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의 사원 제도의 가장 독특한 점은 경작 의무의 도입에 있다. 이 의무는 모든 승려에게, 즉 방장에게도 요구된다. 백장 이전에는 승려들이 생산에 종사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일용 양식을 완전히 시주에 의존하였다. 원래 인도의 승려들은 땅을 파고 갈면서 혹시 벌레와 곤충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여 논밭을 경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인도와 같이 풍부한 열매와 야자만으로도 굶주림을 때울 수 있는 열대지방에서는 가능하였을 것이다.
백장의 실제적 분별력은 시주에만 완전히 의존한다는 생각에 반기를 들게 하였다. 왜 몸이 성한 승려들이 기생충처럼 속인들의 땀과 노동에 의탁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는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하루의 일부는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갈아 주로 자신의 노동으로 살게 하고, 다만 부차적으로 시주를 받게 하였다.
더 나아가 수확은 속인과 같은 기준으로 납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혁명적인 조치여서 백장은 처음에 보수적인 승려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개혁가들과 같이 그는 그의 확신에 대한 용기가 있었으며, 큰 수도 단체의 방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였다.
그의 좌우명인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은 어느덧 모든 종파의 승려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금언이 되었다.
백장은 94세까지 살았다. 그의 말년에 관해서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즉 제자들은 백장이 너무 나이 많음을 염려해서 경작 일을 그만하도록 권유를 하였는데,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연장을 감추어 버렸다. 이에 백장은 사방으로 찾으려다 찾지 못하자 연장을 돌려 줄 때까지 단식을 하였다고 한다.
- [선학의 황금시대], 163쪽