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복사는 보기보다는 일화적인 수준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원료, 제조과정, 원가, 문화적 고착성, 유행, 사회계층 등의 모든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변화하는 듯한 의복이 사실은 도처에서 끈질기게도 사회적 대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치 금지법은 정부의 조심성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신흥 졸부들이 자신들을 모방하는 것을 보고 사회 상층이 분노를 일으킨 결과이기도 하다. 파리 부르주아지의 부인과 딸들이 비단옷을 입는 것에 대해서 앙리 4세도, 귀족들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으로도 출세하려는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또 아무리 사소한 정도라도 사회적으로 사회적으로 상승했을 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의복을 입고 싶어하는 욕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부 역시 대귀족의 과시적인 사치를 결코 막을 수 없었따. 그래서 베네치아에서는 산모가 어마어마한 치장을 앴고 나폴레에서는 장례식 행렬이 대단했다.
가장 미천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발랑시엔 근처의 플랑드르 마을인 루메지에서는, 1696년에 한 신부의 일기에 적힌 바에 의하면, 부유한 농민들이 모두 의상의 사치에만 전념하여 “쩖은이는 금줄, 은줄이 간 모자 같은 것만 찾고, 여자들은 한 척 높이의 머리 손질과 의상에만 몰두 하고 있다” - 440
중국의 경우를 보면 15세기 훨씬 이전부터 관리의 의복이 새 수도(1421)인 북경 부근에서부터 사천이나 운남의 변방지역에 이르기까지 똑같았다...관리들은 집에서는 면으로 된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그들이 공무중일 때였으며, 이것은 사회적인 마스크였고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증이었던 것
…
회교도에 의해서 정복당했다고 할 수 있는 인도의 경우 적어도 상층 계급은 지배자인 무굴 인들의 옷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441
유행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느 곳에서나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이다. 그들의 의복은 아무리 아름답거나 혹은 투박하거나 간에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지속될 뿐이다 - 443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도 샬로네와 브레스의 농민들은 참나무 껍질 등을 이용하여 “까맣게 물들인 직물만을 입고 있었으며, 이 방법이 너무나도 일반화되어서 많은 나무가 훼손되었다” - 447
-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 일상생활의 구조>, 까치글방, 2009
한 벌의 옷
한 켤레의 신발에도
그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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