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믿을 신信 힘입을 뢰賴여서,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信은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을 함께 두어 사람의 말이 타인에 대한 믿음과 관련 있다는 거겠지요.
윤석열이 미국 의회를 향해 ‘이 새끼들이’라고 하고, 바이든에게 ‘쪽팔려서’라는 말을 한 것이 방송되었습니다.
까짓 거 우리도 윤석열에 대해 이 새끼 저 새끼 하기도 하니, 윤석열이 남에게 욕을 하거나 조롱을 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대통령실 김은혜가 윤석열이 이 새끼들이라고 한 것은 미국 의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를 의미한 것이라고 한 겁니다. 바이든이라고 한 것도 ‘날리면’이라고 했다는 거구요.
대통령에게 확인했냐고 물으니까 확인했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해당 영상을 다시 찾아 틀어봤습니다. 처음엔 mbc 영상을 봤는데 혹시나 해서 ytn 영상을 봤습니다.
결과는…
하~~~ 뭐 저런 인간들이 있죠?
평화의 댐
1986년 전두환 정권 시절 평화의 댐 사건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금강산 댐을 만들어 남한을 공격하려 하니 우리도 평화의 댐을 만들어서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와 언론이 엄청나게 선전을 해댔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저도 평화의 댐 건립 기금 모금에 참여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부와 언론의 거짓말이었습니다. 온 나라를 불안과 흥분 속에 빠뜨렸던 커다란 사기극이었던 거죠.
1986년이면 독재 타도와 민주 쟁취를 외치던 시민들의 저항이 한창이던 때였구요.
자신들이 궁지에 몰리거나 위기다 싶으니 거짓을 진실인양 둔갑시키고, 시민들의 정신을 개조했던 겁니다.
1991년, 당시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지요. 군부 독재 물러가라, 민주주의 쟁취하자 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창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던 때였습니다.
경찰이 시위 중이던 학생을 폭행에 사망하던 일이 있었고, 이에 대항하는 시위가 더욱 크게 일어나고 있던 때였구요.
그리고 김기설씨가 민주화를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정부와 검찰이 김기설씨의 유서를 다른 사람이 대신 써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살을 했는데 그 유서를 누군가 대신 써 준 거라는 겁니다. 강기훈씨를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37
엄청난 공세와 선전이 벌어졌지요. 친구가 자살을 하는 것 알고서도 이를 말리지 않고 유서까지 대신 써줬다는 겁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놈들은 이렇게 잔인하고 몹쓸 인간들이라는 겁니다.
이 또한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거짓을 진실로 만들고,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누명을 씌운 사건이었습니다.
신뢰와 진화
인간은 아주 오랜 옛날, ‘인간’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훨씬 전의 먼 조상 시절부터 집단 생활을 하였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집단 생활을 통해 윤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유사 윤리적 행동 방식을 획득하게 되었다. - 피터 싱어, <사회생물학과 윤리>, 인간사랑, 17쪽
원숭이나 인간 같이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는 한 개체가 다른 개체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을 겁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 A가 원숭이 B의 털을 골라주며 기생충을 잡아주었다 하지요. 그러면 원숭이 A는 B가 자신의 털도 골라줄 거라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B가 A의 털 고르기를 받고 나서는 모른 체 했다고 하지요. 그러면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66564.html
이들의 생존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이들은 협력할 수 있을까요? 협력하지 못한다면 생존에 큰 위협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요?
다른 존재를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전에 살았던 구성원이 한 20명쯤 되는 인간 부족이 있다고 하지요. 그 가운데 C가 하루는 크게 소리를 칩니다.
적들이 쳐들어 온다~~~
그래서 모두가 싸우기 위해 무기를 들고 아이들을 숨기고 난리가 났다 하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C가 사람들을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나중에 진짜로 적들이 쳐들어 왔고, 이를 본 C가 마을에 소리를 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쟤가 또 거짓말을 한다 생각하고 믿지 않겠지요. 그리고 이들의 생존에는 큰 위협이 닥칠지 모릅니다.
