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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사치품, 그리고 계급과 잉여

순돌이 아빠^.^ 2021. 8. 10. 17:02

예컨대 설탕은 16세기 이전에는 사치품이었다. 17세기 말 이전에는 후추가 그러했다.

한때 손수건이 사치품이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에라스무스가 그의 <예절론>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모자와 소매에 코를 푸는 것은 촌놈이나 하는 짓이다...코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손수건에 받고 동시에 점잖은 사람들로부터 몸을 약간 돌리는 것은 우아한 일이다”

사치란 다만 희귀한 것이나 허영인 정도가 아니라 성공, 사회적 매력, 가난한 사람들이 언젠가 도달하려는 꿈이어야 한다-그러나 막상 그렇게 도달하는 순간, 이전의 영예는 곧 사라져버린다. 어떤 의사 겸 역사가가 최근에 이렇게 쓴 바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먹고 싶어하던 귀한 음식이 마침내 일반 대중에게 도달했을 때 갑자기 그 소비량이 폭증한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억눌렀던 식욕이 폭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단 대중화하고(“명예의 상실”과 “확산”이라는 이중의 뜻에서) 나면 이음식은 곧 매력을 잃게 된다...그리고 일종의 포만한 상태에 이른다”

이 게임에서는 경박함, 자만, 변덕이 만개한다. “18세기 영국의 작가들의 문장에서는 거북 수프에 대한 기상천외한 찬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거북 수프는 감미로우며 폐결핵과 무기력증에 대해서 최고의 효과를 내고 식욕을 돋운다. (런던 시장이 주최하는 만찬에서처럼) 호사스러운 만찬에는 반드시 거북 수프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치는 낡아빠지게 되고 유행은 지나가게 된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교훈이다...사치는 사실 그 어느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 수준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영원한 “계급투쟁”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에 의하면 “필요 이상의 것에 대한 정복은 필수적인 것의 정복보다도 더 큰 정신적 자극을 준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지 필요의 존재는 아니다. 경제학자인 자크 뤼에프는 “생산은 욕망의 딸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대중적인 사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충동, 이러한 필요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여러 계층적 차이가 없는 사회는 없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사회적 차이도 사치로 연결된다. 

사치는 산업혁명 이전에 성장이 한계에 부딪친 사회내에서, 생산된 “잉여”를 부당하게, 건전하지 못하게, 그러나 멋지게 비경제적으로 사용하는 것 - 249-254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음식은 요리책에 나오는 음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요리책은 특권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1788년 한 미식가가 프랑스의 훌륭한 요리에 대해서 작성한 목록이 그러한 것

확실히 중국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 세련된 음식, 다양한 요리, 심지어 단순히 배부르게 먹는 것조차도 부자들의 이야기였다. 

지난날 세계의 훌륭한 요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치의 편에 서는 것이 된다. - 249-256

 

-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 : 일상생활의 구조>, 까치글방, 2009

에밀 졸라, <목로주점>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조차 구하지 못해 허덕이는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이

사치를 부리고 사치품을 자랑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생산자들이 갖지 못하는 것을

기생하는 자들이 갖기 때문이 아닌가 

 

귀족들은 무슨 일을 하였기에

높고 커다란 저택에서 파티를 열고

커다란 목걸리와 화려한 마치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일리야 레핀, <볼가강의 배끄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