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입니다. 자유롭게 길을 다닐 수 있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를 만날지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법보다 훨씬 참혹하고 암담합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 여성에 대한 살인과 폭력 때문입니다.
22년간 캐나다에서 발생한 모든 아내 살해 사건에서, 여성의 별거 요구가 전체 살인의 63퍼센트에서 주요한 사건 동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
21세기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아내 살해 사건에서는 217명의 희생자 중 45퍼센트가 살해될 당시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했거나, 이혼 수속 중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 데이비스 버스, <이웃집 살인마>, 사이언스 북스, 2006
연인인데 헤어지자고 했다고, 부부인데 이혼하자고 했다고, 만나자고 하는데 만나지 않는다고…사람을 죽이다니…
짧게 말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살인이 있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누가 그 피해자의 불안과 두려움, 혼란스러움과 당혹감을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
노예와 자유민의 가장 큰 차이는 인신 구속과 생사여탈권일 겁니다.
아무도 자유민의 신체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자유민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인 거지요.
이에 반해 노예의 경우는 노예주가 노예의 신체를 구속하고 감금하고 묶어둘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설사 죽인다고 해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주인의 권리이고 노예가 처한 현실인 거지요.
(특히 도주했던 노예에게) 족쇄 채우기나 목걸이 표식 달기의 관행 외에, 매질, 구금, 맹수와 싸움시키기 등 거의 무제한으로 노예를 체벌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재산으로서 노예에 대한 주인의 처분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의미 - 역사학회, <노비․농노․노예>, 일조각, 1998, 59쪽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1059615.html?_fr=mt2
법에는 남성에게 여성의 인신을 구속할 권리도, 생명을 박탈할 권리도 부여하고 있지 않지만 법 위에 아니면 법보다 더 강한 남성 지배는 노예에게 행했던 짓을 여성에게 행하고 있습니다.
법 위에 법보다 강한 현실과 현실의 힘이 존재하는 거지요.
농장에서 주인이 세운 사적 규율private law enforcement이 곧 노예들의 법이었던 것이다. 특히 여자 노예들은 주인이나 농장관리인의 성적 희롱과 폭력 앞에서 무력하였다. - 역사학회, <노비․농노․노예>, 일조각, 1998, 102쪽
위의 글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연인/부부 관계에서 남성이 세운 사적 규율이 곧 여성들의 법이었던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남성/남자친구/남편의 성적 희롱과 폭력 앞에서 무력하였다.
제도적으로 노예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나, 개인 및 집단으로서 여성의 삶에는 노예들이 겪었던 일들과 비슷한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거지요.
노예제도가 없기 때문에 노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해도 노예와 같은 인간이 존재하며, 다른 자유민을 노예화하려는 시도나 폭력은 계속되고 있는 거지요.
추노와 노예 사냥꾼
벌써 20년도 넘게 지난 <추노>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추노는 도망 노비를 쫓는다는 말이라지요.
도망을 갔든 그냥 떠난 것이든 그 사람이 자유민이라면 누군가 쫓아가서 억지로 잡아올 필요가 없겠지요.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지요. 왜냐하면 자유민이니까요.
집이 없어 떠돌던 길거리에서 배가 고파 울고 있던 그건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미국 흑인 여성 노예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보면 한 여성 노예가 백인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칩니다. 노예 제도가 없는 곳에 가서 사랑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일을 해서 돈도 벌지요.
그런데 여기에 노예 사냥꾼이 찾아옵니다. 그때의 두려움과 혼란이란…
자유민들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A가 B를 억지로 끌고 간다면 납치가 될 것이고, 밧줄로 묶거나 채찍으로 때리거나 하면 폭행이 될 겁니다.
그런데 <추노> 속 조선시대도 <빌러비드>의 노예 시대도 다른 사람을 납치 폭행하는 것을 합법이라고 했고 범죄라고 비난하지 않았으며 당연한 일인듯 허용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강제로 붙잡고 끌고가는 것이 그 개인의 악행을 넘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고 법과 제도로써 보호되고 있던 거지요.
같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의 인신을 구속하고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사회와 국가가 용인하고 보호하고 있던 겁니다.
의지
노예와 자유민의 또다른 큰 차이는 의지와 의지의 실현 문제일 겁니다.
내가 어떤 의지를 가지는지, 그 의지를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것인지 등은 내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결정 권한이 내게 있으니 자유민이겠지요
하지만 노예에게는 의지를 가질 권리도, 어떤 방법으로 그 의지를 실현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인 거구요.