영화 <아웃포스트>에 보면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한 아프가니스탄인이 미군에게 몇 번이고 탈리반이 몰려온다고 했지만 탈리반은 오지 않았지요.
그러다 어느 날 그 사람이 큰 소리를 칩니다. 탈리반이 온다고. 하지만 미군을 믿지 않았지요. 곧 탈리반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생겼지요.
제가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에 갔을 때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모내기를 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이런 식으로 모내기를 하는 거지요.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모내기를 하는 것이 훨씬 효율도 높고 일을 하기 수월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엄청난 신뢰가 깔려 있을 겁니다. 내가 저 집 모내기를 함께 했는데, 저 집 사람들은 내 논에 모내기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큰 일 나겠지요.
국가의 법으로 따지자면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니 선의로 모내기를 도와주거나 말거나 그건 별 문제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법이 아니라도 집단 생활을 유지하는데 암묵적으로 적용되던 규율 같은 게 있던 거지요.
다른 사람이 내 논 모내기를 함께 했으면, 나도 다른 사람 논에 모내기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서로 그렇게 할 거라고 믿어야겠지요.
그렇게 서로 협동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던 걸 거구요.
인간 윤리의 특징들 중 많은 부분이 자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기생충을 서로 잡아주는 것과 같은 단순한 호혜적 실천으로부터 발전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 피터 싱어, <사회생물학과 윤리>, 인간사랑, 77쪽
목욕탕과 오락실
신뢰라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신뢰와 불신의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누군가 우리를 거짓말쟁이라고 한다면 우리를 정말 정말 화가 날 겁니다. 그 사람이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한다고 해서 당장 내가 밥을 굶는 것도 아니고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암은 아니더라도 하도 억울해서 홧병이 날 수는 있겠지요. ^^
아무튼 우리는 누군가 나를 신뢰하지 않고 불신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어떻게든 해명을 하려고 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밝히려고 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나를 다시 신뢰할 수 있도록 엄청난 노력을 들입니다. 그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큰 실망감이나 좌절감을 느끼겠지요.
더 이상 인간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구요.
달리 말하면 우리 대부분 신뢰하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맺고,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아주 중요한 문제로 여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평생 동안 거짓말을 하지 않고 온전히 100% 신뢰를 지키며 산다는 건 아닙니다.
제 초등학교 때의 일이었습니다. 엄마가 돈을 주며 형하고 목욕탕에 갔다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샤워라는 말 자체가 없었고, 집에는 따뜻한 물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날이면 목욕탕에 가는 것이 큰 일이었습니다.
엄마에게 돈을 받은 우리 형제는 목욕탕에 가지 않고 오락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한창 오락을 하고 나서는 집에 갔지요. 엄마가 약간 의심스러운 듯 묻더라구요
엄마 : 너거 목욕탕 갔다 온 거 맞나?
형제 : 응!
늘 그런 식이었던 건 아니고 딱 한 번 그렇게 거짓말을 했던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상대의 신뢰를 깨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이나 신뢰를 깨는 행위도 그 정도가 있고, 질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약 엄마였다면 아들들이 목욕탕을 갔다 온 건지 아닌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그래도 자식들이 늘 그런 것도 아니고 한 번 오락실 갔다 온 건 정도는 넘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
하지만 앞에 예로 들었던 것들, 평화의 댐이나 강기훈씨 사건이나 모내기의 경우는 그 정도나 질이 다른 거지요.
강기훈씨가 친구의 유서를 대필했다고 거짓을 조작함으로써 본인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감옥에 갔습니다. 수십 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 받았지만…이미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검찰의 말을 신뢰했던 것이 오히려 강기훈씨에게는 모욕과 고통이었던 거지요.
강기훈씨와 친분이 있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그를 어떤 인간으로 바라봤을까요
누구를,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사건이 달라지고 인간관계가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의 독일이, 전두환의 대한민국이 그토록 공을 들여서 했던 작업이 시민/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믿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편이 되도록 만들었던 거지요.
