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작품이었어요. 음...뭐랄까...그냥 우리 사는 이야기랄까...
진짜 저렇게 큰 집이 있을까 싶은 으리으리한 집은 나오지 않아요.
근육질의 잘생긴 남자가 나쁜 놈들을 때려잡지도 않구요. ^^
옥주-동주, 아빠-고모, 두 쌍의 남매가 여름의 몇 날을 함께 지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이에요.
<원더우먼>에 나오는 집에 비하면 그냥 친근해요. 많은 것들이...할아버지 방에 있던 자개장, 마당에 키우고 있던 고추, 이제는 닦아도 때가 잘 지지 않을 것 같은 씽크대, 요즘은 보기 어려워진 가정용 변압기, 할머니가 눈이 덜 침침했을 때 썼을 것 같은 재봉틀, 그리고 김추자의 노래...
고모의 모습도 친근해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집을 나오긴 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할아버지와 아빠와 조카들에게 잘 하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서운함도 있고, 또 오랜만에 오빠와 동네 수퍼 앞 평상에 앉아 오징어 구워가며 한 잔하는 게 좋기도 하고...
<검은태양>에 나오는 아저씨에 비하면 여기 나오는 아빠도 참 평범(?)해요. 그냥 우리 자신일수도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일 수도 있겠지요. 사업이든 뭐든 하다 잘 안 되고, 아내와 이혼하고, 재개발 지역 반지하방에 살다 철거를 앞두고 할아버지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하고...
아빠와 고모도 옥주와 동주와 같은 시절이 있었겠지요. 서로 퉁퉁 거리며 무뚝뚝하게 말을 하다가도, 먹을 게 있으면 챙겨주기도, 마음에 안들면 서로를 밀치며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가 한 모기장 안에서 같이 잠을 자기도 하고...세월이 흐르면 옥주와 동주의 관계도 아빠와 고모의 관계처럼 될까요
고모가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듯이 옥주도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겠지요. 고모가 할머니를 그리워하듯 옥주도 엄마를 그리워하겠지요.
아빠가 자식의 잘못을 덮어주고 감싸주듯이 동주도 나중에는 그런 아빠가 될까요. 바라는 선물을 갖기 위해 가족들 앞에서 재미난 춤을 추는 아들을 바라보며 크게 웃는 아빠가 될까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리 살아왔고, 아빠와 고모가 그리 살아왔듯이 옥주와 동주도 그리 살아가겠지요. 사람은 바뀌어도 늘 그 자리에 있는 집처럼 말이에요. 달라지는 것이라면 점점 더 삐걱거리고 점점 더 페인트 칠이 벗겨지겠지요.
제가 아주 가끔 아버지를 만나 요즘 건강은 어떠시냐고 물어보면 늘 하시는 말씀이 다리가 좀...이었어요. 그리고 제가 요즘 다리가 좀...해서 한달 넘게 병원을 다니며 치료도 받고 약도 먹고 있어요.
제가 어릴 때 이런 저런 사고를 치면 저희 아버지는 야단을 치거나 그러지 않고 대체로 아무 말씀 안하시거나 괜찮다 괜괜찮다 다독이셨어요. 순돌이가 가끔 사고를 치면 제가 그렇게 말해요.
괜찮아 괜찮아. 그냥 너 하고 싶은대로 해. 책임은 아빠가 질게.
옳고 그름도 아니고, 좋고 나쁨도 아닌 그런 그런 관계들과 그런 그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살아가요. 우리가 살았던 자리를 또 다른 누군가가 살아갈 거구요.
옥주가 앉아 있는 저 자리를 예전에는 고모가 차지하고 있었겠지요. 그리고 또 언젠가는 옥주가 떠난 자리를 누군가가 차지할지도 모르구요.
그들의 얘기가 아닌,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본 것 같아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요. 하루쯤 지나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니 괜히 마음이 뭉클해지네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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