<빌러비드> 등에서 보듯이 흑인 노예가 누구와 섹스를 할지를 결정하는 건 백인 주인입니다. 부르면 부르는대로 침실로 들어가서 섹스를 합니다. 주인이 이 백인하고 하라고 하면 이 백인하고 하고, 저 흑인하고 하라고 하면 저 흑인하고 합니다.
어디서 살지, 누구와 함께 살지, 결혼을 할지도 말지도 주인이 결정합니다.
만약 오늘날 어떤 여성이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자유롭게 결정할수도 없고, 더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협박과 폭력을 겪어야 한다면 그는 자유민입니까 노예입니까
만약 오늘날 어떤 여성이 내가 누구와 섹스를 하고 싶은지 결정할수도 없고, 더이상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목졸림을 당하고 뺨을 맞고 발길질을 당한다면 그는 자유민입니까 노예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결정해야 하는데,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려다 죽어야 한다면 그는 자유민입니까 노예입니까
이들을 자유민이 아닌 노예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또한 이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상한 과일
흑인 여성 가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노래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그냥 노래지만…
남부 지방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려요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잎에도 뿌리에도 피가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남부 지방의 바람 속에 검은 몸둥이가 흔들립니다
Black body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열매는 흑인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묶고 두들겨 패서 나무에 목매달아 죽인 거지요.
https://imnews.imbc.com/news/2022/world/article/6408334_35680.html
2022년 9월15일 인도에서 15세와 17세 두 자매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명의 남성들이 이들을 납치하고 성폭행한 뒤 나무에 매단 것입니다.
개인의 일탈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으며,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게다가 언제 누가 또다른 피해자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미국이라서 그런 것만도, 인도라서 그런 것만도, 한국이라서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지배하려는 자가 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가 국적이나 피부색을 가리지 않고 오랫 동안 이곳저곳에 존재하고 있는 거지요.
해당 가해자-피해자의 일이기도 하고, 전쟁이나 빈곤과 같이 인류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여자들이 살기 좋아진?
‘여자들이 살기 많이 좋아졌다’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제 철지난 얘기다’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살기 많이 좋아졌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나요?
개인의 감상이나 기분이 아니라 그 의견을 뒷받침할 자료나 근거는 어떤 것이 있나요?
https://www.yna.co.kr/view/AKR20210308099951530
누군가 말하는 ‘여자들이 살기 좋아진’ 세상의 수준/상태가 1년에 여성 100명가량이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하고 있는 겁니다.
예전에 비해 지금이 여자들이 살기에 더 '좋아진' 것이라기보다는, 예전이 지금보다 여자들이 살기에 더 '나빴던' 거겠지요.
백인 주인이 여성 노예를 강간 살인하는 것은 조사도 받지 않고 처벌도 받지 않고 무죄였습니다.
검사 출신의 한 남성이 여성을 강간 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대로된 조사도 받지 않고 처벌도 받지 않았고 결국 무죄가 되었습니다.
그가 무죄인 것은 그 놈이 저지른 잘못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 사회와 국가가 그 놈이 저지른 죄를 덮어주고 무죄로 만들어 준 겁니까.
이것을 보고 여성을 지배하려는 남성들이 어떤 생각을 내면화하겠습니까.
국가가 나서서 ‘남자니까 그래도 되고, 힘이 있으면 어차피 무죄’라는 본보기를 만들고 보여준 건 아닙니까.
이런데도 ‘여자들이 살기 좋아진’ 세상입니까
복잡하게 말 할 거 없이 여성들이 살인 강간 폭력 협박 위협 등을 당하는 수치가 0으로 떨어진다면, 그때 가서 ‘여자들이 살기 좋아진’ 세상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와 해방 운동은 계속 될 것이고, 계속 되어야 하겠지요.
자유와 해방은 피지배자들을 위한 것이지, 지배자나 방관자를 위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이 개인이든 종교든 국가든
여성을 노예화하려는 시도에 맞서 싸우며
여성 또한 자유민이 되어 자신의 신체와 생명을 지키고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여성.가족 > 성.여성.가족-여러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Iranian Women Lead Nationwide Protests After Death of Mahsa Amini (0) | 2022.10.01 |
---|---|
‘히잡 미착용’ 이란 여성 의문사 일파만파…국제사회 규탄 확산 (0) | 2022.09.24 |
성범죄자 보호에 앞장서는 검찰과 검사 (0) | 2022.09.21 |
학교를 열라고 시위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보며 (0) | 2022.09.12 |
삶의 역경과 여성의 용기 (0) | 2022.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