기만과 이익
한 침팬지는 음식이 든 몇 개의 상자와 뱀이 든 한 개의 상자를 보여 줬더니 자신의 동료들을 뱀 쪽으로 끌고 가고,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자 혼자 편안히 음식을 꺼내 먹었다.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동녘사이언스, 2017, 301쪽
인간이건 침팬지건 다른 개체를 속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만
남을 그럴듯하게 속임
속일 기欺, 속일 만瞞입니다.
<삼국지> 같은 전쟁 이야기에도 자주 나옵니다. 아무 위험이 없는 것처럼 보여줌으로써 매복 공격을 하거나 기습을 하지요. 또 아니면 적은 숫자를 아주 많은 것처럼 보여 상대를 위축되게 합니다.
만약 김건희가 주가조작을 했다면, 주가조작은 한 것도 기만이고 윤석열이 이를 부인한 것도 기만이겠지요.
물론 기만의 목표는 이익일 겁니다. 앞의 침팬지가 다른 침팬지를 속이고 자기만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만약 김건희나 윤석열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다면 어떨까요?
저 같으면 아주 싫을 거에요. 자신의 이익만을 챙긴다는 것도 싫지만 더욱 큰 것은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거예요.
마주 앉아 대화를 한다고 해보지요. 그러면 저 사람들이 진짜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꾸며서 말하는 것인지 헷갈릴 거예요.
쉽게 남을 속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싫고, 그런 사람과 마주 앉아 말을 섞는다는 것도 싫을 거에요.
결국 저 사람들은 신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기만함으로써 권력이나 돈과 같은 이익은 챙겼지만 저 같은 사람의 신뢰를 잃어버린 거지요.
물론 저 같은 놈이 신뢰를 하든 말든 상관도 않겠지만. ㅋㅋ
만약 누군가 저를 신뢰하지 않고 저의 말 하나하나를 의심의 눈초리를 바라본다면 저는 참 괴로울 것 같아요.
설사 내가 좀 더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상대를 기만한 것이 아니고 나를 신뢰해도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을 거예요.
당장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서로 믿고 신뢰해야 함께 있을 때 편안하게 느껴지고 안심할 수 있고, 또 무언가를 함께 즐겁게 할 수 있을 거잖아요.
밥을 한 번 같이 먹어도 그렇고, 커피를 한 잔 먹어도 그래요. 내가 상대를 신뢰할 수 있다면 까짓 거 밥 한 번 커피 한 번 내 돈 내고 사는 게 아무 문제도 아니잖아요.
그만큼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만큼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크니까요.
정치와 신뢰
공자나 맹자의 얘기에서 많이 나오는 것이 요순과 같은 옛날 성왕의 이야기입니다.
요순이 실존했느냐 아니냐, 그들이 행했다는 것이 사실이냐를 떠나서 말입니다.
공자나 맹자 등이 요순이나 훌륭한 선비의 얘기를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고 배워서, 우리도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어보자는 게 아니었을까요
물론 지금은 공자나 맹자의 얘기가 현재 시대와는 맞닿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당장에 지금 한국에는 왕이나 황제라는 존재는 없지요
대대손손 왕이나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선대 왕의 선행을 들려줌으로써 본받아 바른 정치를 행해야 할 후대의 왕도 없습니다.
그러니 대통령 또한 다른 시민들에 비해 특별히 아주 깨끗하고 완벽한 도덕성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시민 가운데 한 명이 대통령이 되는 거니까요.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시민들의 탁월한 모범이 될 필요도 없고, 우리가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따라 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의 인성이나 세계관이 이 사회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는 장관이나 기관장의 숫자만 해도 어마어마 하지요.
그만큼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방향으로 행동하느냐는 저 같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파급력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이 시민들의 모범이 되기는커녕 거짓말을 일삼는다면 어떨까요?
