의 생각과 감정, 의식과 기억이란 것이 뇌의 활동과 관련이 있고, 그 뇌가 물질적인 존재라면 말이에요.
만약 어떤 인간을 귀함과 천함으로 구분하는 느낌/생각이 존재한다면 왜 그렇게 작동하게 되었는지 그 뇌에게 물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
앤과 매슈가 함께 음식을 만들며 대화를 나눠요.
앤 : 신부는 되고 싶은데 아내가 되기 싫다고 한 거 기억하세요?
remember when i wanted to be a bride but not a wife?
앤의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거에요. 신부는 되고 싶은데 아내는 되기 싫다니... ^^
매슈 : 처음 만난 날 말했지.
앤 : 결혼과 결혼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i think i need to re-imagine the whole marriage/wedding thing.
매슈 : 왜?
앤 : 흰 드레스 입고 '네'라고 답하는 빛나는 순간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목소리도 야망도 없는 예쁜 소유물이 되진 않겠어요.
it isn't about just one brief, shining moment in white or saying i do. i'm not gonna give myself over to someone and be a prettyish piece of property without voice or ambition.
부엌 여기 저기를 오가며 이런 말들을 하는 앤의 모습이 정말 똑똑하고, 정말 멋지게 느껴져요. 목소리도 야망도 없는 예쁘장한 소유물이 되진 않겠다니...앤은 저보다 37배 훌륭한 사람이에요. ^^
저는 10대 때부터 20대까지 <삼국지>의 여러가지 번역본을 읽었어요. 10대 때부터 제 속에는 주종 관계나 상하 관계가 너무나 익숙하다 못해 멋져 보이기까지 하더라구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식의...지금 생각하면 좀 어이 없는데...
어쨌거나 앤은 저의 10대와는 다른 10대를 살아가고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요. ^^
앤 : 남편과 아내가 아닌 동등한 동반자가 될래요. 둘 중 누구도 꿈을 버릴 필요가 없죠.
we will be equals and partners, not just husband and wife. and neither one should have to abandon their heart's desire.
단지 그저 흔한 남편과 아내가 아니래요. 동등한 존재이고, 동반자이자 파트너래요. 누구도 자기 가슴 속에 간직한 꿈과 희망을 버릴 필요가 없대요.
앤 : 양쪽을 부르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야 해요. 양쪽을 부르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야 해요. 같은 단어로 부르도록요.
매슈 : 그게 뭔데?
앤 : 인생의 반려자
life mate
'결혼' 말고 '사랑의 유대'라고 하는 거에요. 어떤 두 명이든 되죠.
instead of a marriage, i shall call it a love bond. and any two people can have one.
결혼이라고 하지 말고 사랑의 유대라고 하자는 말...정말 멋지지 않아요? 말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그렇게 되면 좋겠죠.
어떤 사람이든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하되 동등하고,
그 근본이 사랑의 유대라면...^^
유대/유대감 없는 결혼보다는 유대감 있는 친구가 낫지 않을까요? ^^
제가 지금까지 <앤>을 시즌2:8화까지 봤는대요...가장 인상 깊고 충격적인(?) 장면은 프리시의 결혼식이었어요.
프리시가 결혼식을 하다가 중간에 뛰쳐나가요. 영화 <졸업>에서처럼 두 사람이 뛰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프리시 혼자 결혼식장을 뛰쳐나가는 거에요.
여기까지는 그저 뜻밖의 일이었어요. 프리시가 결혼을 거부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그래도 뭐 어쨌꺼나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 다음 장면이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하고 멋졌어요.
결혼식장을 혼자 뛰쳐나와요. 남편일 될 뻔한 사람도, 목사도, 엄마, 아빠도, 동네 사람도, 친구들도 모두 지켜보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딸이 결혼식장에서 뛰쳐나가는 모습을 본 엄마와 아빠의 서로 다른 표정을 보세요. ^^;;;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얀 눈밭 위를 혼자 달려가요. 앤을 비롯해 놀란 친구들이 프리시를 쫓아가요. 그러다 프리시가 눈밭에 철퍼덕 넘어져요. 머리에는 꽃을 꽂은 면사포를 쓴 채 말이에요.
친구들이 달려와 프리시를 에워싸고는 프리시를 걱정하며 부축을 하려고 해요. 그토록 기다리고 설레던 결혼식이었는데......
그때 프리시가 고개를 들고 웃기 시작해요. 웃기만 하나요. 벌떡 일어서서는 빙글빙글 돌고 소리치며 춤을 춰요. 그러니까 친구들도 프리시 주위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고 웃으며 빙글빙글 함께 춤을 춰요.
자유로움
해방감
속 시원함...뭐 그런 게 느껴져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동네 여성들이 한밤중에 모닥불 주위에 모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구요.
전 프리시가 잘 했다고 생각해요.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을 거에요. 누군들 모두가 지켜보는 결혼식장을 뛰쳐나가는 게 쉽겠어요.
하지만 아닌 거는 아니잖아요. 아닌 걸 맞다고 억지로 우기며 살아봐야 서로 괴로울 수도 있어요.
프리시의 판단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큰 사고(?)였지만 한 번 "이건 아냐!"라고 하고 나면,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잘된 것은 잘된 것이라고 하기가 좀 더 수월해지지 싶어요.
그거 순응하고 적응하고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느낌이나 감정, 나 자신만의 의미과 가치를 향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아갈 수 있겠지요. 결혼과 결혼식까지 한 방에 날려버렸는데 뭔들 못하겠어요? ^^
그리고 이건 앤이나 다이애나, 루비 같은 친구들한테도 중요한 일 같아요. 보고 느낀 게 있잖아요. 여성에게 결혼이 숙명이 아니라는 거, 결혼 또한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거.
다른 어른들은 잘 말해주지도 않았고, 도대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펄쩍 뛸 일이지만...여러 날 온갖 것을 함께 해 온 자신의 친구가 직접 보여주고 들려준 것이 있잖아요. 그걸 참고 삼아 자신들도 무언가를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겠지요.
마지막 장면은 모두가 눈싸움을 하는 모습이에요. 그렇게 서로가 즐겁게 깔깔대고 웃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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