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더 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어제 시즌 1의 1회를 봤어요. 거기에 보면 여성만을 노려서 죽이는 놈이 나와요.
그놈이 스스로 의식을 했든 안했든, 살인자의 머리 속에서는 다양한 평가가 진행될 것 같아요.
먼저 대상이 여성인 것은 성적인 이유도 있겠지만...상대가 여성이라는 거,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자신에게 저항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평가된 것은 아닐까 싶어요. 의식 속에는 그냥 '여자'라고 했을 지라도, 무의식 속에는 나보다 힘이 약하고, 내가 공격해도 맞서 싸우기 어려울 '인간'을 선택하는 거지요.
대상이 된 인간이 나보다 힘이 세거나 내가 공격을 했을 때 맞받아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면, 그것이 의식적이든 아니든, 아마 대상 목록에서 빠졌겠지요.
외모나 행동과 같은 정보를 수집하고, 공격시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시뮬레이션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공격해도 좋겠다는 판단이 이루어졌을 것 같아요.
여기서 여성이라고 '인지'된 대상은 공격에 대한 위험도를 낮추고, 공격 가능성을 높이는 신호/이미지가 되었을 수도 있을 거구요.
그놈은 여성의 집에 침입해서 물건을 만질 때 장갑을 껴요. 아마도 살인 이후 경찰의 수사에 대비하는 거겠지요.
이 말은 이미 자신의 행동과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상당한 수준까지 예상을 하고 있다는 거겠지요. 침입, 살인, 경찰, 수사, 지문 등등등.
뉴스에 나오는 폭행범들에 대한 보도와 재판 과정, CCTV의 존재나 경찰의 대응 등등 관한 정보가 머리 속에 쌓여 있고, 범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런 정보를 이용하는 거지요.
내가 죽이면 -> 경찰 수사가 시작 될 거고 -> 경찰은 증거를 찾기 위해 지문이 있는지를 확인할 거고 -> 체포되지 않으려면 지문을 남기지 말아야 하고 -> 지문을 남기지 않는 방법에는 장갑을 끼는 것이 있고...
남성이 여성을 공격할 때는 물리적, 법적 위험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험도도 함께 평가할 것 같아요.
<김지은입니다>라는 책이 있어요. 전 충남지사였던 안희정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글쓴이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적은 거지요.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그러고는 "너는 미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미투에 대한내 의견을 물었다.
...
"제가 감히 어떻게 미투를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내게서 미투를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결국 내 대답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후 안희정은 내게 다시 성폭행을 가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덫을 놓고 먹이를 기다리는 사냥꾼에게서 나는 옴짝달싹 못 하고 그대로 비틀려졌다.
미투를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은 뒤에 공격을 했다는 것은 자신이 공격을 한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 미리 예상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상대가 미투를 했을 때 벌어질 일, 자신에게 닥칠 손해(?) 같은 것을 계산하는 거겠지요.
자신이 저지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지면...나를 좋아해주던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거고, 도지사 자리나 대통령 선거에 나가는데도 문제가 있을 거고, 가족들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길 거고 등등의 것들이 평가 항목에 들어 갔던 건 아닐까도 싶어요.
자기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갑자기 내가 미쳤다고, 욱해서 그랬다고 등등으로 변명할 수도 있을 거에요. 그리고 정말 자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요.
하지만 머릿속은 갑자기도, 욱도 아닐 수 있지 싶어요. <더 폴>의 그놈처럼 하나하나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고 계획하고 평가해서 범행을 진행하는 거지요.
겉으로 스쳐지나가다 보면 '욱!'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욱이 욱이 아닌거에요. 겉으로 드러난 빙산보다 훨씬 큰 얼음 덩어리가 물속에 잠겨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드라마 속 그 놈만 그런게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두들겨패는 일도 비슷하지 싶어요.
저년은 여자다, 여자는 힘이 약하다, 나는 남자다,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다, 내가 저년을 때려도 저년은 나를 때리지 못할 것이다, 맞아도 쉽게 경찰에 신고하진 못할 것이다, 만약 경찰에 신고를 하면 저년이 평소에도 행실이 나빴다고 하자, 그날은 술을 먹고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실수를 저지른 거라고 하자, 순간 욱해서 그랬지만 정말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들이 의식되거나 의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릿속을 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보면
우연이라고 했던 것은 준비한 것이고
욱해서 그랬다는 것은 평가하고 계획한 것일 수도 있을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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