거짓말을 일삼는 것도 모자라 거짓말을 덮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날까 봐 진실을 말한 자를 핍박한다면 어떨까요
그냥 보통의 한 개인이 그렇게 행동을 해도 문제일 건데, 엄청난 권력과 힘을 가진 자가 그렇게 행동을 한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써도 모자랄 인력이나 예산을 거짓말을 진실로 만드는데 동원할 겁니다.
지금 당장 보면 대통령실이나 행정부, 국민의힘 같은 정당은 물론이고 언론이나 시민들이 나서서 대통령을 옹호하려 하지요
권력이든 돈이든 제 이익을 지키려고 거짓말을 하고 신뢰를 깨버린 것은 물론이고, 또 다른 사회적 낭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반면 다시는 수해로 인해 지하방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980
진실이 진실로 인정받아야 서로 신뢰할 수 있고, 서로 신뢰할 수 있어야 사회가 좀 더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텐데, 오히려 대통령과 그를 옹호하는 자들이 사회를 불신의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는 거지요
신뢰를 버리고 이익을 얻을 것인지
이익의 관점으로만 보지요.
지금 당장에는 신뢰를 버리고 이익을 얻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할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큰 손해일 수도 있습니다.
신뢰를 얻는다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을 놓칠 수도 있는 거지요.
이 관계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고 이런저런 일들로 계속 이어질 때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업들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엄청난 광고비와 노력을 쏟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음식에 넣어서는 안 될 값싼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당장에는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만약 알려지게 되면 장기적으로 큰 손해를 볼 수 있으니까요.
지금 당장은 손해를 좀 보는 것 같고 지출이 느는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는 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는 거지요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진실을 밝히고 사과를 하면 당장에는 욕을 좀 먹더라도 장기적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지요. 신뢰를 얻으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더 많이 할 수도 있는 거구요.
그러면 왜 당장의 작은 손해를 통해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지 못하는 걸까요
avolio와 luthans에 따르면,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확신이 있으면 있을수록 타인과의 교류에 있어서 얼마나 투명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명확히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투명해지는 것이 때론 취약해진 것같이 느끼게 만들지만, 불안을 야기하거나 남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는 수준이 될 정도로 취약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의 핵심 가치를 잘 알고 있고, 그 핵심 가치가 높은 도덕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면, 왜 타인과 상호작용할 때 투명해지기를 원치 않겠는가? - Shane J, Lopez 편, <긍정심리학4-인간의 번영 추구하기>, 학지사, 2011, 354쪽
지금 당장은 손해를 입더라도 장기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타인은 물론 자신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 길이며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믿어야겠지요.
그런데 내가 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도 모르고, 게다가 자기가 봐도 자신의 상태나 행동이 어이없이 여겨진다면 어떨까요.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없는 판국에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겠지요.
그러면 위기가 닥쳤다 싶으면 둘러대고 변명하고 거짓말을 해서 어떻게든 위기를 피하고 보는 겁니다.
눈앞에 당장 챙길 수 있는 이익이 있다면 일단 얼른 챙기고 보는 겁니다. 그다음은 그다음에 생각하면 되는 거지요.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441
자신과 타인을 불신하는 인간일수록 타인과 신뢰의 관계를 만들기 어렵고, 신뢰의 관계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또 불신하게 되는 거겠지요.
결국 남는 것은 눈앞의 이익에 허덕대는 초라한 몰골의 권력자일 뿐입니다.
신뢰를 버리고 이익을 얻을 것인지, 이익을 버리고 신뢰를 얻을 것인지는 본인이 선택할 일입니다.
그 선택에 따라 어떤 인간이 되는지도 결정 나는 거겠지요.
결과에 대한 책임도 본인의 몫이고요.
'지배.착취.폭력 > 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BBC-우크라-러시아: 조국의 전쟁을 바라보는 사람들 (0) | 2022.09.29 |
---|---|
AJ - Who is Vladimir Putin? (0) | 2022.09.29 |
권력자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갈망 (0) | 2022.09.20 |
양심도 반성도 없는 권력자의 위험성 (0) | 2022.09.19 |
정치적 위선과 위선적 정치 (0) | 2022.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